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6파 철학 

     

 

인도철학은 힌두의 가장 오래되고 신성한 문헌인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따라 정통파와 비 전통파로 나누어 진다. 정통파는 절대자이자 창조주인 이슈바라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리고 이 절대 신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의 인격신으로 찬양과 제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 실재로 논의 될 경우에는 탐구의 대상이 된다. 즉 베다의 가르침은 유신론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무신론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비 전통파는 무신론적으로, 합리적인 우리의 경험과 사유를 벗어난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보며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에 더욱 가깝다.

 

 전통파와 비전통파의 이러한 구분은 기원전 6세기에 일어났다. 전통적인 사상에서 벗어나려는 자우사상가들이 등장하자, 전통을 이어가던 사상가들은 이들 자유사상가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의 전통 사상을 더욱 체계화하게 된다. 이런 전통사상을 고수하기 위한 사상의 체계화를 통해 탄생하게 된 것이 6파철학이다. 그 중 상키야(Samkhya) 학파는 요가(Yoga) 학파와, 니야야(Nyaya) 학파는 바이셰슈카(Vaisesika) 학파와, 미맘사(Mimamsa) 학파는 베단타(Vedanta) 학파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각 학파는 앞서 언급한 바와같이 전통적인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며 우파니샤드에서 언급된 업과 윤회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각 학파는 ‘수트라’라고 불리는 근본경전을 따로 가지고 있으며 각 경전에 대한 주석을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구체화 시켜나간다

 

 

 

1. 정통파 - 6파 철학

 1)미맘사 - 베다의 제의적 또는 금령적 부분에 바탕을 둠. 제의를 통한 해탈을 추구.

 2)베단타 - 우파니샤드에 바탕을 둠. 해탈의 수단으로 지식을 강조.

 3)바이세시카 - 다원론적 실재론으로 세계를 해명함.

 4)느야야 - 그 다원의 실재에 대한 논리와 타당한 지식에 대한 질문들을 통해 해탈 추구.

 5)샹카 - 근본원질과 순수정신이라는 이원의 실재로써 세계를 해석.

 6)요가 - 이원의 실재를 요가 수행을 통하여 분별 하려고 함.

 

2. 비 전통파

불교, 자이나교, 차르바카

 

 

 

 

1) 미맘사 학파

 

미맘사 학파는 제사의례를 통한 해탈을 연구한 학파로 철학적인 성격은 약하다. 이 학파의 개조는 ‘자이미니’이며, 근본경전은 미맘사 수트라이다. 베다 성전은 제사부에 관한 학문과 (제사 미맘사 또는 전()미맘사), 지식부에 관한 학문(베단타 미맘사 또는 후() 미맘사) 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에서 제사부에 대한 학문은 미맘사학파에 의해 전개되며, 지식부에대한 학문은 베단타 학파로 이어져 전개되었다. 이렇듯 두 학파는 전통 브라흐만의 베다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며 따라서 미맘사 학파는 베단타 학파와 자매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맘사 학파는 다르마(dharma)의 연구 고찰이 그 목적이다. 그 다르마란 베다 성전에 규정되어 있는 제식의 실행과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켜야할 의무가 담겨있다. 인생의 목적은 해탈인데 해탈은 바로 제식의 실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신념에 의하면 베다성전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고, 실제로 우주의 변화 ㆍ 생멸을 초월해서 영원히 실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맘사학파는 베다에 나타난 제식의 타당성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이들은 베다 성전이 말로 되어 있기 때문에 베다의 영원불변성과 같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언어를 소리와 의미의 두 가지로 나누어 고찰한다그들에 의하면 비록 언어의 소리는 무상하지만 의미는 항구불변한다. 따라서 영원불변의 의미와 결합한 베다의 모든 언어에는 어떠한 오류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미맘사 학파에 의하면 말이라는 것은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음성을 초월하여 실재하는 것이다. 음성은 무상한 것이지만 말에는 음성을 초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며, 음성과 의미가 결합될 때 말은 영구불변하게 된다고 한다. 즉 말과 의미의 결합관계는 영구 불변하며, 인식상 개인의 주관을 초월하는 것이다.

 

2) 베단타 학파

 

베단타는 원래 '베다(veda)의 끝 혹은 결론(anta)을 의미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정통 인도 사상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끝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베단타(Vedanta)'라고 부른다.

베단타 학파와 관련된 대표적인 학자는 자이미니(Jaimini)와 바다라야나(Badarayana)이다. 자이미니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베다 성전 중에 제사부에 관한 것을 설하는 미맘사 학파의 개조가 되었고, 바다라야나는 지식부에 관한 연구를 시도함으로써 베단타 학파의 개조가 되었다. 즉 베단타 학파는 제사가 아닌, 베다의 근본 의미를 탐구하는 지식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우파니샤드 철학자들은 다원론적인 견해를 배척하고 다양한 현상 세계의 배후에 단 하나의 궁극적이고 통일적인 실재가 있다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펼친다. 여기서 궁극적인 실재이자 우파니샤드의 중심 논제인 브라만의 탐구가 베단타 학파의 주요 임무이다.

브라만()은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근원적 힘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물을 생성시킨 절대자이기도 하다. 브라만의 최초의 운동으로 허공이 생기하고, 허공에서 바람, 바람에서 불, 불에서 물, 물에서 땅이 생기한다. 이들 5원소가 창조된 경우 브라만은 이들 속에 머무르며 창조에 전념한다. 이리하여 자연 세계가 성립된다. 브라만은 내재자로서 피조물의 일체를 그 내부에서 지배한다. 현상 세계가 전개된 후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존속하다가 다시 브라만으로 돌아간다.

이와 같이 우주의 창조 ㆍ 지속 ㆍ 귀멸은 무한히 반복된다. 이 가운데에서 개아는 처음부터 계속하여 윤회를 거듭하고 있다. 개아는 브라만의 부분이다. 따라서 개아는 브라만과 다름과 동시에 다르지 않기도 하다.

인생에 있어 최고의 목적은 해탈이다. 해탈은 개아와 브라만의 합일이다. 제사 등의 행위를 실천하여도 아직 브라만에 대한 올바른 지혜를 얻지 못한 개아는 해탈할 수 없다. 그러나 브라만에 대한 올바른 지혜를 얻은 개아는 최후에는 브라흐만과 구별이 없어지며 해탈한다.

 

 

 

3) 바이세시카 학파

 

바이세시카 학파는 카나다(Kanada)라는 인물의 저서로 전해지고 있는 승론경(勝論經, Vaisesika-sutra)을 근본 경전으로 한다. 바이세시카 학파에 의하면 베다에 따라서만 행동한다면 윤회의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 해탈을 위해서는 6가지 원리의 연구와 요가를 함께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의 구성 원리는 여섯 가지로 실체(dravya), 성질(guna), 운동(karman), 보편(samanya), 특수(visesa), 내속( samavaya)이다.

실체는 성질이나 행위의 근저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이며, 어떤 물건들의 질료적 원인이 되는 것이다.

바이세시카에서 말하는 실체 9가지

(, prthivi), (,ap), (, agni), (, vayu), (, akasa), 시간(時間, kala),

공간(空間, dis), 의근(意根, manas), 자아(自我, atman)

이 가운데 물질적 실체인 흙, , , 바람은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결코 파괴되지 않는 원자로 구성된다.

