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의 문화산업 비판을 통해서 본 

현재 한국 대중 문화산업

 

강대웅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쓴 "계몽의 변증법"에서는 대중문화, 즉 문화산업에 대해 비판한다. 이들이 보기에 대중문화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문제가 있으며, 그 잘못된 방식은 잘못된 사회구조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가장 큰 축을 이루는 텔레비전과 신문과 같은 매체는 일반 대중들의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대중문화는 사람들의 인식과 사고방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문화 속에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독이 숨겨져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독에 조금씩 조금씩 중독되어 가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눈과 귀를 가리고 안보고 안 들으면 그만인가? 이제 우리는 아도르노의 대중문화 비판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지금 현재 한국 대중문화에도 아도르노가 비판한 점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는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우선 이러한 아도르노의 문화 사업 비판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중문화는 모든 것을 동일화시키고, 하나의 일면적 체계를 만든다.

2. 대중문화는 자본의 독점에 지배당하고, 대중문화는 하나의 장사일 뿐이다.

3. 대중문화는 대중들에게 허위욕구를 자극시키고, 그것을 교묘하게 유포시킨다.

4. 대중문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중문화의 생산방식을 변호하기 위해서 이야     기하는 기술적 합리성이란, 지배자체의 합리성에 불과하다.

5. 대중문화는 주체의 자발적 참여를 방해한다.

6. 대중문화란, 문화가 아니라, 단지 양식화된 야만에 불과하다.

7. 대중문화는 지배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그것에 대중들이 무비판적으로 순     응하도록 만든다.

 

위의 아도르노의 대중문화 비판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심각한 문제가 <7. 대중문화는 지배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그것에 대중들이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도록 만든다>가 아닐까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자본과 권력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노동자들은 그 스스로 사회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틀 안에서 커다란 시스템(이를테면 기계)의 한 부품이 되어 자신의 노동력과 시간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이 사물화, 대상화 된 사회 안에서 노동자는 스스로 자신의 일과 사회 전체를 조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 전체에 대한 조망과 이 사회 안에서의 나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고민은 누가해 주는가? 그러한 고민은 대중문화가 대신 해준다. 노동자들은 일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가정으로 돌아가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을 보면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혹은 뉴스를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오락 프로그램을 보면 자연히 스스로 자신의 일과 사회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뉴스를 본다고 하는 것도 사실은 그들에 의해 선택되어진 사건을,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석된 것으로 전달받을 다름이다.

 

즉 이러한 대중문화는 결국 자본과 권력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고, 그 안에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들, 즉 실질적인 권력 소유자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은 배제된다.

 

한국 사회의 예를 통해서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 사회 속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우선 권력의 메스미디어 장악 시도문제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 3월 당선된 이후 우선 우리나라 방송 전체를 감독하는 방송통신위원회의 위원장에 동아일보 정치 부장이었던 최시중을 앉혔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는 방송은 방송 통신위원회로부터 징계를 당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광우병 논란이 일어났던 MBC PD수첩과, 이명박 정부로부터 미움을 샀던 시사투나잇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국영 방송인 KBS를 장악하기 위해서 정연주 KBS사장을 해임했다. 그리고 KBS 이사회는 친정부계 이사들만 참석한 가운데 8 25, 이병순 KBS 비즈니스 사장을 사장으로 앉혔다. 이는 국영 방송의 사장을 자신의 사람으로 둠으로써 정부와 자신들이 진행하는 정책에 대한 비판을 애초에 불식시키고 대중매체를 통한 여론조작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KBS 사장이 교체된 후, 그 동안 이명박 대통령에게 미운털이 박힌 사람들이 차례로 제거되었다.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이명박 정부에 비판적이던 가수 윤도현씨가 진행하던 윤도현의 러브레터가 폐지되었고,  KBS 심야토론의 진행자이며 KBS 1라디오에서도 토론프로그램을 진행해온 정관용씨가 퇴출되었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비판적인 기사를 쓴 프레시안의 이사라는 이유로 미운털이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타겟은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의 잘못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해온 프로인 생방송 시사투나잇과 미디어 포커스로, 시사투나잇은 한 해 65억원을 벌어들이는 알짜배기 시사프로그램이었고미디어포커스는 교양프로그램 중 시청률 2위를 자랑하는 인기프로였지만 역시 폐지되었다.

