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의 문화산업 비판을 통해서 본 

현재 한국 대중 문화산업

 

강대웅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쓴 "계몽의 변증법"에서는 대중문화, 즉 문화산업에 대해 비판한다. 이들이 보기에 대중문화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문제가 있으며, 그 잘못된 방식은 잘못된 사회구조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가장 큰 축을 이루는 텔레비전과 신문과 같은 매체는 일반 대중들의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대중문화는 사람들의 인식과 사고방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문화 속에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독이 숨겨져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독에 조금씩 조금씩 중독되어 가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눈과 귀를 가리고 안보고 안 들으면 그만인가? 이제 우리는 아도르노의 대중문화 비판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지금 현재 한국 대중문화에도 아도르노가 비판한 점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는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우선 이러한 아도르노의 문화 사업 비판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중문화는 모든 것을 동일화시키고, 하나의 일면적 체계를 만든다.

2. 대중문화는 자본의 독점에 지배당하고, 대중문화는 하나의 장사일 뿐이다.

3. 대중문화는 대중들에게 허위욕구를 자극시키고, 그것을 교묘하게 유포시킨다.

4. 대중문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중문화의 생산방식을 변호하기 위해서 이야     기하는 기술적 합리성이란, 지배자체의 합리성에 불과하다.

5. 대중문화는 주체의 자발적 참여를 방해한다.

6. 대중문화란, 문화가 아니라, 단지 양식화된 야만에 불과하다.

7. 대중문화는 지배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그것에 대중들이 무비판적으로 순     응하도록 만든다.

 

위의 아도르노의 대중문화 비판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심각한 문제가 <7. 대중문화는 지배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그것에 대중들이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도록 만든다>가 아닐까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자본과 권력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노동자들은 그 스스로 사회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틀 안에서 커다란 시스템(이를테면 기계)의 한 부품이 되어 자신의 노동력과 시간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이 사물화, 대상화 된 사회 안에서 노동자는 스스로 자신의 일과 사회 전체를 조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 전체에 대한 조망과 이 사회 안에서의 나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고민은 누가해 주는가? 그러한 고민은 대중문화가 대신 해준다. 노동자들은 일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가정으로 돌아가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을 보면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혹은 뉴스를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오락 프로그램을 보면 자연히 스스로 자신의 일과 사회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뉴스를 본다고 하는 것도 사실은 그들에 의해 선택되어진 사건을,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석된 것으로 전달받을 다름이다.

 

즉 이러한 대중문화는 결국 자본과 권력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고, 그 안에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들, 즉 실질적인 권력 소유자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은 배제된다.

 

한국 사회의 예를 통해서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 사회 속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우선 권력의 메스미디어 장악 시도문제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 3월 당선된 이후 우선 우리나라 방송 전체를 감독하는 방송통신위원회의 위원장에 동아일보 정치 부장이었던 최시중을 앉혔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는 방송은 방송 통신위원회로부터 징계를 당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광우병 논란이 일어났던 MBC PD수첩과, 이명박 정부로부터 미움을 샀던 시사투나잇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국영 방송인 KBS를 장악하기 위해서 정연주 KBS사장을 해임했다. 그리고 KBS 이사회는 친정부계 이사들만 참석한 가운데 8 25, 이병순 KBS 비즈니스 사장을 사장으로 앉혔다. 이는 국영 방송의 사장을 자신의 사람으로 둠으로써 정부와 자신들이 진행하는 정책에 대한 비판을 애초에 불식시키고 대중매체를 통한 여론조작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KBS 사장이 교체된 후, 그 동안 이명박 대통령에게 미운털이 박힌 사람들이 차례로 제거되었다.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이명박 정부에 비판적이던 가수 윤도현씨가 진행하던 윤도현의 러브레터가 폐지되었고,  KBS 심야토론의 진행자이며 KBS 1라디오에서도 토론프로그램을 진행해온 정관용씨가 퇴출되었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비판적인 기사를 쓴 프레시안의 이사라는 이유로 미운털이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타겟은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의 잘못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해온 프로인 생방송 시사투나잇과 미디어 포커스로, 시사투나잇은 한 해 65억원을 벌어들이는 알짜배기 시사프로그램이었고미디어포커스는 교양프로그램 중 시청률 2위를 자랑하는 인기프로였지만 역시 폐지되었다.

