카구라- 2007.06.09 동아시아탈춤대축전,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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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다시래기- 2007.06.10 동아시아탈춤대축전,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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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와 황매희- 2007.06.09 동아시아탈춤대축전,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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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오광대- 2007.06.09 동아시아탈춤대축전, 진주






삼천포 농악- 2007.06.08 동아시아탈춤대축전,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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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 사자놀음 - 2007.06.09 동아시아탈춤대축전,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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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별산대- 2007.06.08 동아시아탈춤대축전,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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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문화 연구소 2007 춘계학술대회
『“동아시아 가면극의 형성” - 가면극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참가하고 -  강 대 웅

Ⅰ.서론

 제 10회를 맞이한 진주탈춤한마당이 올해는 동아시아탈춤 축전으로 더욱 커진 판에서 축제를 열었다. 이번 축제의 주제는 -동아시아의 미적 동질성을 찾아서 이다. 이러한 축제의 주제에 맞추어 ‘동아시아가면극의 형성과 가면극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주제로 국제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심포지움을 통한 연구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탈춤 문화를 통해 각국의 문화를 비교하고 우리안의 미적 동질성을 찾는 계기를 가져보았다.


Ⅱ.본론
   1. 한국 가면극의 성립을 보는 시각
- 전경욱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한국의 전통연희는 중국·서역 연희와의 교류를 통해 성립·발전 하였고, 자생적 전통의 연희들도 외래 연희들과의 관련 속에서 변용·발전·재창조 되면서 독자적인 연희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중국 한나라에서 2000년 전에 축조된 무덤 속 석벽과 석관에 그려져 있는 다채로운 산악·백희의 모습이 우리나라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되어 있는 산악·백희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고구려의 수산리 고분벽화에는 코가 큰 서역인이 연희를 즐기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그 시대에 서역인들이 직접 우리나라에 왕래 하였으며 그 중 일부는 우리나라에 정착하기도 하였다고 보여 진다. 이렇듯 활발했던 삼국시대에 중국·서역과의 교류로 인하여 들어온 산악·백희는 우리나라를 거쳐서 일본에 고려악이란 이름으로 전래되었고 9세기 중엽에 외래악무를 정리하면서 당나라와 인도(천축) 등의 악무를 좌방악, 삼국 및 발해의 악무를 우방학이라 불렀다. 
 산악·백희는 고대에 무용·음악·연극·체육·무술 등이 세분화되지 않은 채 연행되던 총체예술로서 서민적인 연희였다. 중국에서 산악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이 연희를 발전시켜 ‘나희’ 라는 가면극을 성립시켰고, 일본에서는 이것이 ‘노’라는 가면극으로 발전했다. 한극에서는 중국 사신 영접시에 나래도감에 동원되어 연희를 펼치던 반인들이 18세기 전반기에 산악·백희 계통의 연희와 기존의 가면희들을 바탕으로 재창조해 낸 것이 ‘본산대놀이’ 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가진 가면극의 시작이며 이것이 전국으로 전파되어 각 지방의 특징을 띄며 발전해 나갔다. 서울의 송파산대, 양주별산대,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탐춤, 수영야류·동래야류·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 남사당패의 덧뵈기 등이 이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겨난 우리나라 가면극이다.
 전문 연희꾼에 의해 이루어지는 본산대놀이 외에도 마을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마을굿놀이 계통의 가면극도 있었다. 하회 별신굿놀이나 강릉관노 가면극과 같은 형태의 가면극은 마을굿에서 유래하여 발전해온 토착적·자생적 가면극이다.
 고려시대의 기록인 고려사에서 보면 전문 가무잡희를 행하는 전문 놀이꾼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거란인을 포함한 북방이민족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가면을 쓰고 놀이하는 자들을 광대라고 불렀다. 이들은 조선시대가 되면서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인 ‘반인’이 되었다. 이들은 소를 도살하는 백정 일을 하였으며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며 산대놀이를 계속하였다.
 우리나라 연희의 특징은 우희를 통한 양반계층과 같은 시회 지배계층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상은 다른 나라의 산대·백희에서도 유학자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나타나지만 우리처럼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은 것이다.
 「도목정사놀이」는 이조판서와 병조판서가 서로 정실로써 조카와 사위의 임명을 청탁하는 내용으로써 양반계층의 부정을 폭로하고 있다. 「탐관오리놀이」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하여 부패한 관리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문희연에서 반드시 연행되던 유희도 우희연의 일종이다. 유희는 선비를 풍자하고 유가를 조롱하는 내용인데, 이를 위해 유학의 경전도 자주 인용된다. 이렇듯 유희에 이미 양반 풍자가 포함되어 있었음으로 이후의 가면극에서 양반과장의 성립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전국의 모든 가면극에 양반과장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에서는 양반과장이 그 분량과 내용 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듯 모든 가면극에서 양반가면은 언청이이거나 문둥이, 혹은 입과 코가 삐뚤어진 비정상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어 다른 가면과 구별이 된다. 이는 서민층이 지배층인 양반의 위선과 비리를 폭로·비판하면서, 그들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표현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전문 연희꾼에 의해 이루어지는 본산대놀이 외에, 마을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마을굿놀이 계통의 가면극도 있었는데 이것은 우리만의 자생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마을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마을의 안녕과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행사가 각 마을마다 있었으며 이것을 마을굿, 즉 동제라고 한다. 이러한 마을 굿 중 일부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가면으로 형상화 한다. 성황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성황대에 신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신이 내리면 성황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가호호를 방문했다. 이때 수호신을 상징하는 가면을 모셔서 즐겁게 하였으며 이를 중심으로 가면극이 형성 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일본의 ‘카구라’에서도 나타나는데, 고대국가 성립의 역사를 신화적 연극으로 나타내는 이 가면극에서 신은 가면 그 자체로써 숭배의 대상이다. 


