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은 무엇인가

 

 

   강 대 웅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 속에서 주인공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은 무엇이고, 이를 얻기 위해 어떤 단계들을 거치는지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인도인들이 추구하였던 네 가지 가치와 삶의 네 단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소설속의 싯다르타는 인도인이며 이러한 인도인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와 삶의 단계를 통해 그의 삶과 그가 추구하였던 것을 정리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인이 삶에서 추구하는 네가지 가치

 인도인들은 그들의 삶의 가치를 아르타, 카마, 다르마, 목샤에서 구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들의 삶도 네 단계로 나누고 있다.

 ①아르타 - , 세속적 번영, 이익, 소유의 성취.

아르타는 가족을 부양하고 이끌어 가는데 필요한 일상생활의 모든 것과 종교적 의무를 다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다. 물질적 제화 없이 삶은 영위될 수 없으며, 공물 없이는 제사를 지낼 수 없다.

 ②카마 - 음악이나 연극 미술등 예술적 문화적 삶을 통해 드러나는 즐거움, 좁은 의미로는 사랑, 성적 욕망, 쾌락.

아르타의 가치는 결국 그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카마, 즉 즐거움에 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과 희생을 대가로 하는 카마의 추구는 옳지 못함으로, 이를 위해 카마에는 다르마가 전제 되어야 한다

 ③다르마 -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개인의 종교적 도덕적 의무.

인간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동시에 사회 복지에 기여함으로써 사회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게끔 하는 이념이 다르마이다.   

 ④목샤 - 해탈, 절대 자유의 경지

진정한 쾌락과 행복이 여기에 있으며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아르타와 카마는 육체의 쾌락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다르마는 이러한 개인의 육체적 쾌락이 타인의 고통이나 희생을 요구하지 않게 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그 이상의 것, 즉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죽지 않는 상태를 바란다. 이것이 목샤이다.

 

인도인의 삶의 네 단계

 인도인들은 삶을 네 단계로 구분함으로써 현실적 삶과 해탈에 대한 추구를 조화시키고 있다.

 ①학생기 - 부보의 슬하를 떠나 다르마를 공부하고 삶에 필요한 기술과 음악, 과학 등을 배우는 시기. 이 교육 제도를 통해 종교적, 철학적 기초를 습득하여 이후 삶의 기초가 되는 성품과 마음가짐을 훈련한다.

 ②가주기 - 집으로 돌아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경제 활동을 하는 시기. 인도인은 태어남과 동시에 세 가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베다를 공부함으로써 스승과 성자에게, 자식을 번창시킴으로써 조상과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고 공물을 바침으로써 신들에게 보답하는 것이 그 빚을 갚는 것인데, 이 가주기는 이러한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시기이다.  
③임서기 - 세속의 의무를 다한 이들이 해탈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소유를 버리고 수행하는 시기. 이 시기는 더 이상 욕망과 쾌락에 물들지 않아야 함으로 인간으로써의 욕망과 의무를 다한 자만이 숲으로 들어갈 수 있다. 절제와 금욕, 고행의 삶을 사는 이들을 침묵의 성자(무니)라 부른다.

 ④유행기 -세속의 욕망을 완전히 떠나는 시기. 세속에 대한 완전한 포기로 인해 살아 있지만 더 이상 살아있는 존재라 하지 않는다. 단지 생물학적인 죽음만이 남아 있음으로 죽어도 일반적인 장례는 치르지 않고, 삼마디라는 의례를 치른다.

 

      

1 <바라문의 아들>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이시기의 싯다르타는 부모님의 슬하에 있으면서 좋은 음식과 좋은 교육을 받으며 아버지 같은 훌륭한 바라문이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고행하고 사색하고, 침잠하는 것에 관심을 쏟았고, 우주의 최고 원리인 범()을 추구하였으며 아트만 속에 있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누구보다 존경할 만한 바라문인 아버지조차 근원적으로 행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으며 제사를 지내거나, 경전을 뒤적이거나, 바라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언제나 성스러운 샘물가에 목을 축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싯다르타는 자기 자신의 자아 속에 있는 근원적인 샘물을 찾아내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 삶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최초의 각성이 고뇌를 끊기 위한 싯다르타의 탐구 여행의 시작이다. 싯다르타는 자신을 둘러싼 평온한 환경을 떠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친구 고빈다와 함께 고난의 길인 사문의 길로 들어선다.  

 

1 <사문들과 함께 지내다>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사문들에게로 나아가 가르침을 받는 이 시기의 싯다르타를 인도의인 삶의 네 단계 중 ‘임서기’로 분류할 수 있다. 부모의 슬하를 벗어나 교육을 받는 학생기를 거쳐서,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가주기를 거친 후에, 그 의무를 다한 사람만이 임서기에 들어 수행을 하게 되는 것이 보통의 삶의 순서이지만 싯다르타는 이런 학생기와 가주기의 단계를 뛰어넘어서 바로 임서기에 들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싯다르타는 인생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극심한 고통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자아로부터 벗어나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닌 상태가 되기 위해 수련을 시작한다. 만약 일체의 자아가 극복되고 사멸된다면, 만약 마음속에 있는 모든 욕망과 모든 충동이 침묵한다면, 틀림없이 궁극적인 것, 그 위대한 비밀에 눈뜨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싯다르타는 사문들 가운데 최 연장자의 가르침을 받아 자기초탈 수련과 침잠 수련을 하였으며 이를 통해 자기 마음의 객관화를 이루고 자아를 벗어는 많은 길들을 배운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은 인생의 고통과 무의미함을 잠시 동안 마비시킬 수는 있지만,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사문들의 곁을 떠나 또 다른 가르침을 찾아 떠난다.  

