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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홍익 대학교 뒤 와우산에서 작업했던 버려진 것에 대한 작업.
청계천 8가 시장 쓰레기통에서 우연히 발견한 버려진 마네킨은 생명을 가져본적 없는 사물이지만 그 얼굴에서는 생명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날의 어느 시간에 엄마 손을 잡고 따라나선 시장길의 허름하고 요란한 여성복집에서 본적 있는 듯한 그녀의 얼굴은, 버려진 것이 주는 그 특유의 쓸쓸함이 더해져서 보는이로 하여금 아프고 슬픈 기억 하나씩은 생각나게 만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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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고기는 두가지 방식으로 전달된다.

살아서, 그리고 죽어서.

 

살아있는 물고기는 횟집 수족관에서 삶을 잠시 연장하며 죽음을 기다린다.

수족관은 그들의 삶과 죽음 사이에 잠시 거쳐가는 장소이다.

물고기의 입장에서 보면, 횟집 수족관은 삶을 이어가는 장소임으로 작은 바다이다. 하지만 이 작은 바다는 죽음을 기다리는 바다이다.

 

그리고 죽은 물고기는 그 사체(死體)를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해 얼음을 채워 스티로폼 박스에 넣어져 전달된다.

물고기에게 그 스티로폼 박스는 죽은 몸을 온전한 상태로 뉘이는 마지막 장소임으로 관(棺)이된다.

물고기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몸을 뉘인 스티로폼 박스는 관이다.

그래서 이 작업의 이름은 '물고기의 관' 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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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고기는 두가지 방식으로 전달된다.

살아서, 그리고 죽어서.

 

살아있는 물고기는 횟집 수족관에서 삶을 잠시 연장하며 죽음을 기다린다.

수족관은 그들의 삶과 죽음 사이에 잠시 거쳐가는 장소이다.

물고기의 입장에서 보면, 횟집 수족관은 삶을 이어가는 장소임으로 작은 바다이다. 하지만 이 작은 바다는 죽음을 기다리는 바다이다.

그래서 이 작업의 이름은 '기다리는 바다' 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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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림동 인자하신 어머니

                   낙성대 인자하신 어머니

                   신당동 인자하신 어머니

                   우면동 인자하신 어머니

                   사당동 인자하신 어머니

                   용산 인자하신 어머니

                   인덕원 인자하신 어머니

                   풍수원 인자하신 어머니


제 사진은 성모상 사진입니다. 저는 성모상이란 이름의 특별한 동상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인식과 환상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합니다.

 천주교회(이하 성당)에 가면 성모상이란 이름의 동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동상을 신성시 여기고 그 동상 안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으며 그 앞에서 절을 하고 기도를 올립니다. 하지만 성모상은 성모님의 모습을 사람이 인위적으로 상상하여 만든 동상일 뿐이며 이 둘을 동일시하는 성모상=성모님 식의 인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성모상을 둘러싼 사람들의 환상과 인식의 오류에 관심을 가지고 1학년 때부터 “능예공예성공적” 이란 제목 아래 성모상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습니다. 능예공예성공적이란 말은 불경에 나오는 말로써 “절을 하는 사람과 절을 받는 사람 모두가 공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두 성모상을 서로 마주보게 하여 서로 절하는 형상을 만듦으로써 공()한 성모상, 즉 비어있는 성모상을 나타내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사진은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보다 효과적으로 성모상을 둘러싼 오해와 환상을 깨는 방법을 찾던 중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예인을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배경지와 조명과 각종 장치들에 의해 아름답게 포장된 연예인은 우리와는 다른 공간에 사는 사람, 혹은 사람 이상의 존재로 까지 보이곤 합니다. 하지만 시선이, 카메라가 조금만 뒤로 물러나게 되면 배경지와 각종 장비가 눈에 들어오게 되고 결국 환상은 깨지면서 모든 것이 가공된 쇼라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장소인 성당에서 성스러운 장소에 놓인 성스러운 성모상 중간에, 즉 성당과 성모상 사이에 배경 천을 놓음으로서 이 둘을 분리시키고 카메라를 뒤로 물려 전체 풍경을 보여 줌으로써 결국 성모상을 둘러싼 마법은 풀리게 되고 성모상은 하나의 동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제가 찍은 것은 환상과 오해의 장막에 둘러싸인 동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005.12 계원조형예술대학교 사진예술학과 졸업전시 소논문 / 02학번 강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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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학년도 졸업논문

           사진의 진실성의 조건

                               
                                     : 강대웅
                                     : 인문대학  철학과
                                     : 2007080006
                                 지도교수: 류왕표


. 서론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 동시대의 인식론적 도구를 통해서

(, 컴퓨터, 매스미디어, 사진 등)

 

 

. 사진을 통해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1.사진을 통해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2. 증거로서의 사진

   2.1. 증거로서의 사진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2.2. 보도, 다큐멘터리 사진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3. 연출된 사진

   3.1. 광고사진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 사진의 인식의 조건은 무엇인가?  -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1.1. 실재의 거울로서 사진 (모방의 담론)

   1.2. 실재의 변형으로서의 사진 (코드와 해체의 담론)

   1.3. 실재의 자국으로서의 사진 (인덱스와 지시의 담론)

 

. 사진적 인식을 독특하게 다룬 작가가, 혹은 상황은 무엇이 있는가?

   1.1. 성능경의 <특정인과 관련없음> 을 통해서 본 보도사진의 거짓

   1.2. 이선민 <Livinging : 여자의 집 I> 을 통해서 본 가족사진의 거짓

   1.3. 구성연 <팝콘 시리즈> 를 통해서 본 사진의 인식

   1.4. 파야의 <Comedy &Enigma Q/A Project> 를 통해서 본 사진적 의미의 가변성과

       유동성

 

 

. 결론

과연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알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고문헌

*도판

 



. 서론

-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 동시대의 인식론적 도구를 통해서

(, 컴퓨터, 매스미디어, 사진 등)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떠한 것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 그 앎은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가? 우리는 주로 남에게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또 어떤 글을 읽어서 알게 되며, 직접 눈으로 보고 알게 되기도 하고, 스스로 생각하여 알게 되기도 한다. 지금 시대에 우리에게 어떤 것을 알려주고, 우리가 주로 어떤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이러한 정보를 전해주는 신문, , 컴퓨터 인터넷, TV 등을 통해서 이다. 불과 몇 년, 혹은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정보를 얻고, 무엇인가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은 신문, 혹은 책과 같은 텍스트로 되어있는 정보였다. 하지만 TV 보급을 통해 이미지를 통한 정보 전달에 익숙해진 우리는, 이제 인터넷이 보편화 되면서 단순이 이미지를 통해 정보를 전달 받는 것을 뛰어 넘어서 스스로 이미지와 영상을 만들어 정보를 교환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텍스트 보다는 이미지에 영향을 많이 받고, 이미지를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다. 따라서 이전에는 신문에 어떤 사건에 대한 글이 실리면 사진이 그 부연 설명으로 사용 되었다면, 지금은 사진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여 사건을 드러내는 사진이 중심에 있고, 글이 그 사진을 부연 설명해 주는 방식으로 옆에 있게 되었다.