반면에 복합체인 지ㆍ수ㆍ화ㆍ풍은 생성ㆍ소멸하므로 영원하지 못하다. 바이세시카 철학에 의하면 우리가 만지고 볼 수 있는 모든 물질은 원자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은 이들 영원한 원자를 각각의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결합시켰다 다시 분리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와 같이 원자가 복합체를 형성하므로 모든 우주의 물질세계가 성립되지만, 이 결합운동을 최초로 일으키는 힘은 신에 의한 것임으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다.

6가지 원리의 연구와 함께 요가를 실행해야 하는데 이를 통해 마나스를, 즉 인식을 제어하여 전생으로부터의 남아 있는 힘을 소멸시키면 해탈이 실현된다. (마나스는 사물을 지각해서 인식을 성립하게 하는 것이다) 그 경지에 이르면 아트만은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순수한 실체로 존재한다.

이 학파는 베다 성전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식이란 추론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의 일종일 뿐 독립적 지식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경험을 통하여 일어나는 순수한 지식만을 실체로 인정하고 있다.

 

 

4) 느야야 학파

 

느야야 학파의 창시자는 고우타마(Gautama)이며, 이 학파의 근본 경전은 니야야 수트라(Nyaya-sutra)이다. 다른 학파들이 우주를 하나의 전체로 이해하려는 명상적 수행방법을 택하고 있는데 반해, 느야야 학파는 바이세시카 학파와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이론과 현상분석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려는 것이 느야야 학파의 목적이다.(‘느야야’라는 말은 원래 ‘이론(理論), ‘정리(正理)’를 뜻하는 말이다) '이론 정리'를 뜻하는 느야야의 어원대로 이 학파는 논리적 추론을 통한 올바른 지식의 획득이 바로 해탈이라고 주장한다.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 4가지

1. 직접지각(pratyaksa), 2. 추론(anumana), 3. 비교(upamana),  4. 증언(sabda)

 

1. 직접지각은 감관과 대상의 접촉에서 생기며 오류가 없는 지식이다. 이는 의심이나 오류 그리고 가설적 논파나 기억에 의해 얻은 타당치 못한 지식과 구별해야 한다.

2. 추론은 직접지관에 근거하여 증인(-연기)에서 증인을 지니는 것(-)을 추리하는 인식수단이다.

3. 비교는 새로운 어떤 것을 이전부터 잘 알고 있던 다른 것과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아는 지식이다. 예를 들면 물소는 소와 비슷하다는 가르침을 듣고, 나중에 소와 유사한 동물을 보면 이것이 물소임을 아는 지식이다.

4. 니야야 학파의 인식론에서는 주로 믿을만한 사람의 말이나 증거의 의미를 이해하여 생기는 지식을 의미한다. 이들 인식수단에 의해 인식되는 인식대상은 아트만, 신체, 감각기관, 감각기관의 대상, 지각, 사고기관, 활동, 결점, 전생, 행위의 과보, , 해탈이다. 이 체계의 16항목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고 그릇된 지식을 제거하면, 괴로움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즉 해탈이 달성된다.

 

 

 

5) 샹카 학파

 

인도 전통에서는 샹카 철학이 인도 철학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존하고 있는 최고의 원전은 이슈바라크리슈나의 상키야카리카(Samkhya-karkia)이다.

샹카 철학은 불교와 같이 세계를 고()로 보며, 이 고를 극복하는 데에 철학적 사유의 목적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이 샹카 철학은 비록 정통철학의 범주에 속하지만 불교와도 상당한 연관을 맺고 있다. 무신론적 경향을 띠고 있는 이 학파는 세계가 신과 같이 신성하고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프라크리티라는 실제로부터 전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요가의 체험에 기초한 인간의 심리현상의 관찰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샹카 학파에서는 우파니샤드에의한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피하고, 그 대신에 두 가지 원리인 수수정신의 푸루샤(purusa)와 근본물질의 프라크리티(prakrti)를 상정하므로 이론적인 입장을 취한다.

 

푸루샤는 정신적 원리이며 프라크리티는 물질적 원리이다. 어느 것도 환상(maya)이 아니며 실재이다. 프라크리티, 즉 물질이란 푸루샤를 제외한 현실 세계의 전개원리로서 일체의 현상이 그로부터 발전해 나온다. 푸루샤는 방관자로서 어떠한 활동을 하지 않고 프라크리티를 관조할 뿐이다. 그 자체는 순수청정, 상주불변하며, 생사, 윤회, 해탈도 푸루샤와는 무관하다.

푸루샤는 영원하고 무한하며 부분과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는 반면에 프라크리티는 근본적인 질료인이다. 이 푸루샤는 비록 그 자체는 전혀 활동성이 없는 존재이지만 프라크리티로 하여금 최초의 균형을 깨고 세계전개를 시작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근본 원인이다. 따라서 샹카 철학에 의하면 해탈이란 바로 프라크리티가 다시금 평형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프라크리티가 평형의 상태로 돌아가면 푸루샤와 독릭접으로 존재하는 상태가 되어 해탈이 이루어진다. 상키야 철학은 해탈을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올바른 지식을 강조한다.

하지만 사람은 올바른 지식을 갖기가 힘들다. 우리가 잘못 인식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잘못된 인식은 아함카라는 자아의식에서 나온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늘 자기본위로 모든 것을 해석하려 하고, 사물에 대해서도 자기 것이라는 견해를 품게 된다. 이 아함카라, 즉 자아의식은 원래 물질적인 근원적 사유기능을 자아라고 잘못 생각하여, 근원적 사유 기능과 푸루샤를 동일하게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자아의식의 잘못된 생각이 우리들의 윤회를 성립시키는 근본이 되고 있다.

 

순수정신이 근본물질과 결합하는 것은 근본물질을 관조하기 위한 것이며, 근본물질이 순수정신과 결합하는 것은 해탈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결합으로 인해서 순수정신은 본래의 순수청정성을 발휘할 수 없으며, 물질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고()를 경험하고 윤회를 거듭한다. 하지만 순수정신은 본성상 해탈되어 있으므로 윤회의 주체는 아니다. 실제로는 근본물질이 스스로를 속박하거나 해탈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물질은 자성에 의해 스스로를 속박한다. 그러므로 근본물질이 순수정신의 목적이 달성되어야함을 앎으로서 해탈할 수 있다.

 

 

6) 요가학파

 

요가 학파는 무엇보다도 요가수행에 의하여 자아가 세속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워지는 체험, 해탈을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이 학파의 근본 경전은 파탄잘리(Patanjali)의 요가수트라(Yoga-sutra)이다. 요가는 '결합하다, 합일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말 그대로 심신의 조절을 통해 신과의 합일이라는 형태의 해탈을 추구한다.

이 학파의 교리는 상키야 철학과 거의 같다. 상키야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요가 철학도 우주의 궁극적 원리로서 순수정신과 근본정신을 인정하는 이원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가는 실천과 수행의 면을 더욱 강조한다.

요가 학파에 의하면 푸루샤는 본래 순수정신으로서 활동하지 않고 상주불변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대상에 따라 변하는 붓디의 비추어진 상태들과 혼동되기 때문에 푸루샤 자체가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든 것이다. 따라서 해탈을 위해서는 붓디와 푸루샤를 분명히 구별하는 분별지가 필요하다.

요가 철학에서는 붓디와 아함카라 그리고 마나스를 포함하여 마음(citta)이라고 한다. 마음은 전생에서 경험한 흔적이나 인상 또는 업을 지는 윤회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업의 흔적을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에 의한 모든 작용이 그쳐야만 해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가 철학에 의하면 마음은 다섯 가지의 번뇌에 의해 침투되어 마음에 축적되어 있다. 이들 다섯 가지 번뇌는 무명(avidya), 자기 의식(asmita), 탐욕(raga), 증오(dvesa), 생존욕(abhinivesa)이다. 이 중에서 무명은 가장 근본적인 번뇌이며, 다른 번뇌의 근원이다. 또한 업의 축적과 이에 따른 업보의 근원이다.