 

1 <고타마>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사문의 곁을 떠나서 거룩한 세존인 부처를 만난 싯다르타는 번뇌와 번뇌의 유래, 그리고 그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에 대한 설법을 듣는다. 즉 인생은 번뇌이지만 부처의 길을 가는 자는 해탈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싯다르타의 친구 고빈다는 세존의 가르침에 귀의하지만, 싯다르타는 다시 길을 떠난다. 부처의 깨달음이 명백하며 진실인 것에는 의문이 없지만, 부처도 당신 스스로의 구도 행위로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것이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처는 진정 이 세상 모든 것의 생과 사의 법칙과 그 법칙의 단일성과 일체의 연관성을 드러내고 그로 인해 죽음으로부터의 해탈을 얻었지만, 그의 가르침 속에도 그가 그 진리를 깨달은 순간에 혼자 체험한 그 비밀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싯다르타는 가르침과 스승을 떠나 홀로 목표에 도달하든가 죽든가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1 <깨달음>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모든 가르침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난 싯다르타는 지금까지 자신의 수행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의 자아를 산산 조각내어 부수어 버리면서 정작 나 자신이 나한테서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나를 버려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면 스스로가 스스로의 스승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진리를 찾는 것은 나를 버리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이렇게 생각이 바뀌지 지금까지 무의미 해 보였던 이 세상이 다시금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싯다르타는 이제 다양성을 무시하고 통일을 추구하며 깊이 사색하는 것이 아닌, 다양성 자체에 진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따라서 더 이상 통일성과 단일성을 추구하려 숲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음으로 싯다르타는 마을로 향한다

 

2 <카말라>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이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진 그의 눈은 본질적인 것을 찾아 가시적 세계를 넘어선 피안의 세계를 목표로 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이 세상 안에서 고향을 찾고 단순 소박하게, 천진난만하게 세상을 바라보니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렇듯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세상을 바라고보며 새로운 세상을 배우기로 한 싯다르타는 마을로 들어서면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인 카말라에게 사랑의 기쁨을 배우기로 마음먹는다.

 

2 <어린애 같은 사람들 곁에서>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카말라의 마음과 시간을 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지만 사색하고, 기다리고, 단식할 줄 아는 싯다르타의 능력은 그런 일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상인인 카와스와미의 밑에 들어가 장사 일을 배우고, 그렇게 해서 생긴 이익으로 카말라에게 사랑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싯다르타는 가주기의 삶의 양태를 띄면서 사랑과 쾌락인 카마를 얻기 위해 아르타 (, 세속적 번영, 이익, 소유의 성취)를 추구한다. 하지만 그의 삶은 보통의 가주기의 사람들이 사회적 의무를 위해 일을 하고 가정을 꾸려서 자식을 낳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산다. 그는 다르마의 추구를 위해 일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을 위해, 자신의 배음을 위해 이 시기를 산다.    

 

2 <윤회>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싯다르타의 마을 생활로 인해서 그는 많은 세속적 성공과 재산을 얻게 되었고 카말라 곁에도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 속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았다. 그의 삶의 방향은 여전히 사색과 기다림, 그리고 단식의 기술에 의하여 정하여 지고 있었으며 어린아이 같은 속세의 사람들은 그에게 낮선 존재였다, 그리고 그 또한 그런 점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낮선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그는 차츰 세상의 덫에, 쾌락과 욕구, 태만과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려서 자신의 특기인 기다림과 사색, 단식을 할 수 없고 끊임없는 유희를 즐기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이러한 각성을 하게 된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과 안일한 삶, 끝없는 유희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고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2 <강가에서>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그의 마음은 권태와 번민, 그리고 죽음으로 가득 찼으며, 그를 유혹할 수 있는 것, 그를 기쁘게 하고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듯이 느껴졌다. 그는 죽음을 행해 나아가다가 홀연히 옴을 통해서 다시 각성하고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난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인생행로를 뒤돌아보며 이를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즉 자신이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졌던 것은 결국, 자비를 체험하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옴을 듣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올바로 잠을 자고 올바로 깨어날 수 있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그가 행한 수많은 오류와 돌아 돌아온 굴곡진 길은 결국 자기 자신의 아트만을 발견하기 위한 제대로 난 바른 길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가 속세의 부와 쾌락이 좋은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것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이제야 그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활로 인한 구토증과, 삶의 무의미함과, 절망에서 벗어나서, 이전의 탐욕자 싯다르타는 죽고 새로운 싯다르타가 잠에서 깨어남을 느꼈다.    

 

2 <뱃사공>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죽어있는 것과 같은 생활 속에서는 들려오지 않았던 내면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그 내면의 마음의 소리는 싯다르타에게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나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로운 이 강물 옆에 머물면서 이러한 진리를 배우라고 말한다. 이러한 진리는 곧 자신의 전생도 과거가 아니며, 죽음이나 범천에로의 회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니며,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것, 즉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인간이 시간이라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힘겨운 일과 적대감이 제거되고 극복되는 것이다

그는 뱃사공인 바주데바 곁에 머물면서 강으로부터 경청하는 법, 고요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영혼으로, 활짝 열린 영혼으로, 격정도 소원도 판단도 없이 귀기울여 듣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마을에 머물렀을 때 자신에게 사랑을 알려주었던 카말라를 다시 만나게 되고, 그녀의 죽음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싯다르타는 이러한 깨달음을 머리가 아니라 두 눈으로,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죽어가는 그녀의 얼굴에서 싯다르타는 그녀의 젊은 날의 모습과 늙은 모습, 그리고 자신의 늙은 모습과 젊었던 때의 모습을 동시에 보면서, 현제와 동시성이라는 감정이, 영원성이라는 감정이 그의 마음을 파고 들어와 온통 가득 채웠으며, 그는 그 순간 모든 생명의 불멸성과 모든 순간의 영원성을 깊이 느꼈다.     

 

2 <아들>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카말라는 싯다르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왔다. 하지만 그 아들은 싯다르타에게 근심과 걱정으로 다가왔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아들이 쾌락과 권세의 늪에 빠지지는 않을까, 자기가 저질렀던 모든 과오들을 되풀이 하지는 않을까, 윤회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아들에게는 아들의 길이 있으며 그것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아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맹목적이요, 일종의 번뇌요, 또한 이 사랑이 윤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과 그로부터 오는 쾌락을 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고통을 맛보고, 이런 어리석은 짓도 해보고 싶었다그는 가주기의 사람들처럼 자식을 위해 일하고 자식을 먹이고 돌보기 위해 노력 하지만 아들은 결국 싯다르타에게서 도망쳐서 마을로 돌아간다.