이렇듯 현재 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은 점차 텍스트를 읽는 능력이 감소하고 이미지를 읽는 능력은 발달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적 이미지, 영상이 ‘안다는 것’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지금, 우리는 그 이미지를 통해서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알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이 논문의 출발점이다.

영상은 단절된 이미지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결국은 영상도 한 장 한 장의 이미지가 빠른 속도로 연결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이는 영상보다 보다 명확한, 확실한 정보를 전해 주는 것은 정지되어 있는 이미지인 사진이다. 우리는 움직이는 것 보다는 멈추어져 있는 것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이 시대의 가장 큰 앎의 도구인 사진을 통해서 우리가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 볼 것이다. 그것은 사진의 여러 가지 방식을 분석함으로서 가능하다사진에는 크게 진실을 보여주는 증거로써의 사진, 그리고 의도대로 변형된 것을 보여주는 연출된 사진이 있다. 증거로써의 사진에는 사건 사고 현장의 증거사진, 각종 증명사진, 다큐멘터리사진, 보도사진 등이 있다. 그리고 연출된 사진으로는 광고사진, 예술사진 등이 있다. 이러한 각 사진들을 통해서, 우리가 사진을 통해서 ‘무엇을’ 알게 되는 것의 방식과, 그 무엇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이 과연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것이다.

 그런 후에는 이러한 사진의 인식을 독특하게 다룬 작가, 혹은 그런 사진에 대해서 알아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진에 관한 인식의 조건을 파악함으로써 과연 우리가 사진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해 알아 볼 것이다.

이것은 결국 사진이 사실이라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의문이며, 어떠한 사진이 진실이고 어떠한 사진이 거짓인지를 알아봄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될 때, 가장 의지하고 있는 '사진을 통해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게 될 것이다





. 사진을 통해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1. 사진을 통해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은 영어로 photography, 빛으로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즉 사진은 사진 찍히는 대상이 반사하는 빛의 그림자인 가시광선 ·자외선 ·적외선 ·전자선 등을 화학반응을 통해 필름 감광층에, 그리고 디지털 사진에서는 CCD 위에 그 물체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처음 사진이 개발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것이 회화와 달리 눈에 보이는 것을 분명하고 선명하게 드러내는 명증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진은 그 사진에 찍히는 대상이 그곳에,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다는 증거로써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진이 만들어 지는 일련의 과정은 이렇다. 사람의 눈과 같은 기능을 하는 렌즈로 대상을 포착하고, 셔터를 누르면 그 셔터를 누르는 순간이 빛과 화학작용에 의해 필름에 기록 된다. 이 기록된 필름은 현상과 인화를 통해 우리 눈앞에 이미지로 드러난다. 디지털카메라의 경우 빛이 필름이 아닌 CCD 위에 기록된 후에 바로 우리 눈앞에 드러난다

사진은 한자어로 사진寫眞이다. 베낄 寫사, 참 진眞. 즉 실물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베껴서 그린 것이란 뜻이다. 이렇듯 우리의 언어에 드러난 사진은 그 의미 속에 그것이 이미 진실이라는 믿음을 내포하고 있다.

사진은 실제 사물과 꼭 닮아 있으며, 대상이 없이는 사진도 그 대상을 기록할 수 없다. 텍스트로 기록된 정보는 그 대상, 사건을 직접 보거나 그 장소에 있지 않아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사진은 그 사진을 찍는 사람이 그 장소에 있어야만, 그리고 그 장소에 그 찍히는 대상이 있어야만 만들어 질 수 있다. 따라서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형태유사성과 대상의존성을 이유로 우리가 사진을 존재에 관한 가장 정확한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기념물이라고 말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거기 존재했었음”은 이렇듯 사진에 찍힌 대상이 그 사진을 찍은, 셔터를 누른 그 순간에 거기에 존재했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렇듯 시간과 공간은 사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이것은 사진이 그 찍힌 대상, 사건에 대한 증거일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즉 사진은 그 사진이 지시하는 지시대상을 가진 기호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이 그 찍한 대상에 대한 증거가 아닌 경우도 있다. 그것은 바로 사진이 그 자체로 대상이며, 그 스스로 의미를 가지는 경우이다. 이러한 사진은 사진을 찍은 대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렇듯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지시하는 대상을 알 수 없는 흔들린, 초점이 나간, 극단적인 선과 면 만이 존재하는 단지 사진의 형태를 빌린 예술 작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리고 생각하고 기대하는 사진이 아님으로 앞으로의 논의에서 제외하겠다.

사진이 지시하는 대상이 없다면 우리가 사진을 두고 그 인식이 참인지 거짓인지 논의할 수가 없다. 따라서 앞으로 논의가 되는 사진은 그 대상이 충분히 드러날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 형태가 드러나 보일 만큼의 초점이 맞은, 그리고 형태를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흔들리지 않고 정지된 사진을 가지고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즉 사진다운 사진 (사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믿어지는), 그 지시대상을 가진 기호로서의 가지고 있는 사진에 대해서, 그 사진을 우리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인식하게 되는지와 그 인식을 통해서 가진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사실 사진의 이러한 특성 -진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믿어지는 것은 가시적인 특징일 뿐이다. 사진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도구인 듯 보이지만, 그러한 사진을 우리가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 어떠한 것을 알게 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는 무수한 조작과 변형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그 사진을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전달되어진 것들, 선행된 경험에 의한 고정관념이나 편견 같은 것에 의해서 무수한 조작과 변형이 이루어지고 그 위에 이념과 가치들이 덧씌워 지기 때문이다.

 

“사진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증거, 자료, 기념물, 예술작품을 생산해 주기 위해서 우리의 의도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도구가 아니라, 자체 내에 이미 특정한 진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산출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적극적인 기술 장치라는 것이다.