이러한 마음의 작용과 이미 축적되어 있는 번뇌를 제거하기 위하여 요가철학은 8가지 단계로 된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제계, 내제, 좌법, 조식, 제감, 집지, 선정, 삼매이다. 이 중에서 처음의 5단계는 외적 단계이고, 나머지 3단계를 위한 준비 단계이다. 그리고 요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마음작용이 그친 삼매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

석가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1. 머릿말

이 책에서 필자는 석가가 깨달은 사람의 전범임에는 틀림없으나, 우리가 꼭 석가를 통해서만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예를 들면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기독교의 주장과는 정면 상반되는 주장이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하지만, 석가는 다만 그가 가르친 내용을 따르라고 충고할 뿐이다. , 불교는 석가를 통하지 않고도 -다른 스승을 통하거나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특성에 의해 불교는 인도에서 비전통파로 분류된다불교가 발생한 인도에서는 학파적 구분으로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6파 철학과 이를 인정하지 않는 비 전통파가 있는데 불교는 자이나교와 함께 이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비 전통파이다. 여기서 전통파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을 탐구의 대상으로 논의 될 때는 무신론 적이지만, 브라흐만을 창조주이자 절대신, 인격신인 이슈바라로 논의 될 때는 유신론 적이다. 하지만 불교는 그 시작부터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비 전통파로 출발 하였고 궁극적 실재와 자재신을 부정하였다. 오직 인간의 경헌과 일치하는 것만을 진리로 인정하였을 따름이다. 오늘은 이러한 석가의 깨달음을 논의함으로써 불교는 종교인가? 혹은 석가는 종교인인가에 대한 질문들을 풀어가 보자.

그렇다면 석가는 무엇을 깨달았으며 왜 깨달으려고 하였을까?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과 더러움이 없는 안온의 열반을 얻기 위해서 였다. - 중아함경 권제 56 <라마경>


2.
석가는 어떻게 깨달은 것인가

석가의 깨달음의 특징

①첫째, 석가는 어느 정도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노병사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 영원한 행복, 절대적 기쁨을 추구한다.

 

②둘째, 석가는 죽은 다음의 열반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 속에서 영원한 행복을 찾는다. 그가 선정주의와 고행주의를 포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③셋째, 우리는 흔히 중도, 중용, 중관 등을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상태로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중용은-필요할 때면- 반드시 극단으로 나가고, 그 일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석가에게 있어서 중도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극단적인 쾌락과 극단적인 금욕을 직접 실천해 보았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중용이며 중도인 것이다

석가의 이런 중도사상은 초기 경전에 설해진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에 정착되고 ,이 연기설은 무아론과 무기론에 잘 나타나 있다.

①십이연기설 : 모든 중생이 업력에 의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 끊임없이 생사윤회하는 양상을 12단계로 나누어 관찰한 것이 십이연기설이다. 석가는 우리 인간에게 괴로움을 일으키는 갖가지 조건을 12갈래로 이루어진 인과의 연쇄로 분석하였다. 이는 석가의 깨달음의 본질이다.

-연기(緣起)?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고,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기에 저것도 멸하는 것이다'라는 석가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진리.

 십이연기설의 가장 핵심적인 뜻 : 인간의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 한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불교학 개론 中에서]

 

②무아론이란 문자 그대로 영원한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가아를 진아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로써의 나, 자아가 필요하다. 하지만 자아는 영원하고 단일한 실재가 아니라 다만 그 같은 경험을 통해 확인되는 가설적 존재일 뿐이다. 후기 불교인 설일체유뷰에서는 이에 대해 인간의 삶은 과거에서 현제, 현제에서 미래의 생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그것은 영속적이고도 단일한 자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번뇌와 업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즉 우리에게는 몸과 다른 본질적 자아가 존재하며 이것을 무아라고 한다. 이러한 무아는 형태가 없는 생명에너지로서 영원히 소멸되지 않으며 이것을 공이라고 한다. 인간의 육체는 죽어서 없어지지만 무아는 윤회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생에서 욕심과 탐욕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 무아론이다

 

③무기론이란 비현실적인 형이상학의 문제에는 정확한 답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초월적이고 영속적인 실재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은 다만 현실의 초라함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인간의 지적 호기심에 불과할 뿐, 우리는 경험을 초월하는 그 무엇도 알 수 없으며,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3.석가는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이 질문에 학자들은 대개 사성제설로 답변을 시도한다. 사성제란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이다.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란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말한다. 사성제는 일체가 고통이라는 고성제, 고통의 원인을 밝혀주는 집성제, 고통을 없애줄 수 있다는 멸성제, 고통을 없애주는 길을 제시한 도성제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 고성제는 치료 대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고

둘째, - 집성제는 그런 현상에 대한 원인 규명

셋째, - 멸성제는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는 선언

넷째, - 도성제는 구체적으로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

 

불교는 이렇듯 원인을 분석하여 제거하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이야기 한다.

필자는 이를 예로 들어 불교가 다른 종교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해 볼 때 ‘가장 논리적인 종교’ 혹은 ‘이론과 실천을 가장 잘 조화시킨 종교’ 라고 말하고 있다.

 

석가의 깨달음- 육하원칙으로 정리

 

①첫째, 누가 깨달음을 얻었는가? 물론 석가라는 자연인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석가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었으며, 불교 교리에 의하면 석가 이전에도 수많은 깨달은 불타들이 존재했으며, 우리도 동일하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불교의 보편성이 있다.

 

②둘째, 석가는 언제 깨달음을 얻었는가? 그는 사선정(四禪定)을 체험한 다음에 깨달음을 얻었다.

-여기서 사선정이란 욕계를 떠나 색계에서 도를 닦는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의 네 단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네이버 벡과사전) 불교에서 해탈을 이루는 마지막 과정을 보면 깨우침 선정의 상태에 따라 사선근의 단계의 다음으로 사선정과 멸진정이라는 단계가 있다. 성자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사선정의 단계를 반듯이 거쳐야 하며 여기에 일체의 번뇌를 떨쳐 버려야하는 멸진정이라는 마지막 단계를 지나야만 한다.

사선정 단계는 정도와 외도가 함께 공존하기 때문에 이 두 과정을 함께 닦아나가야 하지만 멸진정의 단계는 오직 정도만을 닦아가는 하늘 자리로 이 단계를 꼭 닦아야 만이 성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③셋째, 석가는 어디서 깨달음을 얻었는가? 앗사타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그 나무는 보리수로 불리운다. 보리(菩提)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보디(Bodhi)를 음역한 말로 깨달음이란 의미이다. 석가는 인도인들이 임서기에 들어 숲에서 수도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숲에 들어가 수행하여 깨달았다. 인도인들에게 숲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산()과 같은 의미로, 일반적으로 속세를 떠난 곳을 뜻한다.

 

④넷째, 석가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괴로움과, 괴로움의 일어남과,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거룩한 진리인 사성제를 깨달았다. 인간의 인생은 기본적으로 괴롭다. 인간의 경험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즐거운 경험과 괴로운 경험,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경험이 그것이다. 괴로운 경험은 그 자체로 괴로우며, 즐거운 경험은 그것이 상실될 때 괴롭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경험에도 무상의 괴로움이있다. 인간 삶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따라서 무상하다

따라서 인간은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이해해야만 괴로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괴로움의 원인도 또한 알아야 한다. 더욱이 괴로움의 소멸을 얻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진정한 소멸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도 따라야 한다. 결국, 괴로움의 소멸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행하는 실제적인 방법에 대한 앎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사성제에 대한 앎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석가를 깨달은 이라고 하는 것이다.