   2. “큐슈 · 가면극의 형성” - 타카미 겐지(큐슈민속가면미술관 관장)
 발표: 미키미 토시미

 일본의 탈춤인 카구라는 제사와 연희가 합쳐진 형태를 가지며 그 자체로 일본의 축제인 마츠리 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때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실존주의 적이고 인식론 적인 사고를 받아들이면서 카구라 속에 포함되어 있던 신내림과 같은 제사의식이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사라지고 지금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카구라의 연희적이고 오락적인 부분이 강화되어 특정한 날짜에 행하는 의례가 아닌 극장에서 공연하는 ‘노(能)’ 라는 이름의 또 다른 카구라도 생기게 되었다.
 큐슈의 카구라는 하늘신(=천손족의제사자)과 나라신(=선주신, 토지의 정령) 이 격하게 대립하고 맞버티고 융화를 반복하는 이야기로 형성되어 전승되어 왔다. 그 기원은 인도의 불교 설화나 중국의 나희, 한국의 가면극과 공통점을 가진다. 여기서 나타난 하늘신이 백제 도래인 이며 선주신을 일본 토착세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렇듯 아시아의 가면극은 큰 고리와 시공 축 속에 형성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승되어 진 것으로 보여 진다. 이 카구라는 많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이야기들을 정리하면
 ⑴ 큰 구렁이 퇴치 설화
지방의 신의 딸을 산 제물로 받은 거대한 구렁이를 구출하고 보검을 받는 이야기이며, 이것은 야마토 정권의 이즈모 지배를 의인화 한 것이다.
 ⑵ 태양신이 바위틈으로 사라져서 어둠이 찾아오고 이 태양신을 달래서 빛을 찾는 신화. 이 이야기는 고대 중국의 일식 의례와 닮아 있으며 동지(일년 중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의 히고이 의례와 섞여있는 형태를 가진다. 일본 고대국가 창건 설화이기도 한 이 이야기는 카구라의 클라이막스이다.
 ⑶ 천손강림전승
하늘에서 천손이 내려온다. 원래 이 당의 주인이었던 국토의 수호신은 이 천손을 받아들여 그들이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돕는다. 이렇게 하여 세워진 일본 최초의 고대 통일 국가가 야마토 정권이다.
 ⑷ 해신의 카구라
바다의 카구라이다. 해신과의 습속을 보여주며 생선낚시 춤 등을 통해 해류를 타고 남쪽 바다를 왕래했던 고대족의 습속을 보여준다.
 ⑸ 영감·논의 신·익살꾼
우스꽝스러운 동작들을 하여 웃음을 자아내지만 이들은 토지신들 이다. 자신들의 예능을 바침으로써 도래한 신을 축복한다. 이들을 선주 백성들의 대표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익살 속에는 천신에 대한 불복종과 풍자의 마음이 담겨져 있고 이러한 점은 우리의 탈춤의 양반 등의 지배계층에 대한 풍자 정신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착한 귀신이 나쁜 귀신을 쫓는다는 이야기 서사 구조와  탈의 조형성과 그 형태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아시아의 탈춤은 놀랄 만큼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3. 나희의 예술 형태와 형성에 대한 새로운 탐색 -
유정(중국예술연구원 희곡연구소 교수)
 