 

사진은 존재의 외형을 거울처럼 재현함으로써 존재에 대한 진리에 도달하려는 형이상학적 의도를, 광학-화학 이론에 입각한 정밀하고도 반복적인 실험-측정-계산을 수행해서 도달된 사진 메커니즘을 통해 경험적으로 실현한다. (...) 우리가 조작된 사진에게조차도 설득되는 현상을 사진의 이 두 가시적 (형태유사성과 대상의존성)특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사진을 조작하는 행위 자체도, 조작된 사진조차 그것이 사진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진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의미작용을 염두에 둔 행위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사진에 부여된 형이상학적 진리성에(무의식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사진이 진리적으로 의미화 되는 과정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진의 가시적 특성에 기대어 사진의 진리성을 정당화 하려는 형이상학적 의도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사진은 언제나 조작될 수 있고 조작된 사진은 언제나 진리로 의미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1)

 

사람들은 진실을 알기 위해, 자신의 감각, 지각 기관을 뛰어넘는 기계적인 확신을 얻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본다. 범죄 현장에서 증거물로 사진을 찍으며 내가 나임을 타인에게 증명하기 위해 신분증에 내 사진을 붙이고 다닌다. 신문에 실린 사건 현장의 보도사진을 보며 사람들은 그 사건의 진상을 목격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의심하기도 하지만 사진으로 찍힌 잔상은 사실이라고 믿는다. 사진은, 사진기는 있는 그대로를 기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의심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결국 보는 것, 즉 관찰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지식인 그 ‘무엇’에 대해 알게 되며, 사진은 우리에게 보여 지는 것들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라고 믿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진이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인식과 역사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여러 가지 분류의 사진들이 각각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지, 즉 이러한 사진들이 우리에게 알려 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가 사진을 통해 실제로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 볼 것이다.

 

 

2. 증거로서의 사진

 

2.1. 증거로서의 사진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사진사 안에서 증거의 수단으로서의 사진의 가치를 비판한다는 것은 역사의 증거적 기초를 뒤엎는 것이기도 하다. 사진의 증거능력이 의존하고 있는 아카이브의 기구와 증거에 대한 제도적인 규칙을 의문시 한다는 것은 역사의 객관성이 가지고 있는 아카이브의 기초에 도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 사진의 증거 능력은 이미지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지점에서, 특정한 실천과 제도 속에서 이미지를 규정짓는 담론적 질서에서 나온다.2) 

우리는 실생활에서 증거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사진을 그 어떤 사진보다 많이 이용하고 있다. 스스로가 자기 자신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민등록증에 증명사진을 붙여서 가지고 다니며, 여행 사진을 찍는 이유는 내가 그곳에 갔다 왔다는 증거로 남기기 위해서이다. 가족사진을 찍는 이유는 그 안에 그 가족이 화목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고, 졸업 사진을 찍는 이유는 거기서 무엇을 배웠든 일단 졸업을 했다는 증거로 남기기 위해서이다. 또 병원에서는 자신들이 치료한 환자의 수술 전 사진과 수술 후의 사진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뛰어난 기술을 증명한다.

그 외에도 사회적으로는 죄수 죄수들의 사진을 찍어서 그들이 자신들의 관리 하에 있다는 것을 증명 하려고 한다. 그리고 범죄 및 사고 현장에서 증거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도 사진은 사용된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증거로서의 사진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를 얻을 수 있을까? 그 증거로서의 사진이 정말로 증거로서 사용되어질 수 있을까? 자신들의 가족의 사랑과 화목을 증명하고 과시하기 위해 찍은 가족사진이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보여주는 것은 지금은 없는 가족의 화목이, 지금은 없는 부모님의 젊음이, 지금은 없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한때 있었다는 것,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것이 없다는 것의 증거일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진을 찍는 그 순간에도 그 가족들은 그 가족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과장된 행복과 과장된 부와 명예를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결국 가족사진은 그 가족의 어떠한 것도 증명할 수 없다.

사진이 증거로써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진을 찍는 사람이 순수한 관찰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지만 관찰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대, 신념, 개념, 이론, 패러다임 등에 의해서 제약된다. 즉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바라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여행사진이든, 졸업사진이든 영정사진이든 이러한 모든 증거로서의 사진은 그 사진을 찍는 목적에 이미 의도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특정한 목적에 맞는 사진을 기록한다. 따라서 객관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

증명사진, 죄수사진, 그리고 범죄 및 사건 사고 현장 증거사진과 같이 사회적으로 사용되는 증거로서의 사진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욕망을 담고 있다. 이러한 사진의 경우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사진 찍는 유형을 정해 놓고 있다. 일정한 거리에서 정면을, 플래시를 터트려서 선명하게 찍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진의 뒤에는 사진을 통해서, 사진의 데이터화에 의한 관리를 통해서 이러한 사진 속의 대상을 관리하겠다는 권력이 자리 잡고 있다.    

 

“빅터 버긴은 기호학이 열어놓고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는데, 기호학의 가장 큰 공헌은 순전히 시각적인 이미지는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고전적 기호학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진이 그 너머에 있는 담론과 얽혀 있고, 따라서 복잡한 상호 텍스트성이 펼쳐지는 자리라는 점이다. (중략...) 사진이란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 자리이며, 독자가 의미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친숙한 코드를 이용하고, 또한 그것에 이용당하면서 구조를 만들어내고 구조화되는 공간”이러고 주장한다.3) 

 

“존 탁은 사진이 어떻게 감시와 통제의 목적을 위해, 즉 새로운 지식/권력의 효과를 산출할 수 있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논의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사진의 진실이라는 것이 사진의 사용을 지배하는 코드 실천 제도를 작동시키는 특정한 담론적 질서의 산물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4)

 

즉 증거로서의 사진은 우리에게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담론적 질서의 배후에 있는 욕망과 권력을 보여 줄 뿐이다

 

 

2.2. 보도, 다큐멘터리 사진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다큐멘터리 사진, 혹은 저널리즘 보도사진 또한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증거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사진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사진은 위에서 논의한 사진들 보다 훨씬 더 증거로서의 영향력이 크다. 이러한 다큐멘터리 사진은 신문, 잡지와 같은 지면 매체와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불특정 다수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지며, 이러한 사진의 역할은 특수한 상황이나 사건의 생생한 모습과 그 사건의 본질을 그 자리에서 직접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대신보고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다큐멘터리 사진을 접함으로써 그 사건 현장에 직접 가서 보지 않아도 그 사건의 벌어진 모습과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다큐멘터리 사진이 보여주는 것이 과연 진실일까? 스튜어트 홀은 뉴스 사진이 만들어 지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단계들을 거치게 되는지와, 그 각 단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의미의 변형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버밍햄 연구소의 비교적 초기에 발표된 ‘뉴스사진의 결정’에서 스튜어트 홀은 이데올리기적 생산이라는 일반적인 영역 안에 포괄되어 있는 뉴스 사진이 사회적 의미를 생산하는 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중략)

스튜어트 홀은 뉴스 사진의 코드를 또다시 이미지 제작의 시간적 단계에 따라서 일련의 연속된 수준으로 나눈다. 그 수준이란 이미지를 기계적으로 기록하는 단계, 형식적이고 외시의미적인 양상, 시각적 요소들을 구도에 맞게 배열하는 것, 표현적인 코드, 뉴스 생산 그 자체, 프레임 안에서 사진의 조작, 페이지 레이아웃 안에서 사진에 문맥을 부여하는 것, 사진설명을 통해 의미를 고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적인 순서일 뿐 아니라 공간적 분석의 형태인데, 여기서 여러 가지의 전문적인 능력에 따라 상이한 제도적인 수준에서 사진의 기계적인 외시의미는 점차로 이데올로기와 신화의 사회적 영역으로 들어간다. 홀은 이런 과정을 어떤 특정한 의미들이 다른 의미들에 비해서 우위를 가지게 되는 연속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략) ‘뉴스가치’란 ‘편집자가 몇 장의 사진들을 놓고서 그 중에서 사진을 고르고 등급을 매기고 분류하여, 뉴스를 구성하는 가치에 대한 그 자신의 지식에 비추어 보아 맥락을 부여하도록 하는 전문적이고 실행적인 행위’를 말한다.