 

2 <>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아들에 대한 사랑을 경험하고, 또 그 사랑을 떠나보내면서 싯다르타는 보다 인간적으로 변해있었다. 예전보다 덜 총명하고 덜 오만스러워진 대신에, 더 따듯하고 더 호기심이 많고 더 많은 관심을 가진 눈길로 사람들을 보았다. 그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사람들의 충동들, 어린애 같은 유치한 짓들, 단순하고 어리석은 부분들이 억센 생명력을 가지며, 이런 것들 대문에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사랑할 수 있으며, 그들의 모든 욕정과 행위들 하나하나에서 생명, 그 생동하는 것, 그 불멸의 것, ()을 보았다. 지식인이자 사색가인 자기가 그들보다 앞선 것은, 모든 생명의 단일성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서 조화, 세계의 영원한 완전성에 대한 깨달음, 미소, 단일성이 그의 내면에서 서서히 꽃피워 났다.

그는 강의 서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모든 소리를 듣고, 전체, 단일성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개의 말로 이루어 졌으며, 그것은 완성이라는 의미의 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순간 싯다르타는 운명과 싸우는 일을 그만두었으며, 고민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그 단일성의 일부를 이루면서 그 생명의 흐름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동료이자 스승인 뱃사공 바리데주는 그에게 이러한 깨달음이 왔음을 축하하고, 숲으로 들어간다. 바리데주는 이미 인간 존재를 뛰어 넘어서 영원한 존재로 자체였으며, 이제 싯다르타가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하자 자신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는 듯이 숲으로 떠나는 그의 모습은 인도인의 삶의 단계에서 마지막인 유행기의 모습이었다.

 

2 <고빈다>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어린 시절 함께 사문에게로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으나, 부처에게 귀의하면서 갈라져서 각자의 길에서 구도를 해온 오랜 친구 고빈다가 싯다르타를 찾아온다. 고빈다는 부처의 말씀에 따라서 도를 깨우치려고 아였으나, 싯다르타는 스스로 그 진리를 찾았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고빈다가 싯다르타에게 가르침을 얻고자 하자, 싯다르타는 자기가 찾으려고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서 결국 자기의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 들일수가 없으며, 다라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것은 열려있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아무 목표도 가지지 않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진리는 완전성과 단일성을 가지기에 말로 표현되어지는 일면적인 것으로는 그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이러한 싯다르타의 이야기는 한평생 부처의 말씀을 쫒아서 구도를 해온 고타마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고빈다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가르침이라는 것, 바로 그 무수한 말들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까닭은 해탈과 미덕이라는 것도, 윤회와 열반이라는 것도 순전히 말에 지나지 않으며, 다만 열반이라는 단어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말이나 사상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싯다르타가 평생 동안 추구하였던 ‘목샤’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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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6파 철학 

     

 

인도철학은 힌두의 가장 오래되고 신성한 문헌인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따라 정통파와 비 전통파로 나누어 진다. 정통파는 절대자이자 창조주인 이슈바라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리고 이 절대 신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의 인격신으로 찬양과 제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 실재로 논의 될 경우에는 탐구의 대상이 된다. 즉 베다의 가르침은 유신론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무신론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비 전통파는 무신론적으로, 합리적인 우리의 경험과 사유를 벗어난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보며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에 더욱 가깝다.

 

 전통파와 비전통파의 이러한 구분은 기원전 6세기에 일어났다. 전통적인 사상에서 벗어나려는 자우사상가들이 등장하자, 전통을 이어가던 사상가들은 이들 자유사상가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의 전통 사상을 더욱 체계화하게 된다. 이런 전통사상을 고수하기 위한 사상의 체계화를 통해 탄생하게 된 것이 6파철학이다. 그 중 상키야(Samkhya) 학파는 요가(Yoga) 학파와, 니야야(Nyaya) 학파는 바이셰슈카(Vaisesika) 학파와, 미맘사(Mimamsa) 학파는 베단타(Vedanta) 학파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각 학파는 앞서 언급한 바와같이 전통적인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며 우파니샤드에서 언급된 업과 윤회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각 학파는 ‘수트라’라고 불리는 근본경전을 따로 가지고 있으며 각 경전에 대한 주석을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구체화 시켜나간다

 

 

 

1. 정통파 - 6파 철학

 1)미맘사 - 베다의 제의적 또는 금령적 부분에 바탕을 둠. 제의를 통한 해탈을 추구.

 2)베단타 - 우파니샤드에 바탕을 둠. 해탈의 수단으로 지식을 강조.

 3)바이세시카 - 다원론적 실재론으로 세계를 해명함.

 4)느야야 - 그 다원의 실재에 대한 논리와 타당한 지식에 대한 질문들을 통해 해탈 추구.

 5)샹카 - 근본원질과 순수정신이라는 이원의 실재로써 세계를 해석.

 6)요가 - 이원의 실재를 요가 수행을 통하여 분별 하려고 함.

 

2. 비 전통파

불교, 자이나교, 차르바카

 

 

 

 

1) 미맘사 학파

 