 중국의 나희는 인류의 생존과 발전을 제약하고 있는 거대한 힘으로써의 자연의 영향력을 인간에게 이롭게 하기를 원하였고 인류가 인지할 수 없는 우주자연 속에서 상호 소통하여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를 찾기 위해 만들어 졌기 때문에 사람과 우주·자연의  모순과 충돌을 기본 명제로 가진다. 이러한 활동의 산물이 나(儺)이고, 이것이 중국인들이 생각한 인간과 자연사이의 통로였다. 나(儺)는 음양의 조화를 통해 만물이 제때 자라고 순수의 길흉을 점쳐 끝내 좋아지는 사회적 조화를 추구하는 행위이다. 섣달 그믐이 되면 궁정에서는 대나의식을 치렀다. 가면을 쓰고 화려한 옷을 입고 갑옷을 입는 등  천명이 넘는 무리가 장군,문신,판관, 종규,소매,토지,조신 등의 각종 신으로 분장을 하고 궁정 안에 있는 악귀를 성 밖으로 몰아낸다. 이러한 좋은 귀신이 나쁜 귀신을 쫓는 이야기 형식은 아시아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중국의 나희 또한 다른 동 아시아의 탈춤과 마찬가지로 의례인 제의와 연희인 희극이 합쳐진 형태를 가진다. 하지만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가 형성되면서 의식과 희극은 나뉘어져서 결국 나희는 민간 희극으로써 발전해나가게 된다. 이러한 형태의 변화 과정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으로 인한 근대화로 인한 카구라의 변화와 공통점이 많다. 하지만 희극이 의식과 결별하여 독립 하였지만 그 상호 연결된 탯줄이 완전히 절단된 것은 아니다. 나희와 희극의 의의는 중국인들로 하여금 그들 희극의 전모를 볼 수 있게 해주고 희극의 본질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데 있음으로 중국의 희극의 정의와 역사는 다시 써져야 한다. 

 

 Ⅲ.결론
 
 한 · 중· 일의 각국의 탈춤에 대한 세 사람의 논문을 비교하여 읽어보면 그 내용과 형식면에서 놀랄 만큼의 공통점이 발견됨을 알 수 있다. 삼국의 탈춤이 모두 제의와 연희의 혼합 형태를 가지고 있었으며 특정한 날에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진 의례였다. 하지만 이것이 시대 변화에 따라, 그리고 각국의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지금은 제의의 성격보다는 연희로써의 연극적이고 오락적인 부분이 특성화 되어 그 모습이 변형 되었다. 하지만 탈춤은 예나 지금이나 그 자체로서 축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동아시아의 공통점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공통점이다. 아프리카 원시 부족도 제사와 의식 때에 가면을 착용하고, 사라진 마야문명에도 가면이 있었으며 유럽의 카니발에서도 가면은 축제의 큰 축이다. 이는 가면이 가지는 주술적인 힘, 즉 가면을 착용함으로서 그 순간만큼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 다른 존재가 되는 듯한 효과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각국의 탈춤을 통한 문화 비교 연구는 탈춤만이 아닌 다방면의 비교 연구로 확대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인식과 문화 속에 자리한 미적 공통성과 인식의 보편성을 찾음으로써 각국의 다른 문화·역사에 따른 인식의 차이에서 온 장벽을 무너뜨리고 동질성과 보편성을 토대로 더욱 가까워진다면, 이것이 바로 축제의 기본 정신인 모두가 하나 되어 행복한 “대동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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