 

“홀은 경찰을 걷어차는 시위대의 사진을 분석하면서 이런 점을 보여주고 있다. 홀에게 이 사례가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 자체가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원래의 외시의미를 굴절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의미가 부과된다는 점이다.5)

 

우리나라의 보도사진을 스튜어트 홀의 생각에 걸어서 이야기 해보자. 지난여름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대 국민 촛불집회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동아일보로 대표되는 보수신문과 경향일보 한겨레로 대표되는 진보신문은 똑같은 날,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사건을 다룬 거의 같은 사진을 다른 의미로 사용하였다. 보수신문의 사진에는 ‘촛불집회로 인해 도로가 막혀서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혹은 ‘과격시위대로 인해 전경들이 폭행당했다’는 식의 기사가 같이 나간 반면, 진보신문에서는 ‘전의경의 폭력, 과잉 진압으로 시민들이 폭행당하고 있다’ ‘쇠고기 수입 찬성 시위에는 시위를 허가하고, 반대 시위는 불법 시위로 몰고 있다’ 는 식의 기사가 같이 나갔다. 하지만 이 두 신문이 사용하고 있는 사진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건을 거의 같은 앵글로 찍었음에도 그 사진의 의미가 편집국의 의도에 따라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세명대 저널리즘특강에서 강연을 한 한겨레신문사 곽윤섭 사진기자는 "촛불집회를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한다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입니까? 앵글은 언제나 한 쪽만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12시간 또는 그 이상 벌어지는 촛불시위를 한 장의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라고 말했다.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해서 길이 막힌 것을 보여주는 사진도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다. 촛불 수 만개가 행진하는 장관을 보여주면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진도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의 일부만 보여주는 게 진실일 수는 없다. 사진으로도 왜곡보도가, 입맛에 맞는 보도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에 곽 기자는 "사진은 센서티브하기 때문에 섬세하게 다뤄야 제 역할을 합니다. 전체를 조망하는 게 중요하죠. 길이 막히는 건 모든 시위에서 마찬가지인데 유난히 촛불집회 때문에 길이 막힌다고 부각시키는 것은 따지고 들어가면 곁가지로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요?" 라고 말한다.6)

 

위의 경우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진은 진실만을 전한다는 착각을 주기 때문에, 보도사진에서는 이를 이용해 연출을 한다는 것이다. 진실인 것처럼 전달하려고 진실을 연출하게 된다는 말이다.

 

세계적 사진작가 그룹 매그넘 맴버 중 한명인 마틴 파는 자신의 사진 작업 '마지막 주차공간'(The last parking place)시리즈에 대해 "알다시피 사진은 늘 거짓말을 하는 것 아니냐." 라고 말했다고 한다. 책으로도 출간된 이 시리즈는 마틴 파가 10년 동안 전 세계 30개국에서 차 두 대 사이에 한 대의 공간만 비어있는 주차장 사진을 모은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주차장에는 주차공간이 많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빈자리 하나만 남은 것처럼 '앵글'을 찾아내 찍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사진은 그것이 진실이라는 사람들의 믿음을 바탕으로 진실인 것처럼 연출된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이렇듯 사람들이 증거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는 사진은 사실 증거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증거로서의 사진을 통해서 그러한 사진이 가질 것이라고 믿었던 진실성을 우리가 가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 그것이 거짓임을 전제로 하고 찍는 연출된 사진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3. 연출된 사진 

 

연출된 사진은 증거로서의 사진과 달리 그 사진을 찍는 그 순간부터 거짓임을 전제로 한다. 의도된 대상을 의도된 시간과 의도된 공간에서, 의도된 조명으로 의도된 카메라를 가지고 순순하게 의도된 상황을 연출하여 찍는 사진이 연출된 사진이다. 이러한 사진에는 사진 작업을 의뢰한 업체에서 원하는 의도된 모습을 강조하여 보여주어야 하는 광고 사진과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연출되어진 것을 찍는 예술사진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연출된 사진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3.1. 광고사진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롤랑 바르트는 이미지가 기호의 감각적 요소인 기표와, 기호의 개념적 의미인 기의로 된 것으로 보고 분석하고 있다. 바르트는 광고 이미지의 사례를 례로 들어, 그것이 기표(열린자루, 토마토, 여러 가지물건들)와 그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기의들(신선함, 가정적임, 이탈리아적, 음식문화)을 해석하고 있다.7)

광고 사진을 통해서 우리는 사진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들의 기호들을 보게 된다. 그 사진 안에는 있는 거의 모든 요소는 치밀하게 계산되어진 것이다. 롤랑바르트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열린 자루, 토마토, 그 외에 여러 가지 물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신선한 이탈리아 가정의 음식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그 광고 사진의 폐해를 알고 있다. 예를 들어 햄버거 광고 사진에서는 크고 두꺼운 고기와 싱싱한 야채가 들어있는 햄버거를 보여 주지만, 실재 매장에는 그러한 햄버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나는 것은 얇은 고기와 힘 빠진 상추 한 장일 뿐이다. 허위 과대광고를 법으로 금하고 있기는 하지만, 광고 사진의 특성이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시킴으로서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므로 어느 정도의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광고 사진은 그 사진 속에 드러나는 여러 기표들을 조작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의도된, 사람들이 그 기표를 통해 연상시킬 것으로 기대되어지는 기의들을 전달한다. , 광고 사진을 만드는 사람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되어지는 사진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의도적으로 과장된 거짓을 보여주고, 그것이 사진의 특성과 같이 사실이라고 믿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광고 사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광고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반복된 광고 사진의 거짓을 몸으로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더 이상 광고 사진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는다.

앞의 증거로서의 사진에서 사람들은 사진은 진실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여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이라고 잘못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거짓을 사실로 인식했기 때문에 올바른 앎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광고 사진의 경우에는 의도된 거짓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믿지 않기 때문에, 결국 거짓을 거짓으로 받아들임으로서 오히려 증거로서의 사진보다 광고 사진을 보는 것이 올바른 인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진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거나 거짓을 거짓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른 인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거나, 진실을 거짓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 사진의 인식의 조건은 무엇인가?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이 장의 글은 필립 뒤바의 ‘사진적 행위’의 ‘사진의 사실주의 담론에 대한 간략한 역사 회고’를 요약한 것이다.8) 이 요약을 통해서 사진의 인식과 사실주의에 대한 담론들의 역사적, 실제적 사례들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사진을 통해서 안다는 것에 대한 역사적 문맥을 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광화학적 이미지와 그 지시대상의 관계에 고유한 실재성의 원리에 대하여 사진 이론가들과 비평가들이 고수해온 여러 관점들의 역사적 문맥을 다시 되짚으려 한다.