 

⑤다섯째, 석가는 어떻게 깨달음을 얻었는가? 당시 인도의 진리를 깨닫기 위한 일반적인 수행 방법에 따라 숲에 들어가 고행을 시작하였다. 마음을 제어하고, 죽음에 직면할 정도로 감식과 단식하였으며 호흡을 멈추는 등 감각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의 육체를 벗어나 순수 영혼으로 실재를 사유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는 진정한 해탈을 얻을 수 없었다. 육체를 완전히 버리는 것은 육체를 완전히 추구하는 쾌락에 반하는 또 다른 극단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고행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이를 포기한다. 그리고 음식을 공양 받아 기력을 차리고 다시 명상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었다. 석가는 수행을 시작한지 6년만에 이러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초기 불교 이후의 평가에서는 이미 그 이전의 전생에서 지극한 도를 닦았기 때문에 6년이란 짧은 시간 안에 이러한 깨달음이 가능 했다고 한다.

   

⑥여섯째, 왜 석가는 깨달음을 중생에게 설하게 되었는가? 자비심, 대자비에서 발로한 것이다. 그는 혼자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자족심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을 수 없었으며, 결국 오랜 심적 투쟁 끝에 그는 그의 교리를 전파하기로 결심 했다. 물론 처음에는 큰 기대를 걸지도 않았으며, 나중에는 수많은 군중이 그를 따라 왔을 때 그는 진리의 교리가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가르쳤다. “어두운 세상에서 나는 끝없이 북을 치리라!

 

4. 깨달음은 어떻게 오는 가

석가의 깨달음은 물론 석가 개인의 깨달음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석가 이외에 모든 사람도 성취할 수 있는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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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교는 무신론인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모든 종교를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절대적인 인격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무신교로 분류하고, 불교를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에 대한 믿음이 종교의 필요충분조건 이라는 것은 기독교의 종교적 특성일 뿐, 이를 다른 모든 종교에 대입 할 수 없다. 불교를 포한한 인도 사유에 있어서 믿음이란 수행을 통한 존제본성의 통찰에 대한 결과로써, 종교의 최고의 가치이자 목표인 구원을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통찰에 의해 구한다.

신의 존재는 경험으로 입증하거나 반증 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신의 존재나 비존재는 진위의 문제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불교는 석가나 불타를 믿는 유신론으로 볼 수도 있고, 철학적 탐구의 영역으로 무신론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유신론도 무신론도 아닌 신의 존재나 비 존재에 대해서 논의 할 필요가 없는 비신론 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불교의 근원인 석가가 깨달음 자체가 그 당시 종교인 베다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으며  궁극적 실재와 자재신을 부정하였다. 오직 인간의 경험과 일치하는 것만을 진리로 인정하였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 당시 인도인들이 절대적 실재인 브라흐만을 인격신 이슈바라로 모시고, 진리를 깨달은 성자들을 신격화 하여 모신 바가바드기타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은 그만 신의 영역으로 넘기고 깨달은 이들을 신격화한다. 그리고 그 신들을 찬양하고 제사를 올림으로써 그들이 깨달음을 내려주길 바랬다. 석가의 가르침 또한 결국 석가 입멸 후, 초기 불교의 이성에 입각한 경험적 지혜는 석가라는 인간의 신격화로 변하는 양상을 띈다. 하지만 이는 석가가 전한 진리와 다른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불교는 비신론이라고 믿는다.

불교는, 특히 원시 불교는 전형적인 비신론의 종교라고 저자는 믿는다. “신은 존재하는가?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이런 문제들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욕망의 화택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뜻에서 불교는 무신론도 유신론도 아닌 비신론이다”   

하지만 석가가 진정으로 이루려고 하였던 것은 자신이 신으로 모셔지는 것도 아니고, 신으로 모셔지지 않는 것도 아니고, 신이든 신이 아니건 중요하지 않다고 논하는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신에 의해서도, 혹은 신에 의하지 않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성과 경험으로 사유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석가의 가르침이다

 

 

 

참고서적

종교철학 11강좌. 황필호 지음. 철학과 현실사. 2006

인도철학과 불교. 권오민 지음. 민족사. 2004

 

 

 

:

  

 아비달마 불교에서의 인간과 세계의 이해

 

  

     

 

 

목차

 

1장 우주

1. 누가 우주를 창조하였는가

2. 우주의 형성과 파괴

3. 우리가 사는 곳

 

2장 인간

1. 삼계(三界). 오취(五趣). 사생(四生)

2. ()의 이론

3. ()과 윤회(輪廻)

4. 번뇌(煩惱)의 세계(世界)

5. 12연기(緣起)

6. 무상과 무아

7. 열반

 

3장 아비달마의 법()의 세계

1. 마음의 작용-심소법(心所法)

2.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는 힘 - 心不相應行(심불상응행)

3. 제법의 삼세실유(三世實有)

 

 

 

 

1장 우주

 

 

1. 누가 우주를 창조하였는가

 

 구사론에 따르면, 세계는 '사트바 카르만(sattva-karman)'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사트바'란 보통 유정(有情), 중생(衆生)으로 번역되는 말로서, 이 세상에 생명을 지니고 존재하는 것, 모든 살아있는 것을 의미한다. '카르만'은 보통 '()'으로 번역되지만, 행위, 동작의 의미이다. 따라서 '사트바 카르만'은 생명있는 것의 행위, 생명체의 생활. 활동이라는 뜻이다.

 서양 기독교의 세계관은 자연이 만들어 지고 그 공간을 생물과 인간이 차례로 채우지만 불교에서는 반대로 생명을 가진 것의 행위, 동작에 의해 자연계가 생겨난다고 한다. 즉 자연계의 성립에 이전에 생명을 가진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살아 행위함, 이것이 전체로서 하나의 우주를 창출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생각했다. 우주를 생성하는 에너지와 하나의 개체, 한 인간이 살아 행위하고 동작하는 힘은 근원적으로 동일하다.

 

2. 우주의 형성과 파괴

 

 우주의 형성은 구사론의 기술에 따르면 우선 아무런 존재도 없는 광대하고 텅빈 공간에 사트바 카르만의 힘이 활동함으로써 '미풍(微風)'이 불면서 원반 모습의 견고한 '대기의 층'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대기층 위에 '물의 층'이 형성된다. 물의 층은 다시 사트바 카르만에 의해 부는 바람으로 말미암아 "끊인 우유의 표면에 막이 생기는 것 같이" 점차 응고되어, 상층의 7분의 2 '황금의 층'이 된다. 나머지 7분의 5는 물의 층으로 남아있다. 결국 무한하다고 하여도 상관이 없는 광대한 원반에 펼쳐져 있는 대기층의 중심부에, 이에 비해서는 훨씬 작으나 동일한 원반 모습의 물과 황금의 층이 중첩되어 놓여 있다. 이 황금의 층의 표면이 대지이다. 그리고 대지 위에는 다시 산. 강 등이 형성되며, 이리하여 여기에 자연계가 완성되는 것이다.