미맘사 학파는 제사의례를 통한 해탈을 연구한 학파로 철학적인 성격은 약하다. 이 학파의 개조는 ‘자이미니’이며, 근본경전은 미맘사 수트라이다. 베다 성전은 제사부에 관한 학문과 (제사 미맘사 또는 전()미맘사), 지식부에 관한 학문(베단타 미맘사 또는 후() 미맘사) 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에서 제사부에 대한 학문은 미맘사학파에 의해 전개되며, 지식부에대한 학문은 베단타 학파로 이어져 전개되었다. 이렇듯 두 학파는 전통 브라흐만의 베다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며 따라서 미맘사 학파는 베단타 학파와 자매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맘사 학파는 다르마(dharma)의 연구 고찰이 그 목적이다. 그 다르마란 베다 성전에 규정되어 있는 제식의 실행과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켜야할 의무가 담겨있다. 인생의 목적은 해탈인데 해탈은 바로 제식의 실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신념에 의하면 베다성전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고, 실제로 우주의 변화 ㆍ 생멸을 초월해서 영원히 실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맘사학파는 베다에 나타난 제식의 타당성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이들은 베다 성전이 말로 되어 있기 때문에 베다의 영원불변성과 같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언어를 소리와 의미의 두 가지로 나누어 고찰한다그들에 의하면 비록 언어의 소리는 무상하지만 의미는 항구불변한다. 따라서 영원불변의 의미와 결합한 베다의 모든 언어에는 어떠한 오류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미맘사 학파에 의하면 말이라는 것은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음성을 초월하여 실재하는 것이다. 음성은 무상한 것이지만 말에는 음성을 초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며, 음성과 의미가 결합될 때 말은 영구불변하게 된다고 한다. 즉 말과 의미의 결합관계는 영구 불변하며, 인식상 개인의 주관을 초월하는 것이다.

 

2) 베단타 학파

 

베단타는 원래 '베다(veda)의 끝 혹은 결론(anta)을 의미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정통 인도 사상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끝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베단타(Vedanta)'라고 부른다.

베단타 학파와 관련된 대표적인 학자는 자이미니(Jaimini)와 바다라야나(Badarayana)이다. 자이미니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베다 성전 중에 제사부에 관한 것을 설하는 미맘사 학파의 개조가 되었고, 바다라야나는 지식부에 관한 연구를 시도함으로써 베단타 학파의 개조가 되었다. 즉 베단타 학파는 제사가 아닌, 베다의 근본 의미를 탐구하는 지식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우파니샤드 철학자들은 다원론적인 견해를 배척하고 다양한 현상 세계의 배후에 단 하나의 궁극적이고 통일적인 실재가 있다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펼친다. 여기서 궁극적인 실재이자 우파니샤드의 중심 논제인 브라만의 탐구가 베단타 학파의 주요 임무이다.

브라만()은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근원적 힘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물을 생성시킨 절대자이기도 하다. 브라만의 최초의 운동으로 허공이 생기하고, 허공에서 바람, 바람에서 불, 불에서 물, 물에서 땅이 생기한다. 이들 5원소가 창조된 경우 브라만은 이들 속에 머무르며 창조에 전념한다. 이리하여 자연 세계가 성립된다. 브라만은 내재자로서 피조물의 일체를 그 내부에서 지배한다. 현상 세계가 전개된 후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존속하다가 다시 브라만으로 돌아간다.

이와 같이 우주의 창조 ㆍ 지속 ㆍ 귀멸은 무한히 반복된다. 이 가운데에서 개아는 처음부터 계속하여 윤회를 거듭하고 있다. 개아는 브라만의 부분이다. 따라서 개아는 브라만과 다름과 동시에 다르지 않기도 하다.

인생에 있어 최고의 목적은 해탈이다. 해탈은 개아와 브라만의 합일이다. 제사 등의 행위를 실천하여도 아직 브라만에 대한 올바른 지혜를 얻지 못한 개아는 해탈할 수 없다. 그러나 브라만에 대한 올바른 지혜를 얻은 개아는 최후에는 브라흐만과 구별이 없어지며 해탈한다.

 

 

 

3) 바이세시카 학파

 

바이세시카 학파는 카나다(Kanada)라는 인물의 저서로 전해지고 있는 승론경(勝論經, Vaisesika-sutra)을 근본 경전으로 한다. 바이세시카 학파에 의하면 베다에 따라서만 행동한다면 윤회의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 해탈을 위해서는 6가지 원리의 연구와 요가를 함께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의 구성 원리는 여섯 가지로 실체(dravya), 성질(guna), 운동(karman), 보편(samanya), 특수(visesa), 내속( samavaya)이다.

실체는 성질이나 행위의 근저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이며, 어떤 물건들의 질료적 원인이 되는 것이다.

바이세시카에서 말하는 실체 9가지

(, prthivi), (,ap), (, agni), (, vayu), (, akasa), 시간(時間, kala),

공간(空間, dis), 의근(意根, manas), 자아(自我, atman)

이 가운데 물질적 실체인 흙, , , 바람은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결코 파괴되지 않는 원자로 구성된다.

반면에 복합체인 지ㆍ수ㆍ화ㆍ풍은 생성ㆍ소멸하므로 영원하지 못하다. 바이세시카 철학에 의하면 우리가 만지고 볼 수 있는 모든 물질은 원자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은 이들 영원한 원자를 각각의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결합시켰다 다시 분리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와 같이 원자가 복합체를 형성하므로 모든 우주의 물질세계가 성립되지만, 이 결합운동을 최초로 일으키는 힘은 신에 의한 것임으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다.

6가지 원리의 연구와 함께 요가를 실행해야 하는데 이를 통해 마나스를, 즉 인식을 제어하여 전생으로부터의 남아 있는 힘을 소멸시키면 해탈이 실현된다. (마나스는 사물을 지각해서 인식을 성립하게 하는 것이다) 그 경지에 이르면 아트만은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순수한 실체로 존재한다.

이 학파는 베다 성전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식이란 추론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의 일종일 뿐 독립적 지식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경험을 통하여 일어나는 순수한 지식만을 실체로 인정하고 있다.

 

 

4) 느야야 학파

 

느야야 학파의 창시자는 고우타마(Gautama)이며, 이 학파의 근본 경전은 니야야 수트라(Nyaya-sutra)이다. 다른 학파들이 우주를 하나의 전체로 이해하려는 명상적 수행방법을 택하고 있는데 반해, 느야야 학파는 바이세시카 학파와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이론과 현상분석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려는 것이 느야야 학파의 목적이다.(‘느야야’라는 말은 원래 ‘이론(理論), ‘정리(正理)’를 뜻하는 말이다) '이론 정리'를 뜻하는 느야야의 어원대로 이 학파는 논리적 추론을 통한 올바른 지식의 획득이 바로 해탈이라고 주장한다.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 4가지

1. 직접지각(pratyaksa), 2. 추론(anumana), 3. 비교(upamana),  4. 증언(sabda)

 

1. 직접지각은 감관과 대상의 접촉에서 생기며 오류가 없는 지식이다. 이는 의심이나 오류 그리고 가설적 논파나 기억에 의해 얻은 타당치 못한 지식과 구별해야 한다.