대체로 이러한 담론의 진행은 실재의 거울로서 사진, 실재의 변형으로서의 사진, 실재의 자국으로서의 사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사진 이론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사진 이미지의 자료적인 가치와 사실주의 문제에 관한 인식론적 입장을 갖게 된다.

 

 

1.1. 실재의 거울로서 사진 (모방의 담론)

 

사진 이미지에서 실재성의 효과는 우선 사진과 그 지시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닮음에 빚지고 있다. 사진은 근본적으로 모방이다. 유사성과 실재성의 개념들, 진실과 독창성의 개념들은 이런 관점에 따르면 서로 겹치고 꽤 정확하게 중첩된다. 사진은 세상의 거울로 간주되고 퍼스의 의미에서 ‘도상’이다.

 

이러한 실재의 거울로서의 사진에 대한 생각은 19세기 초에 사진의 발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시대에 사진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실재의 모사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당시 담론에 따르면, 사진은 그 사진을 찍는 작가의 손에 의한 중재 없이 ‘자동적인’ ‘객관적인’ 방법으로 이미지를 나타나게 하는 기술적 원리 그 자체와 기계적 진행 방식을 통해서 모방의 능력을 갖는다. 사진을 찍는 그 순간의 사진가는 단지 그 장면을 지켜볼 뿐이며 기계의 조수에 불과하다. 보들레르는 이러한 관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사진은 결국 물질적이고 정대적인 정확성을 필요로 하는 직업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이제까지 전혀 보지 못했던, 비서나 공증인의 역할을 한다. 사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지는 유적, , 판화, 손으로 쓴 원고와 형태가 곧 사라져 우리의 기억 한구석에 자리 잡을 소중한 대상들을 망각으로부터 구현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진은 감사와 찬양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진이 상상의 영역과 감각 밖의 영역, 그리고 인간이 영혼을 부여하는 모든 것을 침범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9)

 

이 인용문에서 주목할 것은 보들레르가 실재의 자료가 되는 기억을 위한 단순한 도구로서의 사진과 상상의 순수 창조로서의 예술을 엄격히 구별하는 것이다. 사진의 역할은 과거의 자국을 보존하거나 세상의 실재성을 가장 잘 이해하는 노력으로서 과학을 보조하는데 있다. 즉 사진은 존재 했던 것의 단순한 증거물로서 기억의 보조물이며, 이러한 사진이 예술적 창작으로 이해되는 영역에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진의 특징이 이러한 닮아 있음에 있다고 생각한 사람인 앙드레 바쟁은 이러한 사진이 기계적인 자동성도 아니고, 초연실주의의 자동성도 아닌 순수한 이미지 구성에 있어서의 자동성, 즉 인간의 손지 중재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자동구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림에 비하여 사진의 독창성은 그 근본적인 객관성에 있다. (...) 처음으로 원래의 대상과 그 재현 사이에 어떠한 것도 개입되지 않는다. 처음으로 외부세계의 이미지는 엄격한 규범에 따르는 인간의 창조적인 중재 없이 자동으로 형성된다. (...) 모든 예술은 인간의 출현 위에서 이루어지지만, 사진은 유일하게 인간의 부재에서 출현한다.10)

 

바쟁에게 닮음은 사진 생성물의 특성과 결과일 뿐이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를 구성하는 행위, 즉 이미지를 만드는 것, 그 자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방의 효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그 지시대상 사이의 순간적인 인접성에 있다. 다시 말해 실재의 외관이 사진기의 필름으로 전이되는 원리에 있다. 결국 바쟁이 말하는 사진은 퍼스의 용어로 ‘도상’이기 이전에 우선 ‘지표’이다.

 

“이러한 자동생성은 근본적으로 이미지의 심리학을 전복시켰다. 사진의 객관성은 어떤 회화작품에도 없는 신빙성이라는 강력한 힘을 이미지에 부여한다. 어떤 비평적 반론이 있을 지라도 우리는 거기에 재현된, 즉 시공간에 나타난 대상에 대한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다. 사진은 사물의 실재성을 그 재생된 이미지로 전이시키는 역할을 한다.11)

 

 

1.2. 실재의 변형으로서의 사진 (코드와 해체의 담론)

 

사진 이미지에 대한 19세기의 담론을 닮음의 담론이라고 한다면, 20세기는 전반적으로 사진에서 실재의 변형 개념을 더욱 많이 강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재의 변형으로서의 사진에서는 실재를 정확하게 복사하는 사진 이미지의 능력을 고발한다. 사진의 이미지는 중성적인 거울이 아니라 언어, 다시 말해 문화적으로 코드화 된 언어와 같이 실재를 이동시키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말하자면 실재의 변형적인 도구라는 것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이미지는 경험적 실재는 재현할 수 없고, 일종의 선험적인 내적 실재성만을 재현할 수 있다. 사진은 여기서 퍼스의 용어로 코드전체, 즉 상징이다

 

이 시대의 담론들은 사진의 모방과 투명의 담론에 반기를 드는데, 그 중에서도 사진 매체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일어난 실재의 변형적 측면을 강조한 논쟁의 중심 논점을 살펴보자.

사진이 근본적으로 실재의 객관적이고 충실한 복제물이라는 인식을 반박하기 위해 이들은 ‘거울’로서의 사진의 결점과 약점을 지적한다. 사진은 삼차원의 대상을 이차원의 이미지로 축소시키고, 결국 사진은 후각적이거나 촉각적인 다른 모든 감각을 배제하면서 시공간의 정확한 한 점을 떼어내 순수하게 시각화시키므로 충실한 복제물이거나 실재의 재현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사진을 만들어 내는 사진기는 중성적인 생산의 작용물이 아니라 의도된 효과를 내는 기계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이전 시대의 사진의 가치중립을 통한 객관성을 부정한다. 알랭 베르갈라는 ‘특종 이미지들’ 이란 제목으로 나온 까이에 뒤 시네마 특별호(268-269,1976)에서, 작가들이 특종화해 고발하려는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최대한 가공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순간 포착된 실재의 절정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작가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고 조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베르갈리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모든 ‘연출적인 부분’과 언제나 은폐된 진술 장치에 함축되어 있는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폭로한다. 그는 사진가가 행위(제스처) 속에 개입하는 방식, 이미지의 순간 포착 효과, 광각렌즈의 역할 등을 강조하고 있다.