 자연계가 완성되면 여기에 생물 즉 유정(sattva)이 발생한다. 이 발생에도 정해진 순서가 있어, 우선 천상의 세계부터 시작된다. 즉 처음부터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하늘의 신들이다. 다음으로는 지표 세계에 인간. 동물 등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지하 세계 즉 지옥에도 지옥의 사트바가 태어남으로써 세계 형성의 과정은 완료된다.

 세계 형성의 과정에 계속하여 다음의 20안타라칼파 동안에는 형성된 세계가 지속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끝나면 세계 파멸의 과정이 따른다. 이것도 20안타라칼파 동안 계속되며, 세계 형성의 과정과 전혀 역의 순으로 이루어지며, 그런 다음에는 단지 광대하고 텅 빈 공간만이 남는다. 이로부터 20안타라칼파 동안은 텅빈 공간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무의 기간이다. 이 기간이 지나가면 다시 사트바 카르만이 미풍을 일으켜, 다음의 세계 생성의 기간이 시작된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세계의 형성. 지속. 파멸. 공무의 네 과정이 계속 순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대자연의 생멸의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하여 무한의 과거로부터 무한의 미래에까지 영원히 계속된다.

 

 

3. 우리가 사는 곳

 지상의 세계에서 우리가 사는 곳은 수메루산의 남쪽, 일곱 외륜산 바깥의 큰 바다 가운데에 삼각형으로 돌출되어 있는 잠부주이다. 잠부주 북부에는 아홉의 검은 산이 가로놓여 있다. 이를 지나 더욱 북쪽으로 나아가면 '눈의 산(히말라야)'이 있으며, 눈의 산 저쪽에는 '향기로 가득찬 산'이 있다. 눈의 산과 향기로 가득찬 산 사이에는 '염열(炎熱)의 괴로움이 없는 연못'이 있고, 여기에는 강가(갠지스강), 신두(인더스강), 쉬타, 바크슈의 4대하가 흘러 잠부대륙을 윤택하게 하고 있다. 뭇 사람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이 연못에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한다. 위에 기술한 잠부주는 결국 고대 인도인의 눈에 비친 인도의 국토이다.

 이와 같이 대기. . 황금의 세 층의 기반 위에 서있는 수메루산을 중심으로 하여, 이를 둘러싼 네 개의 대륙, 해와 달, 천계. 지옥 등 모든 것이 포함된 자연계의 한 단위가 성립된다.

 

 

 

2장 인간

 

1. 삼계(三界). 오취(五趣). 사생(四生)

 

 불교는 이 공간 안에서 태어나고 죽어가는 생명체, 즉 인간의 삶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아비달마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유정)의 외면적 존재방식은 '삼계(三界)', '오취(五趣)', '사생(四生)'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삼계(三界)'라는 말은 옛 부터 일상적인 말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셋을 말한다. 욕계는 본능적 욕망이 성하고 강하게 작용하는 세계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색계(色界)란 물질, 육체의 세계 즉 육체를 갖고 생존하는 세계의 의미가 되며, 무색계는 육체가 없는, 순수한 정신적 생존의 세계가 될 것이다. 지하의 세계. 지표의 세계. 공중의 세계(천계) 중의 하층은 욕계에, 천계에 상층은 색계에 속하며, 무색계는 그 위 천계의 최상층에 있다고 한다. 1) '지옥(地獄)' 2) '아귀(餓鬼)', 3)'축생(畜生)', 4)'인간(人間)'. 천계에는 5)'()'(천인, 천녀. 즉 하늘의 신들)의 생활이 있다. 이를 '오취(五趣)'라고 한다. 이 다섯에 '아수라(阿修羅)'를 더하여 육취(六趣) 라 한다. 온갖 고통을 겪는 지옥은 물론이고, 기갈의 고통을 받는 아귀이건, 약육강식의 축생(동물계)이건, 모두 인간의 생활에 비해 열등하며 고뇌가 많으며 바람직스럽지 못한 경우이다.(지옥. 아귀. 축생을 三惡趣, 三惡道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천계는 인간세계보다 훨씬 훌륭하고 행복하며 바람직스러운 경지이다.

 그러나 천계는 서양 기독교의 천국이나 이상화 된 파라다이스와 같은 영원한 행복의 세계는 아니다. 다른 사취에 비하면 그 격이 높기는 하지만, 轉變과 쇠망을 피할 수 없는 세계이다. 따라서 이 천계의 생존도 인간 및 지옥에서의 생존과 마찬가지로 윤회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유정은 오취의 어느 하나에 속하여 살아가며 죽으면 또한 오취의 어느 하나로 태어난다. 예를 들어 인간의 한 생애를 마치고 하늘의 신으로 태어나는 유정도 있을 것이며,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도 있을 것이다. 이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지옥에서 고통을 겪는 자도 천계의 신도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2. ()의 이론

 

 이러한 윤회는 그 유정의 행위 업 (Karman,)에 따른 것이다. 과거의 선한 행위의 결과는 현재 즐겁고 바람직스러운 생애를 초래하고, 과거의 악한 행위의 결과는 현재 괴롭고 바람직스럽지 못한 생애를 초래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이다.

 업의 이론에 의하면 과거의 행위가 현재의 자기의 존재방식을 결정한다고 하지만, 이는 자기의 존재방식이 이미 과거에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주어져 있어 현재로서는 이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이유는 과거의 업이 현재의 상황을 결정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업은 미래의 상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지금의 삶이 전생의 업으로 비루할지라도 이번 생을 열심히 잘 살면 다음 생은 달라질 수 있다.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탄식하는 사람에게 업론은 운명론이 되지만, 현재에 서서 미래를 바라보는 자에게 그것은 반대로 자신을 고무하여 밝은 미래를 개척하게끔 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업이 유정의 존재방식 모두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인과관계가 무수히 작용하여 순간순간의 인간의 생존을 구성하며, 업과 그 결과라는 관계는 무수하고 다양한 인과관계 중에서 다만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3. ()과 윤회(輪廻)

 

 불교는 무아(無我)를 설한다. '()'라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악한 행위를 하여 그 결과 지옥. 아귀. 축생과 같은 좋지 못한 경계에 태어나는 것도, 선한 행위를 하여 그 결과 보다 좋은 경계에 태어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다. 불교가 본래 지향하는 바는 윤회를 초월한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윤회는 도덕적 선악의 세계이다. 평상의 인간(범부)은 선악의 세계에 산다. 이러한 인간의 선악적 존재를 지탱하는 지주는 아비달마논사에 의하면 업의 인과의 원칙이다. 아비달마에서는 누구도 다른 사람에 대해 그 선악을 판단할 수 없고, 전자의 신과 같은 자가 어디엔가 있어 사람의 선악을 심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생애에 과보가 나타나지 않고, 다음 생애(來世) 또는 그 다음 생애에서야 나타난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행위는 필연적으로 과보를 받는다. 이것은 절대의 원칙이다.

 업의 결과의 필연성과 자업자득, 이 두 원칙이 있음으로써 선악의 기본이 성립된다. 업의 이론은 평상적 인간의 삶의 세계의 도덕적 질서 수립을 말하는 것이다. 아비달마의 입장은 업과 윤회의 세계를 궁극적으로 그러해야 할 모습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며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평상적 인간의 삶의 현실과 선악의 원리가 그 삶을 관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도덕적 요구를 승인한다.

 불교에 의하는 한 우리의 세계는 업에 의해 유전 상속한다.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탄생으로 이어진다. 업을 이야기 하는 한 윤회는 필연적인 것이다.