이명박의 대중 매체 장악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YTN 사장마저 자신의 사람으로 교체한다. YTN은 우리나라 최초의 24시간 뉴스채널로 공중파 방송은 아니지만 뉴스매체로서의 중요성과 영향력이 상당한 방송이었으며 특히 돌발영상이란 프로그램으로 정치의 잘못과 정치인들의 실정을 꼬집어 내서 일반 대중들에게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여왔다. 하지만 이러한 방송의 사장에 작년 대선 이명박 캠프의 방송특보로 활동했던 구본홍씨를 앉힌 것이다. YTN 노조는 물론이고 사회 각계와 시민단체들도 YTN 사장 교체를 막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주주총회는 40초만에 날치기 통과로 사장을 교체시켜버렸다. 그 직후 YTN 최고의 인기프로그램이었던 돌발영상도 폐지되었다. 이는 정부를 비난하는 어떠한 방송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권력이 자신의 비위에 맞지 않는 모든 언론을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는 상반되게도 지난 815, 이명박 대통령은 특별 사면을 시행해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중앙일보 송필호 사장, 동아일보 김학준 사장의 형을 취소시켰다. 자신을 성공한 기업가의 이미지로 경제 대통령으로 미화시키고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당선을 도운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에 대한 보답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정부의 언론을 통한 대중문화 전반을 장악하려는 시도 중에서도 가장 가슴에 아픈 것은 시민방송 RTV에 대한 제정지원을 끊음으로서 스스로 말라 죽게 만든것이다. 시민방송 RTV는 퍼블릭 엑세스 전문 케이블 방송이다. 퍼블릭 엑세스란 거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방송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 직접 기획하고 취재 하여 뉴스와, 직접 찍은 영상을 방영하는 방송을 통해서 시민이 주인이 되어 시민이 만들고 시민이 보는 대안 방송을 뜻한다. 그리고 시민방송 RTV는 이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방송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 때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이 케이블 방송에 대한 지원을 끊기로 결정했다. 자본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방송이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만드는 방송이기 때문에 이러한 지원이 끊어진다는 것은, 곧 방송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은 목소리가 크게 울릴 수 있고, 옳은 목소리가 넓게 퍼지는 것, 다양성이 존중되고 모두 다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면, 지금의 정부가 원하는 사회는 자신들이 원하는 하나의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사회인 것이다.

 

이렇듯 자본과 권력에 의해 방송과 대중문화가 잠식되어간다면 창조적이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문화가 대중들 곁으로 전달되어 지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 질 것이며, 결국 방송은 획일화 ·양산화 되어 공급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내용은 필연적으로 정형화되고 경직된 사고와 행동을 낳을 우려가 있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지배의 메커니즘에 대한 극복의 희망을 예술에서 찾고 있다. 진정한 예술만이 관리되는 사회에 함몰되지 않고, 그 대척점에서 이 사회의 새로운 야만을 증언하고 대안의 세계를 꿈꾸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예술 중에서도 모더니즘 예술이 이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모더니즘 예술은 본성상 현존 사회에 대한 강한 부정과 저항의 정신을 띤다. 그리고 쉽게 관리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형식 실험을 행한다. 이러한 아방가르드 예술은 문화에 충격을 주어서 그 충격으로 사람들을 각성시킬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동일성 문화에 균열을 주고자 한다.

 

하지만 아도르노가 생각한 대안이 과연 우리 현실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금 이명박 정부는 박장히, 전두환 대통령 시절의 땡박, 땡전 뉴스를 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국민들의 의식이 이전과 다르고,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공유는 그들이 원하는 데로 통제되기 힘들기 때문에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를 막지는 못 할 것이다하지만 그들의 방식도 이전보다 은밀하고 치밀하게 진행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관리되는 사회에 함몰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사회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아방가르드 적인 예술이 아닌, 권력과 자본에 대한  강한 부정과 저항(아방가르드적인)을 담은 직접적인 행동들이 끊임없이 행해져야한다. 인터넷을 거점으로 한 대안 미디어 활동이 그 예일 것이며, 촛불을 통해 경험한 토론과 광장의 경험을 잘 살려 나가는 것 또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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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2008년 6월의 매일같이 이어지던 촛불시위의 평범한 날 중 한날일 뿐이었다.
시위대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고, 진압 병력들도 특별히 무리해서 작전을 펼치지 않았다.
어떻게 본다면 평화로운 시위 현장이었다.  
하지만 현장에 나와서 취재하는 기자들은 흡사 종군 기자, 혹은 분쟁지역 취재 기자들 처럼 보였다.
그들은 머리에 PRESS가 쓰여진 핼맷을 쓰고 있었고, 그 핼맷은 그들의 머리 그 이상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기자라는 신분을 핼맷으로 보여주면서, 이들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시위대와 전경 사이를 이리 저리 비집고 다니며 활발하고 안전하게 누빌 수 있었다.
누가 맨 처음 머리에 보호 장구를 차고 취재를 하러 나올 생각을 했을까?
이곳을 분쟁지역, 혹은 전쟁터로 인식한 외신 기자들이었을까?
조선 중앙 동아일보는 촛불 집회의 과격한 시위자들로 인해 전경들이 다치고 도로가 마비된다는 기사를 썻고, 경향과 한겨레등은 전경의 과잉 진압과 경찰 지도부의 무리한 작전에 대한 기사를 썻다.
그렇다면 조선 중앙 동아 일보의 가자들은 시위대의 폭력으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핼맷을 쓰고, 경향과 한겨레의 기자들은 전경의 폭력으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핼맷을 쓴 것일까?

전경들에 의해 일반 시민들은 다리가 묶여있지만, 기자들은 하얀 핼맷의 PRESS를 PASS 삼아서 이러 저리 분주히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시위자들이 PRESS 스티커를 붙인 핼맷을 쓰고 시위에 참가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렇게 하면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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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월 6월 촛불 집회. 나는 그 자리에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고작 보급형 DSLR을 들고 있었지만, 나는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전경과 시민들의 사이를 제약 없이 오갈 수 있었다.
카메라가 나의 신분을 기자 쯤으로 인식하게 한것 같았다.
시위를 하러 거리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사람, 즉 보도가 아닌 도로 위에 있는 사람 중에 나처럼 자유롭게 전경과 시위대 사이를 마음데로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사실 내가 카메라를 가지고 시위 현장에 나간 이유는, 카메라를 가지고 있으면 왠지 전경들이 안때릴것 같아서 였다.
그리고 역시나 나는 한대도 안맞았다. 다음엔 HD 방송용 카메라를 들고 다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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