2. 추론은 직접지관에 근거하여 증인(-연기)에서 증인을 지니는 것(-)을 추리하는 인식수단이다.

3. 비교는 새로운 어떤 것을 이전부터 잘 알고 있던 다른 것과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아는 지식이다. 예를 들면 물소는 소와 비슷하다는 가르침을 듣고, 나중에 소와 유사한 동물을 보면 이것이 물소임을 아는 지식이다.

4. 니야야 학파의 인식론에서는 주로 믿을만한 사람의 말이나 증거의 의미를 이해하여 생기는 지식을 의미한다. 이들 인식수단에 의해 인식되는 인식대상은 아트만, 신체, 감각기관, 감각기관의 대상, 지각, 사고기관, 활동, 결점, 전생, 행위의 과보, , 해탈이다. 이 체계의 16항목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고 그릇된 지식을 제거하면, 괴로움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즉 해탈이 달성된다.

 

 

 

5) 샹카 학파

 

인도 전통에서는 샹카 철학이 인도 철학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존하고 있는 최고의 원전은 이슈바라크리슈나의 상키야카리카(Samkhya-karkia)이다.

샹카 철학은 불교와 같이 세계를 고()로 보며, 이 고를 극복하는 데에 철학적 사유의 목적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이 샹카 철학은 비록 정통철학의 범주에 속하지만 불교와도 상당한 연관을 맺고 있다. 무신론적 경향을 띠고 있는 이 학파는 세계가 신과 같이 신성하고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프라크리티라는 실제로부터 전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요가의 체험에 기초한 인간의 심리현상의 관찰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샹카 학파에서는 우파니샤드에의한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피하고, 그 대신에 두 가지 원리인 수수정신의 푸루샤(purusa)와 근본물질의 프라크리티(prakrti)를 상정하므로 이론적인 입장을 취한다.

 

푸루샤는 정신적 원리이며 프라크리티는 물질적 원리이다. 어느 것도 환상(maya)이 아니며 실재이다. 프라크리티, 즉 물질이란 푸루샤를 제외한 현실 세계의 전개원리로서 일체의 현상이 그로부터 발전해 나온다. 푸루샤는 방관자로서 어떠한 활동을 하지 않고 프라크리티를 관조할 뿐이다. 그 자체는 순수청정, 상주불변하며, 생사, 윤회, 해탈도 푸루샤와는 무관하다.

푸루샤는 영원하고 무한하며 부분과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는 반면에 프라크리티는 근본적인 질료인이다. 이 푸루샤는 비록 그 자체는 전혀 활동성이 없는 존재이지만 프라크리티로 하여금 최초의 균형을 깨고 세계전개를 시작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근본 원인이다. 따라서 샹카 철학에 의하면 해탈이란 바로 프라크리티가 다시금 평형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프라크리티가 평형의 상태로 돌아가면 푸루샤와 독릭접으로 존재하는 상태가 되어 해탈이 이루어진다. 상키야 철학은 해탈을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올바른 지식을 강조한다.

하지만 사람은 올바른 지식을 갖기가 힘들다. 우리가 잘못 인식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잘못된 인식은 아함카라는 자아의식에서 나온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늘 자기본위로 모든 것을 해석하려 하고, 사물에 대해서도 자기 것이라는 견해를 품게 된다. 이 아함카라, 즉 자아의식은 원래 물질적인 근원적 사유기능을 자아라고 잘못 생각하여, 근원적 사유 기능과 푸루샤를 동일하게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자아의식의 잘못된 생각이 우리들의 윤회를 성립시키는 근본이 되고 있다.

 

순수정신이 근본물질과 결합하는 것은 근본물질을 관조하기 위한 것이며, 근본물질이 순수정신과 결합하는 것은 해탈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결합으로 인해서 순수정신은 본래의 순수청정성을 발휘할 수 없으며, 물질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고()를 경험하고 윤회를 거듭한다. 하지만 순수정신은 본성상 해탈되어 있으므로 윤회의 주체는 아니다. 실제로는 근본물질이 스스로를 속박하거나 해탈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물질은 자성에 의해 스스로를 속박한다. 그러므로 근본물질이 순수정신의 목적이 달성되어야함을 앎으로서 해탈할 수 있다.

 

 

6) 요가학파

 

요가 학파는 무엇보다도 요가수행에 의하여 자아가 세속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워지는 체험, 해탈을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이 학파의 근본 경전은 파탄잘리(Patanjali)의 요가수트라(Yoga-sutra)이다. 요가는 '결합하다, 합일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말 그대로 심신의 조절을 통해 신과의 합일이라는 형태의 해탈을 추구한다.

이 학파의 교리는 상키야 철학과 거의 같다. 상키야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요가 철학도 우주의 궁극적 원리로서 순수정신과 근본정신을 인정하는 이원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가는 실천과 수행의 면을 더욱 강조한다.

요가 학파에 의하면 푸루샤는 본래 순수정신으로서 활동하지 않고 상주불변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대상에 따라 변하는 붓디의 비추어진 상태들과 혼동되기 때문에 푸루샤 자체가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든 것이다. 따라서 해탈을 위해서는 붓디와 푸루샤를 분명히 구별하는 분별지가 필요하다.

요가 철학에서는 붓디와 아함카라 그리고 마나스를 포함하여 마음(citta)이라고 한다. 마음은 전생에서 경험한 흔적이나 인상 또는 업을 지는 윤회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업의 흔적을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에 의한 모든 작용이 그쳐야만 해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가 철학에 의하면 마음은 다섯 가지의 번뇌에 의해 침투되어 마음에 축적되어 있다. 이들 다섯 가지 번뇌는 무명(avidya), 자기 의식(asmita), 탐욕(raga), 증오(dvesa), 생존욕(abhinivesa)이다. 이 중에서 무명은 가장 근본적인 번뇌이며, 다른 번뇌의 근원이다. 또한 업의 축적과 이에 따른 업보의 근원이다.