 

4. 번뇌(煩惱)의 세계(世界)

 

 업이 윤회의 삶을 결과할 때에는 필히 번뇌를 수반한다고 한다. . 윤회의 세계는 또한 번뇌의 세계이며 이 세계의 일체는 유루라고 한다.

 '유루(有漏)'는 원어인 산스크리트어로는 사스라바(s srava)이다. '아스라바( srava)를 지닌 것'이란 뜻이다. 아스라바가 번뇌의 의미라면, 사르라바 즉 유루는 '번뇌를 지닌 자'라는 의미가 된다. 번뇌를 지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설일체유부적으로 이를 표현하면, 범부의 세계에 있어 모든 존재는 "번뇌의 대상이거나, 번뇌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영역에 속한다. 깨달음이 영역에 속하는 것은 모두 '무루(無漏)'이다.

 모든 존재는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두 이러한 의미에서 유루이다. 즉 번뇌를 지닌 것이다. 업은 윤회함으로 번뇌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이러한 평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벗어나, 즉 업과 번뇌에 지배되는 미혹의 세계에서 초월하여 궁극적 진실인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은 지혜로써 마음을 번뇌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무루의 길이다. 이 실천도를 나아가는 자는 '성자'로 불린다. 불교에서 말하는 성자는 번뇌를 끊은 자인 것이다. 이렇듯 모든 번뇌를 끊고 일체의 진리와 만난 자를 ‘아라한’이라고 한다.

 

 

5. 12연기(緣起)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이고, 법을 보는 자 연기를 보는 자이다”

 불타는 괴로움을 일으키는 갖가지 조간들을 12 갈래로 이루어진 인과의 연쇄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를 12연기(緣起) 라고 한다. ‘연기란 ~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 난다’ 는 뜻으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 난다는 말로 정형화 될 수 있다. 즉 지금 현제는 내가 과거에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따라 형성된 것이며,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따라 지금 이후의 미래가 달라진 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속적이고도 단일한 자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번뇌와 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연기에 대한 여러 설중에서 과거 현제 미래의 생에 걸쳐 5온이 상속하는 것이라는 분위(分位) 연기설이 전통적 정설로 인정되어 지는데, 이는 부파불교의 가장 유력하였던 부파인 설일체유부의 학설로서 이에 따라 12연기를 삼세(三世) 양중(兩重)의 인과설로 해석하게 되었다. ‘무명’과 ‘행’은 과거 생에서 지은 현제 생의 원인이고, ‘식’에서 ‘수’에 이르는 5지는 그 결과이며 (이상 과거현제의 인과), ‘애’와 ‘취’와 ‘유’는 현제 생에서 짓는 미래생의 원인이고, ‘생’과 ‘노사’는 그 결과이다(이상 현제미래의 인과).   

 

6. 무상과 무아(無我)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변화의 영역이다. 영원한 것은 다만 사유와 언어의 세계일 뿐 현실이 아니다. 불교에서의 언어는 마치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는 수단이듯이 다만 사물을 지시하는 도구일 뿐이지만, 현실의 세계는 언제나 추상의 언어에 은폐되어 나타난다.

 자아란 경험의 조건인 5온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5온의 상속을 일시 가설한 것일 뿐이다.

 

첫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행위하는 것인가?

2 5천 가지 부품의 결합체를 일시 차() 라고 이름할 뿐 그것과는 별도의 차가 존재하지 않듯이, 5온의 총아를 일시 자아라고 이름할 뿐 그것의 토대가 되는 별도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영속적이고도 단일 보편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경험(혹은 세계)은 어떻게 지속 가능한 것인가?

고정불변의 자아가 존재하여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번뇌와 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셋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데 도덕적인 책임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그에 집착함으로써 온갖 번뇌와 업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끊임없이 유전하게 된다. 초기불교의 윤리는 무아에 기초한 ‘버림’의 윤리이다. 세계의 모든 악은 탐욕과 증오로부터 비롯되며, 그것은 바로 자아에 대한 그릇된 믿음인 무지로부터 야기된다. 자아를 버리지 않는 한 괴로움의 속박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7. 열반

 

열반이란 경험세계 자체(5)의 소멸이 아니라 그것을 괴로움의 세계로 드러나게 하는 조건들, 이를테면 무지와 그에 따른 아집과 집착, 그리고 탐욕과 증오 등의 소멸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것은 5온 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끔 하는 조건이 된다. 그럴 때 열반은 사후가 아닌 살아있는 동안 ‘지금 여기서’ 획득하는 것이며, 현실의 삶을 자유롭고 풍요로운 충만함으로 이끄는 힘이 된다.

 그렇다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8정도를 통해 중도를 실현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이야기한다. 중도란 극단적인 고행이나 지나친 쾌락을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존재 본성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이것이 정견(正見)이다. 정견은 바로 무상과 무아에 대한 통찰이다. 경전에서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 의 4성제를 바로 관찰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으며 이 중에서도 괴로움의 진리에 대한 통찰이 강조된다. 괴로움을 알지 못하면 그것의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방식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계戒 정定 혜慧 를 3학學 이라고 하여, 해탈의 세 축으로 삼고 있다. 8정도 중에서 정견과 정 사유는 혜학에 포함되고, 정어정업정명은 계학에, 정념과 정정은 정학에, 그리고 정정진은 3학 모두에 포함된다. 3학은 모든 괴로움과 속박에서 벗어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불타는 이것이야 말로 바로 인류의 무거운 짐을 벗어 놓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3장 아비달마의 법()의 세계

 

1. 마음의 작용-심소법(心所法)

 

 아비다르마라는 말은 “법에 대하여”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설일체유부(일체의 법이 실재한다고 주장)에서는 “법에 대한 연구”라는 의미로 해석하며, 팔리상좌부에서는 “훌륭한 법”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불타가 설한 “법”에 대한 연구이다. 다르마란 불타가 설한 교법을 말한다. 불타의 교법은 현실의 인간 존재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인간 존재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현상’으로 존재하고 있고, 동시에 ‘요소적 실재’이기도 하다. 현상으로서의 현실은 육체와 정신, 외계 등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또 다시 세세한 요소로 분석된다.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무상하다. 따라서 법은 실재이긴 하지만 ‘영원한 실재’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에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적인 법을, 상주하는 법 (무위법-조작됨이 없는 법, 더 이상 소멸하지 않는 존재) 과 무상한 법 (유위법-다양한 인과적 관계로써 조작되어 생성 소멸하는 경험세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이 부파불교 시대이다. 무위법은 열반으로 대표된다. 열반은 시간을 초월한 실재이며, 불타는 깨달음을 통해 이 열반과 합일하였다. 유부에서는 열반을 깨달음의 지혜의 힘에 의해 번뇌가 끊어지고 번뇌가 영구히 불생하게 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유위법은 무상하다. 이 무상함에 대해 상좌부나 유부는 유위법은 자상을 갖지만 1찰나만 현세에 존재한다고 해석하였다. 유위법은 실재이지만, 찰나 멸한다는 점에서 법은 파악될 수 없다.