 

“우선, 사진적 재현 공간을 진술 공간이라고 짐작하지 말아야 한다. 이 공간은 장면을 둘러싸고 있는 광각 렌즈에 의해 구성되는데, 이때 장면은 언제나 우연과 우발에 의해 갑작스레 포착된 것처럼 보인다. (...) 광각렌즈는 거짓된 인본주의를 대중적으로 조작하며, 인물과 희생자의 고독과 고통을 부각시킨다.12)

 

한편 사진 이미지의 코드작용을 통해서 사진 메시지의 의미가 결국 문화적으로 결정됨을 보여 줌으로서 사진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주장도 있다. 알렌 세큘라는 사진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읽기 코드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진의 의미는 모든 수신자에게 다르게 전달된다고 말한다.

 

“인류학자인 멜빌 헤르스코비츠는 어느 날 어떤 원주민 여자에게 그녀의 아들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인류학자가 사진의 자세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게 할 때까지 아들의 이미지를 알아볼 수 없었다. (...) 인류학자가 그녀에게 상세히 설명할 때가지 사진은 어떠한 메시지도 전달해 주지 않는다. ‘이것은 메시지다’ ‘이것은 당신 아들의 모습이다’ 라고 하는 것은 사진 읽기에 반드시 필요한 명제이다. 사진을 구성하는 코드들을 분명히 설명하는 언어화는 원주민이 사진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그래서 사진적 장치는 문화적으로 코드화된 장치이다.13)

 

이러한 사진의 객관성과 실재성을 부정하는 담론들에 의해서 사진에서 인정되던 확실한 닮음과 정확한 자료의 가치는 약화되고, 이로 인해 사진은 더 이상 어떤 경험적 진실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전달 매체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1.3. 실재의 자국으로서의 사진 (인덱스와 지시의 담론)

 

실재의 자국으로서의 사진에서는 이전의 두 사진 이론에서의 사진의 실재성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서 지시대상으로의 회기를 이야기 한다. 실재의 자국으로서의 사진에서의 담론의 쟁점은 사진이 바로 지표 체계(신호와 그 지시대상 사이의 물리적 인접성에 의한 재현)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이론이다. 결국 이미지는 그 지시 대상에 의해서만 이해되는 ‘어떤’ 실재의 자국이다. 이러한 담론은 1970년대 롤랑바르트의 「밝은 방」과 퍼스의 지표에 대한 이론적 재발견을 바탕으로 해서 시작되었다

사진 이미지는 지시적인 경험, 즉 이미지를 생기게 한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은 사진 이미지가 코드에 의해 구상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에서 느껴지는 떨쳐버릴 수 없는 불가피한 실재성의 감정을 말한다. 롤랑 바르트는 그의 책 「밝은 방」에서 사진에는 모든 것을 거슬러 그 이면에 ‘붙어 있는 지시대상’이 있다고 말한다. 즉 이미지가 필연적으로 그 지시대상을 연상시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사진 이미지 그 원래의 실재성은 존재를 단언하는 것 이외에 그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퍼스의 용어로 말하면 사진은 우선 인덱스이다. 그리고 나서 사진은 닮음(도상)이 될 수도 있고, 의미(상징)를 얻을 수도 있다.

 

“나는 우선 사진의 지시대상이 다른 재현 체계가 갖는 지시대상과 무엇이 다른지 이해해야 하고 또한 가능한 잘 설명해야 한다. 나는 어떤 이미지나 신호가 보내는 실재의 임의적인 대상이 아닌 렌즈 앞에 놓여진 실재의 필연적인 대상을 ‘사진적 지시대상’ 이라고 부르는데, 만약 이러한 필연적 대상이 없다면 사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림은 보지 않고도 실재성을 꾸며 낼 수 있다. (...) 그러나 반대로 사진에는 사물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거기에는 중첩되는 이중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실재성과 과거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속력은 유일하게 사진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것을 요약해서 본질 자체 즉 사진의 노에마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진에서 노에마의 이름은 존재했던 것일 것이다.14)

 

바르트는 “사진이 있기 위해서는 보여 지는 대상이 주어진 순간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사진의 유일한 사실, 즉 유일한 지시기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퍼스는 사진의 지표적 지위를 주시하여, 사진적 사실주의의 이론적 접근을 시도한다. 퍼스의 이론을 종합해 보면 사진 이미지의 인덱스는 지표적 신호와 지시대상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물리적 연결, 특이성, 지칭성 그리고 증명성의 네 가지 원리를 갖는다.

결국 이와 같은 원리를 근거로 하여 사진은 실재를 증명하는 증거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에서 사진은 엄밀히 말해서 그 자체로는 거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의미는 사진 외부에 있으며, 근본적으로 대상과 진술 상황과의 실질적인 관계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된다. 그래서 바르트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담은 겨울 정원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이 사진은 분명히「밝은 방」에 서술된 모든 내용의 동기가 되지만, 그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의 어머니 사진이 아무런 의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사진-인덱스는 우리들 눈에 그것이 재현하는 것의 존재를 단언한다. 하지만 사진-인덱스는 재현의 의미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미지가 생겨난 진술 상황의 수취인이 되지 않는 한, 그 의미는 우리에게 수수께끼로 남는다.      

 

  




Ⅳ. 사진적 인식을 독특하게 다룬 작가가, 혹은 상황은 무엇이 있는가?

사진을 만드는 사람과, 그렇게 만들어진 사진과, 그것을 보는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식의 작용을 독특하게 이용하여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낸 작가들을 통해 사진을 통한 인식, 우리가 사진을 통해서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알아보자. 