이러한 마음의 작용과 이미 축적되어 있는 번뇌를 제거하기 위하여 요가철학은 8가지 단계로 된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제계, 내제, 좌법, 조식, 제감, 집지, 선정, 삼매이다. 이 중에서 처음의 5단계는 외적 단계이고, 나머지 3단계를 위한 준비 단계이다. 그리고 요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마음작용이 그친 삼매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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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기타에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바가바드기타는 ‘지존의 노래’라는 뜻의 서사시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친족간의 전쟁에서 군대를 총 지휘하는 왕인 아르주나의 딜레마로부터 시작된다. 크리슈나는 아지주나의 스승이며 그의 마부로 이 전쟁에 참가 하였다. 하지만 이 크리슈나는 지존인 비쉬누의 화신이며, 따라서 바가바드 기타는 지존인 크리슈나의 노래이다.

 아르주나의 딜레마란 전쟁을 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전쟁을 하지 않으면 나라를 빼앗기지만, 전쟁을 하면 친족들과 친구들을 자신의 칼로 죽일 지도 모른다. 이러한 딜레마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격게 되는 것이다. 판검사는 법을 거스른 자신의 어머니를 벌하면 모정을 저버리게 된지만, 벌주지 않으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된다. 혹은 진실을 위해 친구를 배신할 것인지 아니면 우정을 위해 거짓을 말할 것인지 등 그 예는 무수히 많다.

 이러한 딜레마는 우리 인간이 행위를 요구하는 세속에 몸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진실의 아트만을 추구하는 양면성을 가진 존제인 것에서 온 것이다. 즉 현실에서 우리 인간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맡은 바를 행해야 한다. 이것은 다르마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육체를 요구하며, 육체를 통한 행위는 욕망을 낳고, 이것은 진실의 아트만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인도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어떠한 행위이든 세속에서의 행위는 생사윤회의 속박과 괴로움을 낳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속박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진리를 추구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행위를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인간 사회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행위를 통한 의무를 인간이 다하지 않으면 사회가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무로써의 가치는 인간이 추구하는 네가지 가치 중에 하나이다.

 

 아르주나의 번민은 진실의 자아가 아니라 인간의 육체에 의해서 육화된 자아에 의한 것이다. 진실의 자아는 행위하지 않으며 변하지 않고 관조할 뿐이다. 하지만 행위하지 않으면 사회가 유지 될 수 없기에 인도인들은 삶을 네단계로 나누어 이러한 인간의 양면성, 즉 행위함과 동시에 진리를 추구하기를 원하는 것을 시기적으로 절충하였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의무를 마친 사람만이 임서기에들어 진실의 자아를 추구할 수 있다

 

나의 출생과 행위의 신비로움을 진실로 아는 이는

육신을 버린 후 다시 재생하는 일없이 나에게로 온다네.

바가바드 기타 4 9

 

이는 진리를 깨달으면 윤회를 끊고 해탈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기존의 방식에 의하면 행위와 욕망을 다한 후에야 이러한 진리를 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일상 생활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이행 하면서도 진리를 추구하고 깨달음을 얻어 해탈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행위는 욕망을 낳고, 그 욕망은 업을 샇게 되는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세속의 행위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대의 욕망은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그 욕망이 낳게 될 결과에 대한 욕망이다. 따라서 윤회의 속박과 고통을 낳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즉 포기해야 할 것은 행위가 아니라 행위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다. 즉 욕망에 배제된 행위를 하면 사회는 유지 되면서도 해탈을 이룰 수 있다. 행위 그 자체는 더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게 되면 비루해 진다. 욕망과 집착이 배제된 행위는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이다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이와 같이 욕망을 떠난 행위,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가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카르마 요가>이다. 즉 세속의 일상적 행위가 종교적 행위로 승화된 것이다.

 

바라타의 아들이여, 무지한 자는 결과에 집착하여 행위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집착 없이 행위하노라

바가바드 기타 3 25

 

바가바드 기타의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굳이 명상을 위해 세상 모든 것을 등지고 숲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바가바드 기타는 이로 안해 다른 성전보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카르마 요가는 한 인간 개개인이 자아를 완전히 상실한체 오직 그 행위를 사회와 절대자 브라흐만에게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행위를 브라흐만에게 맡기고, 집착을 포기한 채 행위하는 자는

마치 물에 젓지 않는 연잎처럼 더 이상 죄악에 물들지 않는다.

 

그러니 언제나 집착없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행하자.

집착이 없는 자는 행위하면서도 궁극에 이르기 때문이다.

바가바드 기타 10 10, 3 19

 

바가바드 기타는 크리슈나의 노래라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 크리슈나는 물질을 통해 일시 일어난 존재일 뿐, 그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고 불멸의 지존인 비쉬누이고 브라흐만이다. 그는 결코 차별적인 존제가 아니다. 그의 사랑은 무차별 적이며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따라서 그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결국 세계의 모든 존재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다. 이러한 신의 믿음과 사랑은 신과 인간을, 인간과 세계를 하나로 만든다. 이는 사랑의 극치인 동시에 인간존재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믿음과 사랑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것, 이를 <박티 요가>라 한다. 즉 신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것 ,모든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같고 그로 인혜 지혜가 열리고 신에게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박티 요가는 대승불교에 영향을 주었다.

 

“바가바드기타 안에는 우파니샤드로부터 이어받은 지혜의 길은 물론이지만, 새롭게 행위의 길을 강조한다. 행위의 길은 그 이전의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던 분야이다. 보살도를 강조하는 대승불교는 대개 이 행위의 길을 통해서도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혜의 길과 행위의 길은 우리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우리 스스로의 해탈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취하는 해탈방법론은 그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자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3의 믿음의 길(박티 요가)이 바로 그것이다”

 (지혜-실천 통한 해탈방법론 제시. 김호성 동국대 교수 )

신에 대한 사랑 이외에도 지식을 통한 구원을 <즈야야 요가>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진실의 자아와 현상적 자아를 구분하는 것과, 진실의 자아인 아트만이 곧 브라흐만임을 통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을 통해서 욕망을 떠난 행위와 절대적인 사랑이 가능하다.