 

 유루법은 번뇌에 더럽혀진 법을 말한다. 무루법은 번뇌에 더럽혀져 있지 않은 법이다. 불타나 아라한의 깨달음의 지혜는 번뇌를 모두 끊고 있기에 무루이다. 아함경에는 많은 종류의 번뇌가 밝혀져 있다. 이것은 번뇌를 끊는 것이 불교의 주목적이기 때문이다. 아비다르마 시대에는 이 아함경의 심소법(心所法-마음에 소유된 법) 을 이어 받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발전시킨다. 번뇌를 끊기 위해 번뇌와 다른 심리 작용이 어떻게 협동하는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부는 심소법을 독립의 실체로 보았다. 탐욕과 분노는 작용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양자가 다른 기능을 갖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유부가 46종의 심소를 독립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마음은 갖가지 심리작용을 그 속에 포함하는 하나의 종합된 통일체로 보았다. 하지만 심소를 각각 독립적인 것으로 보면, 마음의 일체성과 통일성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유부는 ‘심심소(心心所)의 구생(俱生)’ 을 설한다. 즉 심심소의 구생에 의해 심 작용의 통일적 활동을 설명하며 이러한 의미의 심심소의 협동을 ‘상응(相應)’이라고 한다

 팔리불교에서도 심심소의 상응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만 유부와 그 내용이 조금 다르다. 팔리불교에서는 22심소 중 1법도 빠지는 것이 없다. 1법이 부족하면 다른 21심소도 모두 부족한 것이 된다. 전부가 갖추어 지지 않으면 생길 수 없다. 1법은 나머지 21심소의 존재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심심소의 관계를 ‘상응인(相應因)’ 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사리불아비담론의 심소법은 33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팔리불교나 유부와는 다르다. 또한 성실론의 심소법은 39법 혹은 49법이 된다. 하지만 성실론의 심소법은 別體(별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량부와 대중부계는 심소의 독립을 부정하였다고 한다. 이들 부파에서는 마음을 하나의 전체로 보는 견해가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受(받을 수)가 있을 때는 마음 전체가 受로 되어 있는 것이며, 想이 있을 때는 마음 전체가 想으로 된다고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즉 갖가지 다른 심리현상을 마음이라는 하나의 것의 다양한 나타남(마음의 차별)으로 해석한 것이다.

 유부는 무아설을 기계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심소법을 각각 별체라고 했다. 그리고 유부는 심심소를 찰나멸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마음이 유기적으로 통일성을 갖추고 활동하는 이유를 밝히기 어렵다. 따라서 심심소의 상응이라는 것을 설하여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마음의 관찰, 심리분석에 있어서 다른 학파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정교하고 치밀한 학설을 전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팔리상좌부의 학설은 더욱 상세하다.

 

2.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는 힘-心不相應行(심불상응행)

 

 심불상응행은 단지 불상응행이라고도 말해진다. 즉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行 을 말한다. 심소법은 심왕과 상응하는 법이며, 그것은 심심소의 구생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존재자이다. 불상응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생멸의 4() 이다. 유부에 있어서 이것이 찰나멸을 성립시키는 힘을 가리킨다. 세간은 제행무상이지만, 거기에는 제행을 무상하게끔 하는 힘이 있다. 이 힘은 찰나멸의 제법을 1찰나에 生 하게끔 하는 것이 없으면 안된다고 보고, 그러한 실제적인 힘을 갖는 것으로서 4相 을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無常力 을 실체화 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非色非心 의 심불상응행법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사리불아비담론 제 3권과 성실론 7, 정량부, 화지부, 대중부등 많은 부파에서 심불상응행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팔리상좌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생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미묘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3. 제법의 삼세실유(三世實有)

 

 설일체유부는 일체의 법이 실재한다고 주장하였던 부파이다. 이들은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를 기본 명제로 삼고 있다. 불타는 무상을 설하였는데 어째서 삼세(과거,현재, 미래)가 진실로 존재하고 법체가 항상 있다는 것인가

 삼세실유란 미래현재과거라는 시간 자체가 실재한다는 말이 아니라 삼세에 걸친 유위제법의 실유를 의미하며, 그것은 결국 법체항유와 다른 말이 아니다. 즉 제법 자체는 삼세에 걸쳐 실재하지만 그것이 처한 상태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라는 시간적 변화의 차별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정통유부의 학설로 승인된 세우의 ‘위부동설(位不同設)’이다. 어떤 법이 아직 작용하지 않은 상태를 미래라 하고, 지금 작용하고 있는 상태를 현제라 하며, 이미 작용을 마친 상태를 과거라 하지만, 법 자체로써는 동일하다. 삼세라는 시간의 흐름은 제법의 변이에 의해서 가능하며, 따라서 지금 작용하고 있는 현제는 오로지 제법의 생성과 소멸의 순간일 따름이다. 이러한 제법분별에 의해서 초월적, 초경험적인 자아를 끌어오지 않아도 세계는 설명 가능하다.

 

 하지만 대승불교는 이러한 설일체유뷰의 설명을 ‘현상의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는 불교의 기본 명제와 모순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설일체유부의 ‘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에 반발하여 ‘무’와 ‘공’을 주장 한다. 즉 일체의 법은 공()이고, 그것은 무자성이다. 자아는 물론이거니와 법 또한 공한 것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혹 택멸의 열반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갖지 않는다.

 

  

 

 

 

 

 

 

 

 

참고 

1. 아비달마의 철학 :上山春平,櫻部建『아비달마의 哲學』하지메 사쿠라베 /호영/ 민족사

2. 인도불교의 역사 :印度佛敎의 歷史 히라가와 아끼라 / 이호근/민족사

3. 인도철학과 불교 권오민 지음/ 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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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中觀) / 천태(天台)

 

 

 

   강 대 웅

 

 

중관 中觀 명사

[명사]<불교> 1 삼관하나. 중제(中諦)이치직관(直觀)하여 중도진리구명하는 이른다. 2 =중관론.

 

중관학파 中觀學派 명사

[명사]<불교> 인도 대승 불교 2학파하나. 파조(派祖)용수(龍樹)중관론근본으로 하여 () 교의(敎義)의 중심으로 한다. 중국 등지전하여져 삼론종바탕되었다. 중관파.

 

 

  용수는 제 2의 부처로 일컬어 지는 대승불교의 가장 위대한 논사로써, 대승사상은 모두 그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용수의 대표적인 저술인 <중론(中論)>을 중심으로 한 사상을 일반적으로 중관사상(中觀思想)이라 말한다. 용수는 <중론>을 저술하여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용수 이후 많은 이들에 의해 중론이 해석되었고 이 흐름을 따르는 이들을 중관파라 한다. 중론을 해설한 청목은 중론의 의의를 “불타의 진정한 의도를 알지 못한 채 불타가 설한 온갖 존재, 이를테면 12연기나 5, 12, 18계 등의 법을 진리로 여겨 문자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은 이들에게 공성(公性)을 이해시키기 위해 용수보살께서 <중론>을 저술하게 되었다” 라고 밝히고 있다.

  중론의 목표는 궁극적으로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분별인식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의 허구성을 폭로함으로써 일체의 집착과 망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존재 본성에 대한 통찰의 예지인 반야바라밀다였다.

  용수는 일체가 공 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공은 비존재인 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용수는 공의 이론적 근거를 연기, 즉 상호관계성에서 찾고 있다.

 

-무릇 존재하는 모든 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을 상이 아니라고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언어로서 분별하는 일체의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자성(無自性)이고 공()이다. 모든 존재는 신의 피조물도, 우연의 소산도 아닌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 즉 연기(緣起) 한 것이다(제법종연기-諸法從緣起). 이는 부자든 아름다움이든 밝음이든 일체의 모든 언어는 그에 상응하는 고정된 대상을 갖지 않으며,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나무로 된 탁자가 있다고 할 때 여기에 책을 올리고 공부를 하면 책상이지만 거기서 밥을 먹으면 식탁이고, 추운 겨울날 아궁이 앞에 있으면 그것은 땔감이다. 이것은 오직 어떤 상황과 관계하여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책상으로 불리기도 하고, 식탁이나 땔감으로 불리기도 한다. 곧 책상으로 일컬어지는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결여하고 있는데, 이를 무자성(無自性), 혹은  ()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밝음과 어둠을 각기 서로 대립하는 독립된 세계로 생각하며, 세상의 거의 모든 철학과 종교가 이 같은 이원의 구도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용수는 이러한 우리의 실체화된 언어적 고정관념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언어는 세계를 실체로서 고정시킨다. 하지만 언어란 드러나야 할 대상에 대해 그것과는 별도의 판단을 낳게 하는 화자의 관념체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며, 상황과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일시적인 것이며, 한정적인 것이다.