1.1. 성능경의 <특정인과 관련 없음> 을 통해서 본 보도사진의 거짓

성능경은 70년대 언론통제가 극심했던 유신치하에서의 언론 상황을 풍자하는 <신문:1974. 6. 1 이후> 등의 신문 읽기(70년대) 작업을 통해 독자의 의식과 여론을 지배하는 신문매체의 감추어진 권력에 저항하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 냈다. 그의 이러한 작품 중에서 신문사진 속 인물들을 접사 촬영한 뒤 그들의 눈을 노란 색 실크스크린으로 가리고 확대 인화한 <특정인과 관련 없음>이란 작품을 통해서 사진이라는 인식의도구의 허점을 이 사람이 어떻게 이용하여 예술 작품으로 만들었는지 살펴보자. 77년도에 발표된 이 <특정인과 관련 없음>이란 작품은 신문에 실린 보도 사진 중에 인물 사진을 무작위로 골라내어, 그 사진을 확대프린트 한 후, 노란색 실크 스크린 천을 인물 사진의 눈에 덧대어 만들어 졌다. 이러한 작업이 의미 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선 신문에 실린 인물 사진을 작품의 소재로 고른 이유를 살펴보자. 우리는 신문에 실린 보도사진은 보통 진실 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은 가치중립적이며 특히 보도사진은 순간 포착을 통해서 그 순간이 있었던, 실재하는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능경은 보도사진은 다분히 특정한 가치를 지니며 의도된 가치를 드러내는 도구임으로 진실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기자가 사진을 찍는 그 순간에도 기자의 의도에 의해 특정 요소를 강조할 수 있으며, 찍고 난 후에도 여러 장의 사진 중에서 자신의 의도에 가장 가까운 사진을 고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촬영이 끝난 후에도 그 신문을 기사 글과 함께 편집하는 과정에서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 그 사진은 실재 그 사진이 찍혀진 사실과는 전혀 다른 의도로 사용되어 질 수도 있다. (이러한 보도사진의 진실성을 담보할 수 없는 이유들에 대해서는 앞의 제 2.2장. 보도, 다큐멘터리 사진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에서 자세히 알아보았다) 따라서 신문 보도사진에 실린 인물 사진은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 즉 진실은 오간데 없고 신문 기자와 편집자의 의도에 의해서 살인범도 될 수 있고 간첩도 될 수 있고 농부도 될 수 있고, 그 누구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문에 실린 사람들의 얼굴 위에 모자이크(특정인의 신분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되는) 효과와 같은 노란색 실크 스크린 천으로 눈을 가림으로써 그들이, 그 신문 보도 사진이, 그 신문 보도사진 안에 실린 그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님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문 보도 사진을 이용한 작업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성능경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유신 시대의 권력에 의해 조작된 거짓을 대중들에게 보여 주었던 언론을, 그 언론 안에 숨어 있는 권력을, 권력을 드러내는 도구로서의 사진을 비판함으로써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1.2. 이선민의 <Livinging : 여자의 집 I>을 통해서 본 가족사진의 거짓

이선민의 <Livinging : 여자의 집 I>은 가족을 주제로 한 사진작업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족사진과 많이 다르다. 즉 일반적인 가족사진에 드러나 있어야 할 가족의 화목과 행복, 건강과 부유함, 영원한 사랑과 같은 요소들이 없다. 사실 이러한 일반적인 가족사진에 들어 있는 요소들은 거의 모두 인위적으로 꾸며진 것이고 가식이며 따라서 거짓이다. 그 가족사진 안에 들어있는 미소와 화목은 사진 속에는 있지만 실재 현실 속에는 없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안전적인 삼각구도는 이 가족의 안정을 이야기 하지만 현실속의 아버지는 가족 중 그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고 나누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가족사진의 단골 배경이 되는 품격 있는 벽난로와 두꺼운 책들이 꽃인 서재는 사진관의 배경일 뿐이다. 하지만 성능경의 가족사진은 어떤가? 그의 가족사진에는 실재 삶의 공간이 있다.  

“그녀의 사진에는 시각적 환경으로서의 가정이 충실하게 재현되어 있다. 그녀는 의미 없는 공간인 가정을 의미 있는 것처럼 만들어 주는 권태로운 디테일들, 즉 붓글씨 액자(살아 있는 전통미), 결혼사진(영원한 사랑), 자개장(품위와 세련미) 등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고, 반대로 의미 있지만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디테일 들, 즉 (후줄근한)아내, (귀찮고 힘빼는)아이들, (걸리적 거리는) 장난감과 기저귀도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다.”
가족은 화합과 화목을 표상 하는 이미지로서 많이 보여 지고, 화합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강화하지만 그 가정 속에 진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가족사진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선민의 가족사진 작업에는 이러한 사실적인 가족의 관계가 드러난다. 그의 사진 속에 가족은 권태롭고, 서로에게 아무 관심이 없으며, 각자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다. 이렇듯 서로 한자리에 모여 있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가족구성원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져버리지 못하는 가족이란 틀이 사진 속에서 시선의 어긋남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진이 현실을 왜곡하는 이데올로기로 가득 차있는 가족사진보다 더욱 진실에 가깝다.

 
1.3. 구성연의 <팝콘 시리즈>를 통해서 본 사진의 인식

이 사진 작업은 전형적인 전통 동양화의 구도와 절제된 색감으로 마치 한폭의 매화가 그려진 사군자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사진 속의 매화는 사실은 팝콘이다. 구성연은 나뭇가지 끝에 팝콘을 하나, 하나 붙여 마치 눈꽃이나 만개한 매화 등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연출하여 이를 촬영한 것이 바로 이 <팝콘 시리즈>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자연의 일부를 잘라 프레임 속에서 완결된 형태를 취하도록 연출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연출한 이미지 코드에 숨겨진 두 가지의 낯선 결합, 그러나 완벽하게 환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순간과 그것에서 벗어나는 지점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사물 혹은 자연의 유사성 속에서 ‘본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지각하게 합니다.”
이 사진을 처음 접하는 관객은 그냥 평범한 매화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그 중에 사진에 흥미를 느낀 사람이 사진에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관찰하게 되면 매화가 아니라 팝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듯 구성연은 사진에 담긴 대상은 그림과 달리 진실이며 실재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비튼다. 그는 익숙한 대상인 매화를 팝콘으로 표현함으로써 현실을 조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사진의 팝콘을 사람들은 그것이 사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매화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믿음으로 인해 팝콘이 매화를 표상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사진이 진실이라는 사람들의 믿음과, 그것이 언제든지 조작되어 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그의 팝콘 사진은 현실과 이상, 실재와 허상이라는 사진의 이중적인 경계가 시각적 체험으로 재현된다.

1.4. 파야의 <Comedy &Enigma Q/A Project>를 통해서 본 사진적 의미의 가변성과 유동성

“Comedy &Enigma Q/A Project"는 사회적 패러디를 코믹 적으로 해석하여 만든 작업이다. 신문이나 여러 잡지에서 보면 사진이 항상 기사를 증명하듯이 마치 기사를 보증 하는 형식으로 하는 것을 볼 수 있곤 한다. 기사의 부족한 면을 사진으로 보강하려는 형태를 많이 볼 수가 있고, 또한 사실 입증의 형태로서 가장 신빙성 있는 방식이 사진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사진과 텍스트는 상호 보완의 개념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일상적 장면을 연출한 다음 이를 퀴즈 혹은 수수께끼의 대상으로 만드는 작업을 통해서 일탈적 유머와 재치를 과시하면 관객의 파안일소, 박장대소를 부르며 본인을 우쭐하게 한다. (...) 어떤 대답이든 정답이 될 수도 있고 오답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는 사진적 상황을 연출한 질문자, 즉 작가 본인도 정답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정문오답, 현문우답은 일상에서 우리가 다반사로 경험하는 말장난이지만, Comedy &Enigma Q/A Project 작업이 보다 의미 있는 폭소를 자아내는 것은 질문의 대상이 바로 사진이라는데 있다고 본다. 그것은 지식과 정보의 담론들이 텍스트의 내용을 뒷받침하거나 논지를 증거하고 증명하는데 쓰는 사진이라는데 있다. 신문기사나 조사연구가 텍스트의 진실성을 보장하기 위해 동원하는 사진 이미지를 오히려 문자 텍스트로 설명하고 분명히 하라는 역설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해독에 이의가 있을 수 없으며, 언제나 명확한 진실을 담보한다고 공중들이 믿는 사진을 애매모호한 이중성, 확정할 수 없는 다의성에 노출시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진 적 의미의 가변성과 유동성을 코믹하게 그리고 황당하게 시험하였던 것이다.”