이렇듯 바가바드기타의 지식과 행위, 그리고 신에대한 사랑이 구원의 도로서 종합 되면서 그 이전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대립 또한 종합되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크리슈나가 인간이 상상 가능한 모든 것으로 드라날 수 있으며, 어떠한 속성도 갖지 않는 절대자 이고 모든 신들중의 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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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1. 머릿말

이 책에서 필자는 석가가 깨달은 사람의 전범임에는 틀림없으나, 우리가 꼭 석가를 통해서만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예를 들면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기독교의 주장과는 정면 상반되는 주장이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하지만, 석가는 다만 그가 가르친 내용을 따르라고 충고할 뿐이다. , 불교는 석가를 통하지 않고도 -다른 스승을 통하거나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특성에 의해 불교는 인도에서 비전통파로 분류된다불교가 발생한 인도에서는 학파적 구분으로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6파 철학과 이를 인정하지 않는 비 전통파가 있는데 불교는 자이나교와 함께 이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비 전통파이다. 여기서 전통파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을 탐구의 대상으로 논의 될 때는 무신론 적이지만, 브라흐만을 창조주이자 절대신, 인격신인 이슈바라로 논의 될 때는 유신론 적이다. 하지만 불교는 그 시작부터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비 전통파로 출발 하였고 궁극적 실재와 자재신을 부정하였다. 오직 인간의 경헌과 일치하는 것만을 진리로 인정하였을 따름이다. 오늘은 이러한 석가의 깨달음을 논의함으로써 불교는 종교인가? 혹은 석가는 종교인인가에 대한 질문들을 풀어가 보자.

그렇다면 석가는 무엇을 깨달았으며 왜 깨달으려고 하였을까?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과 더러움이 없는 안온의 열반을 얻기 위해서 였다. - 중아함경 권제 56 <라마경>


2.
석가는 어떻게 깨달은 것인가

석가의 깨달음의 특징

①첫째, 석가는 어느 정도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노병사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 영원한 행복, 절대적 기쁨을 추구한다.

 

②둘째, 석가는 죽은 다음의 열반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 속에서 영원한 행복을 찾는다. 그가 선정주의와 고행주의를 포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③셋째, 우리는 흔히 중도, 중용, 중관 등을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상태로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중용은-필요할 때면- 반드시 극단으로 나가고, 그 일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석가에게 있어서 중도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극단적인 쾌락과 극단적인 금욕을 직접 실천해 보았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중용이며 중도인 것이다

석가의 이런 중도사상은 초기 경전에 설해진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에 정착되고 ,이 연기설은 무아론과 무기론에 잘 나타나 있다.

①십이연기설 : 모든 중생이 업력에 의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 끊임없이 생사윤회하는 양상을 12단계로 나누어 관찰한 것이 십이연기설이다. 석가는 우리 인간에게 괴로움을 일으키는 갖가지 조건을 12갈래로 이루어진 인과의 연쇄로 분석하였다. 이는 석가의 깨달음의 본질이다.

-연기(緣起)?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고,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기에 저것도 멸하는 것이다'라는 석가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진리.

 십이연기설의 가장 핵심적인 뜻 : 인간의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 한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불교학 개론 中에서]

 

②무아론이란 문자 그대로 영원한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가아를 진아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로써의 나, 자아가 필요하다. 하지만 자아는 영원하고 단일한 실재가 아니라 다만 그 같은 경험을 통해 확인되는 가설적 존재일 뿐이다. 후기 불교인 설일체유뷰에서는 이에 대해 인간의 삶은 과거에서 현제, 현제에서 미래의 생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그것은 영속적이고도 단일한 자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번뇌와 업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즉 우리에게는 몸과 다른 본질적 자아가 존재하며 이것을 무아라고 한다. 이러한 무아는 형태가 없는 생명에너지로서 영원히 소멸되지 않으며 이것을 공이라고 한다. 인간의 육체는 죽어서 없어지지만 무아는 윤회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생에서 욕심과 탐욕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 무아론이다

 

③무기론이란 비현실적인 형이상학의 문제에는 정확한 답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초월적이고 영속적인 실재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은 다만 현실의 초라함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인간의 지적 호기심에 불과할 뿐, 우리는 경험을 초월하는 그 무엇도 알 수 없으며,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3.석가는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이 질문에 학자들은 대개 사성제설로 답변을 시도한다. 사성제란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이다.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란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말한다. 사성제는 일체가 고통이라는 고성제, 고통의 원인을 밝혀주는 집성제, 고통을 없애줄 수 있다는 멸성제, 고통을 없애주는 길을 제시한 도성제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 고성제는 치료 대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고

둘째, - 집성제는 그런 현상에 대한 원인 규명

셋째, - 멸성제는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는 선언

넷째, - 도성제는 구체적으로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

 

불교는 이렇듯 원인을 분석하여 제거하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이야기 한다.

필자는 이를 예로 들어 불교가 다른 종교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해 볼 때 ‘가장 논리적인 종교’ 혹은 ‘이론과 실천을 가장 잘 조화시킨 종교’ 라고 말하고 있다.

 

석가의 깨달음- 육하원칙으로 정리

 

①첫째, 누가 깨달음을 얻었는가? 물론 석가라는 자연인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석가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었으며, 불교 교리에 의하면 석가 이전에도 수많은 깨달은 불타들이 존재했으며, 우리도 동일하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불교의 보편성이 있다.

 

②둘째, 석가는 언제 깨달음을 얻었는가? 그는 사선정(四禪定)을 체험한 다음에 깨달음을 얻었다.