  이렇듯 세계는 언어에 은폐되어 있다. 하지만 용수는 세계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관한 이론, 즉 언어를 부정하였다. 언어가 바로 공이며, 따라서 언어의 배일만 벗기면 세계는 그대로가 진실(열반)이다. 하지만 언어가 허구임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공’에 관한 이론 역시 언어적 가설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언어를 넘어서는 진리는 과연 무엇인가?

승의제란 최상의 진리, 즉 궁극의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개념적 언설을 넘어선 이른바 무차별의 진리, 곧 공성(公性)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곧 용수는 불타의 교법을 모두 이 같은 승의제에 으르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였다. 말씀 자체가 진리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구분 짓는 일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그 자체로서 관조하는 것(순수직관) 이며, 그것은 다름아닌 공성(公性)이다.

 

  이러한 존재의 실상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생사 윤회하는 세간과 열반 사이에는 어떠한 구분도 없다. 세간과 열반은 다만 말이 다르고, 그에 대한 관념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공성으로서 동일하다. 그러나 우리 범부들은 바로 언어적 관념에 의해 그 같은 언어적 관념을 벗어난 무자성의 여래를 그 자신만의 고유한 본성을 지닌 유자성적인 존재로 규정지음으로써 여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세간과 열반, 현상과 본체는 서로 대립하는 두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언어적 관념의 차이일 뿐이므로 그 같은 분별만 제거되면 세계는 그대로 진실이다. 공은 바야흐로 불이(不二)의 중도이다.

  일체의 대립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공()으로, 불이의 중()으로 관()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이다.

 

  

천태종 天台宗 명사 [명사]<불교> 중국 수나라 , 저장 성(浙江省) 톈타이 산(天台山)에서 지의(?)세운 대승 불교한 파. 법화경과 용수보살의 중론(中論)근본 교의(敎義)로 하선정(禪定)지혜조화종지(宗旨)로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숙종 2(1097) 대각 대사국청사에서 처음으로 천태교를 개강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지관종(止觀宗)천태(天台).

 

  천태종의 개조인 지의가 이해한 불교의 진리는 공().().() 3제설로 설명되어 진다.원리는 하나이지만 설명하는 방식은 세 가지 라는 것이다.

  지의가 보기에 소승성문들은 세속의 현실을 버리고 열반만을 추구하였으며, 대승의 보살은 세속의 현실에 머물기는 하지만 성문과 정면으로 차별 대립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진정한 보살은 양자를 지양하면서 중()에 머문다. 이를 원융삼제라고 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일승을 설하는 <법화경>의 궁극적 취지라고 지의는 생각하였다.

  법화경은 불타의 영원성에 대해 묘사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입멸한 우리가 익히 아는 불타가 아닌, 그것은 모두 방편으로 일시 그렇게 행한 것일 뿐 실상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이미 깨달음의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른바 구원실성(久遠實成)이 불타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법화경은 소승과 대승, 성문승 독각승 보살승을 모두 포괄하여 일불승의 통일성을 주장한다.

“여래는 다만 중생을 위해 일불승을 설하는 것이니, 그 밖에 달리 이승이나 삼승은 없다” 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는 한 보살뿐만 아니라 성문 독각 등 모든 중생은 부처의 아들이며, 모두가 성불이 예정되어 있다. 이를 수기(授記)라고 한다.

  그렇다면 법화경의 위상은 무엇인가? 지의의 독창적 교판은 화법 4교라 할 수 있다.

첫째, 장교란 삼장교의 줄임말로서, 여기서는 대승불교 이전의 <아함>과 아비달마를 말한다.

둘째, 통교란 앞의 장교와, 대승과 모두 통하는 교법이란 뜻으로, 대승의 일반적인 가르침인 공사상을 말한다. 따라서 앞의 장교에서 다만 자아의 공만을 설하지만 여기서는 ‘아’도 ’법’도 모두가 공이다.

셋째, 별교란 대승 보살만의 특별한 가르침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가설로서 해명하며, 마침내 양자가 서로 일치한다는 중도를 지향한다.

넷째, 원교란 원만 융통하고 완전한 가르침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어떠한 차별 대립도 허용하지 않는 총체적 입장이므로 회삼귀일, 삼승을 일불승으로 귀일시키는 <법화경>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렇듯 지의는 불타 아래 수행하는 모든 이와 모든 믿음을 하나로 합하려고 하였다. 지의의 이러한 구분과 분별을 두지 않고 다 함께 어울러서 대 통합을 이루려는 사상은 그의 세계관에서도 드러난다.

  지의에 의하면 우리에게 나타난 차별적 세계는 이미 불이의 진여법성이기 때문에 각기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어느 순간 악마가 되기도 하고 천사가 되기도 한다. 극악의 화신이 되어 지옥의 삶을 영위할 수도, 극선의 부처가 되어 극락의 삶을 구현할 수도 있다. 인간은 가능성으로써 모든 세계를 다 품고 있다. 극악의 세계인 지옥에 불계가 있을 수 있으며, 극선의 세계인 불계에 지옥이 있을 수 있다. 깨달음을 지향하는 성자들의 세계에서 본다면 인간의 세계는 악이고 고통이지만, 악취의 세계에서 본다면 선이고 쾌락이다. 이는 상대론이라기보다, 상자(相資) 상즉론이다. 즉 서로가 서로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악이 없으면 선도 없다. 지의에 의하면 선과 악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써, 악의 지양이 선이며 선의 부정이 악이다. 선은 악에서 나온다.

이러한 논리가 진행되어 결국 불타의 마음 안에도 악이 있으며, 악마의 마음 안에도 선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부처 또한 극악의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악을 갖추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부처가 절대 지선 이라면 악을 배척할 뿐 구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우주간의 삼천대천세계는 한 찰나의 마음에 존재한다.'  이는 현실이 마음 먹기에 따라서 지옥도 될 수 있고 천국도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지의는 부처의 세계에서도 지옥을 통찰하였으며, 절망 속에서도 영원한 희망을 응시하였다. 지의가 생각한 이러한 통합된 세계관을 '일념삼천설' 이라 한다. 즉 삼천세계가 한 찰나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지의의 일념삼천설은 양 항을 아우르는 전체적 세계관을 확립하여 생멸 변화하는 차별적 현상세계가 바로 영원절대의 보편적 세계 내지 통일적 진리임을 천명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천태의 사상을 성구설이라 한다. 곧 일심에 일체의 삼라만상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법화경>은 궁극적으로 일승의 정법을 천명한다. 그것은 삼라만상 천차만별의 모든 존재를 포괄하는 우주의 통일적 진리로서, 이것이야 말로 세계의 참다운 모습니다. 온갖 차별의 현상세계는 일승묘법으로 통일된다. 이것이 이른바 '성구설'이었다. 이리하여 천태는 이상 속에서 현실을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현실에 희망이 있고 천상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 현실 속에서 이상을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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