파야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비정상적인 장면을 사진으로 보여준 다음 거기에 대해 관객들이 문제를 풀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사진의 상황만큼이나 문제도 부조리 하다. 하지만 작가가 의도 했던 것은 어떤 정해진 정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사진은 진실을 드러내고 어떠한 사실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되지만, 사실 사진은 진실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그 누구든 그 사진을 보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그 각자에게 진실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사과가 있지만 그 사과를 보는 사람이 다섯이면 그 다섯 사람 각각의 마음속에는 다섯 개의 다른 사과가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의 상황, 대상을 보고도 각자 다르게 생각함으로 사진이 드러내는 하나의 진실이란 것은 애초에 없다는 것이다.

“사진을 본다. 유심히 본다. 문제를 내어본다. 답도 내어본다. 내가 풀어본다. 옆 사람도 풀어본다. 어떤 사람은 모른단다. 어떤 사람은 답이 1번이란다. 어떤 사람은 답은 3번이란다. 모두가 정답이다. 문제를 풀고 있는 자기가 정답이다. 내가 생각하고 만든 사진 앞 에서 내 자신도 답을 풀어 본다. 또 100점이다.”



 

. 결론

- 과연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사진의 진실의 조건에 대해 알아보았다. 사람들은 진실을 알기 위해, 자신의 감각, 지각 기관을 뛰어넘는 기계적인 확신을 얻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본다. 범죄 현장에서 증거물로 사진을 찍으며 내가 나임을 타인에게 증명하기 위해 신분증에 내 사진을 붙이고 다닌다. 신문에 실린 사건 현장의 보도사진을 보며 사람들은 그 사건의 진상을 목격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의심하기도 하지만 사진으로 찍힌 잔상은 사실이라고 믿는다. 사진은, 사진기는 있는 그대로를 기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진정한 사진적 자료에는 ‘세상을 충실해 보고 한다’는 어떤 원칙적인 합의가 있었다. 바로 이러한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서 우리는 사진을 진실을 드러내는 도구라고 쉽게 생각해 왔다. 사진은 인간의 의도에 의해서가 아닌 기계적인 진행 방식으로 인해 대상을 기록하여,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 준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런 믿음 아래서 사진은 분명히 대상에 대한 의존성을 가지고 있고 명증성을 보임으로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고 할 때, 이 사진은 훌륭한 인식의 도구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또 그런 반면에 사진의 불확실성을 증명하여 사진이 진실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하려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이 보기엔 사진에는 진실이 담겨있지 않으며, 애초에 그런 능력이 카메라에는 없다고 말한다. 사진이 발명 되었을 때 객관적인 묘사의 능력으로 인해 각광 받았으나, 기계적으로 이미지를 복제해내는 장치인 사진 그 자체는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며(아무 의미 없는 순간이나, 대상을 사진으로 찍는 일은 거의 없다) 의도를 가지고 그 의미를 왜곡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주석

1) 박영선, 「존재, 진리, 사진」, 한국 사진이론의 지형, 홍디자인, (2000) p.104, 115, 116

2) 이영준, 「사진이론의 상상력」8. 존 탁, 역사의 연필-사진, 증거, 역사의 문제, 눈빛 출판사, 2006,  P90, 91

3) 이영준, op.cit, <3. 빅터 버긴, “사진을 바라본다는 것” - 사진의 시각적 구성> p.44

4) 이영준, op.cit, <5. 존 탁, “사진과 권력: 감시의 수단, 법적 증거로서의 사진” - 사진, 진실, 규율권력> p.64

5) 이영준, op.cit, <2. 스튜어트 홀, “뉴스사진의 결정” - 사진적 코드와 이데올로기> p.35 p38

6) 왜곡·연출 관행 여전한 포토저널리즘의 현실, 프레시안 사회면, 2008.10.27 (월) 오전 11:06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81027104921&section=03

7) 이영준, op.cit, <1. 롤랑 바르트, “이미지의 수사”> p. 29

8) 필립뒤바, 「사진적 행위」, 이경률 옮김, 사진마실, 2005

9) 샤를르 보들레르, 「근대대중과 사진」, 1895

10) 앙드레 바쟁, 「사진 영상의 존재론」, 1945

11) 앙드레 바쟁 op.cit

12) 알랭 베르갈라, 「진자」, 1976

13) 알렌 세큘라, 「사진적 의미의 발명에 관하여」, 1981

14) 롤랑바르트, 밝은 방-사진에 관한 개념, 1980, p.119 

15) p.20 도판 참조

16) p.21 도판 참조

17) 이영준, 이미지 비평, 눈빛, 2004

18) p.22 도판 참조 

19) MJ 겔러리 전시서문, Nature-Imagine 사진비엔날레. 2008

20) p.23, 24 도판 참조

21) 파야 홈페이지 작업노트 http://www.pa-ya.com/

22) 파야 홈페이지 작업노트



* 참고문헌

-
이영준, 사진이론의 상상력, 눈빛 출판사, 2006,
-이영준, 이미지 비평, 눈빛출판사, 2004
-롤랑바르트, 밝은 방-사진에 대한 노트,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필립뒤바, 사진적 행위, 이경률 옮김, 사진마실, 2005
-김승곤 9, 한국 사진이론의 지형, 홍디자인, 2000
-빌렘 플루서,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윤종석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1999
-왜곡·연출 관행 여전한 포토저널리즘의 현실, 프레시안 사회면, 2008.10.27 (월) 오전 11:06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81027104921&section=03
-한국현대사진 60년 전시 도록
-http://www.pa-ya.com/ 파야 홈페이지 작업노트



*도판
-성능경의 <특정인과 관련 없음>, 1977
한국현대사진 60년, 1948-2008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도록, p.11

-이선민의 <Livinging : 여자의 집 I> 
이영숙의 집 : 추석 풍경, 2004
한국현대사진 op.cit, p.245
서상석의 집 : 생신 풍경, 2004
한국현대사진 op.cit, p.246

-구성연의 <팝콘 시리즈>, 2007,
한국현대사진 op.cit, p.170, 171
 
-파야의 <Comedy &Enigma Q/A Project>, 2008
            <Comedy &Enigma Q/A Project>, 2008
파야 홈페이지, http://js0812.cafe24.com/bbs/zboard.php?id=c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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