-여기서 사선정이란 욕계를 떠나 색계에서 도를 닦는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의 네 단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네이버 벡과사전) 불교에서 해탈을 이루는 마지막 과정을 보면 깨우침 선정의 상태에 따라 사선근의 단계의 다음으로 사선정과 멸진정이라는 단계가 있다. 성자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사선정의 단계를 반듯이 거쳐야 하며 여기에 일체의 번뇌를 떨쳐 버려야하는 멸진정이라는 마지막 단계를 지나야만 한다.

사선정 단계는 정도와 외도가 함께 공존하기 때문에 이 두 과정을 함께 닦아나가야 하지만 멸진정의 단계는 오직 정도만을 닦아가는 하늘 자리로 이 단계를 꼭 닦아야 만이 성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③셋째, 석가는 어디서 깨달음을 얻었는가? 앗사타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그 나무는 보리수로 불리운다. 보리(菩提)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보디(Bodhi)를 음역한 말로 깨달음이란 의미이다. 석가는 인도인들이 임서기에 들어 숲에서 수도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숲에 들어가 수행하여 깨달았다. 인도인들에게 숲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산()과 같은 의미로, 일반적으로 속세를 떠난 곳을 뜻한다.

 

④넷째, 석가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괴로움과, 괴로움의 일어남과,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거룩한 진리인 사성제를 깨달았다. 인간의 인생은 기본적으로 괴롭다. 인간의 경험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즐거운 경험과 괴로운 경험,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경험이 그것이다. 괴로운 경험은 그 자체로 괴로우며, 즐거운 경험은 그것이 상실될 때 괴롭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경험에도 무상의 괴로움이있다. 인간 삶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따라서 무상하다

따라서 인간은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이해해야만 괴로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괴로움의 원인도 또한 알아야 한다. 더욱이 괴로움의 소멸을 얻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진정한 소멸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도 따라야 한다. 결국, 괴로움의 소멸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행하는 실제적인 방법에 대한 앎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사성제에 대한 앎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석가를 깨달은 이라고 하는 것이다.

 

⑤다섯째, 석가는 어떻게 깨달음을 얻었는가? 당시 인도의 진리를 깨닫기 위한 일반적인 수행 방법에 따라 숲에 들어가 고행을 시작하였다. 마음을 제어하고, 죽음에 직면할 정도로 감식과 단식하였으며 호흡을 멈추는 등 감각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의 육체를 벗어나 순수 영혼으로 실재를 사유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는 진정한 해탈을 얻을 수 없었다. 육체를 완전히 버리는 것은 육체를 완전히 추구하는 쾌락에 반하는 또 다른 극단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고행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이를 포기한다. 그리고 음식을 공양 받아 기력을 차리고 다시 명상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었다. 석가는 수행을 시작한지 6년만에 이러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초기 불교 이후의 평가에서는 이미 그 이전의 전생에서 지극한 도를 닦았기 때문에 6년이란 짧은 시간 안에 이러한 깨달음이 가능 했다고 한다.

   

⑥여섯째, 왜 석가는 깨달음을 중생에게 설하게 되었는가? 자비심, 대자비에서 발로한 것이다. 그는 혼자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자족심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을 수 없었으며, 결국 오랜 심적 투쟁 끝에 그는 그의 교리를 전파하기로 결심 했다. 물론 처음에는 큰 기대를 걸지도 않았으며, 나중에는 수많은 군중이 그를 따라 왔을 때 그는 진리의 교리가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가르쳤다. “어두운 세상에서 나는 끝없이 북을 치리라!

 

4. 깨달음은 어떻게 오는 가

석가의 깨달음은 물론 석가 개인의 깨달음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석가 이외에 모든 사람도 성취할 수 있는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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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교는 무신론인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모든 종교를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절대적인 인격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무신교로 분류하고, 불교를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에 대한 믿음이 종교의 필요충분조건 이라는 것은 기독교의 종교적 특성일 뿐, 이를 다른 모든 종교에 대입 할 수 없다. 불교를 포한한 인도 사유에 있어서 믿음이란 수행을 통한 존제본성의 통찰에 대한 결과로써, 종교의 최고의 가치이자 목표인 구원을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통찰에 의해 구한다.

신의 존재는 경험으로 입증하거나 반증 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신의 존재나 비존재는 진위의 문제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불교는 석가나 불타를 믿는 유신론으로 볼 수도 있고, 철학적 탐구의 영역으로 무신론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유신론도 무신론도 아닌 신의 존재나 비 존재에 대해서 논의 할 필요가 없는 비신론 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불교의 근원인 석가가 깨달음 자체가 그 당시 종교인 베다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으며  궁극적 실재와 자재신을 부정하였다. 오직 인간의 경험과 일치하는 것만을 진리로 인정하였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 당시 인도인들이 절대적 실재인 브라흐만을 인격신 이슈바라로 모시고, 진리를 깨달은 성자들을 신격화 하여 모신 바가바드기타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은 그만 신의 영역으로 넘기고 깨달은 이들을 신격화한다. 그리고 그 신들을 찬양하고 제사를 올림으로써 그들이 깨달음을 내려주길 바랬다. 석가의 가르침 또한 결국 석가 입멸 후, 초기 불교의 이성에 입각한 경험적 지혜는 석가라는 인간의 신격화로 변하는 양상을 띈다. 하지만 이는 석가가 전한 진리와 다른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불교는 비신론이라고 믿는다.

불교는, 특히 원시 불교는 전형적인 비신론의 종교라고 저자는 믿는다. “신은 존재하는가?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이런 문제들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욕망의 화택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뜻에서 불교는 무신론도 유신론도 아닌 비신론이다”   

하지만 석가가 진정으로 이루려고 하였던 것은 자신이 신으로 모셔지는 것도 아니고, 신으로 모셔지지 않는 것도 아니고, 신이든 신이 아니건 중요하지 않다고 논하는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신에 의해서도, 혹은 신에 의하지 않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성과 경험으로 사유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석가의 가르침이다

 

 

 

참고서적

종교철학 11강좌. 황필호 지음. 철학과 현실사. 2006

인도철학과 불교. 권오민 지음. 민족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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