이명박의 대중 매체 장악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YTN 사장마저 자신의 사람으로 교체한다. YTN은 우리나라 최초의 24시간 뉴스채널로 공중파 방송은 아니지만 뉴스매체로서의 중요성과 영향력이 상당한 방송이었으며 특히 돌발영상이란 프로그램으로 정치의 잘못과 정치인들의 실정을 꼬집어 내서 일반 대중들에게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여왔다. 하지만 이러한 방송의 사장에 작년 대선 이명박 캠프의 방송특보로 활동했던 구본홍씨를 앉힌 것이다. YTN 노조는 물론이고 사회 각계와 시민단체들도 YTN 사장 교체를 막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주주총회는 40초만에 날치기 통과로 사장을 교체시켜버렸다. 그 직후 YTN 최고의 인기프로그램이었던 돌발영상도 폐지되었다. 이는 정부를 비난하는 어떠한 방송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권력이 자신의 비위에 맞지 않는 모든 언론을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는 상반되게도 지난 815, 이명박 대통령은 특별 사면을 시행해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중앙일보 송필호 사장, 동아일보 김학준 사장의 형을 취소시켰다. 자신을 성공한 기업가의 이미지로 경제 대통령으로 미화시키고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당선을 도운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에 대한 보답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정부의 언론을 통한 대중문화 전반을 장악하려는 시도 중에서도 가장 가슴에 아픈 것은 시민방송 RTV에 대한 제정지원을 끊음으로서 스스로 말라 죽게 만든것이다. 시민방송 RTV는 퍼블릭 엑세스 전문 케이블 방송이다. 퍼블릭 엑세스란 거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방송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 직접 기획하고 취재 하여 뉴스와, 직접 찍은 영상을 방영하는 방송을 통해서 시민이 주인이 되어 시민이 만들고 시민이 보는 대안 방송을 뜻한다. 그리고 시민방송 RTV는 이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방송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 때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이 케이블 방송에 대한 지원을 끊기로 결정했다. 자본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방송이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만드는 방송이기 때문에 이러한 지원이 끊어진다는 것은, 곧 방송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은 목소리가 크게 울릴 수 있고, 옳은 목소리가 넓게 퍼지는 것, 다양성이 존중되고 모두 다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면, 지금의 정부가 원하는 사회는 자신들이 원하는 하나의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사회인 것이다.

 

이렇듯 자본과 권력에 의해 방송과 대중문화가 잠식되어간다면 창조적이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문화가 대중들 곁으로 전달되어 지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 질 것이며, 결국 방송은 획일화 ·양산화 되어 공급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내용은 필연적으로 정형화되고 경직된 사고와 행동을 낳을 우려가 있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지배의 메커니즘에 대한 극복의 희망을 예술에서 찾고 있다. 진정한 예술만이 관리되는 사회에 함몰되지 않고, 그 대척점에서 이 사회의 새로운 야만을 증언하고 대안의 세계를 꿈꾸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예술 중에서도 모더니즘 예술이 이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모더니즘 예술은 본성상 현존 사회에 대한 강한 부정과 저항의 정신을 띤다. 그리고 쉽게 관리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형식 실험을 행한다. 이러한 아방가르드 예술은 문화에 충격을 주어서 그 충격으로 사람들을 각성시킬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동일성 문화에 균열을 주고자 한다.

 

하지만 아도르노가 생각한 대안이 과연 우리 현실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금 이명박 정부는 박장히, 전두환 대통령 시절의 땡박, 땡전 뉴스를 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국민들의 의식이 이전과 다르고,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공유는 그들이 원하는 데로 통제되기 힘들기 때문에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를 막지는 못 할 것이다하지만 그들의 방식도 이전보다 은밀하고 치밀하게 진행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관리되는 사회에 함몰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사회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아방가르드 적인 예술이 아닌, 권력과 자본에 대한  강한 부정과 저항(아방가르드적인)을 담은 직접적인 행동들이 끊임없이 행해져야한다. 인터넷을 거점으로 한 대안 미디어 활동이 그 예일 것이며, 촛불을 통해 경험한 토론과 광장의 경험을 잘 살려 나가는 것 또한 방법일 것이다.    

 

 

 

 


:

리차드 로티

Richard Rorty

 

강 대 웅 

 

                                                

목차 

1. 생애

2. 프래그머티즘 전통과 로티

  2-1. 프래그머티즘이란?

  2-2. 프래그머티즘과 네오프래그머티즘

3. 로티의 네오프래그머티즘 - 반표상주의

  3-1. 인식론적 기초주의 비판

  3-2. 인식론적 행동주의

4. 전체론적 언어관

5. 자문화중심주의와 연대성

  5-1 자문화중심주의

  5-2 대화, 연대성,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1. 생애

로티는 1931년 미국에서 태어나 시카고 대학을 졸업하고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로티는 분석철학이 강한 프린스턴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직에 있다가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한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발표한 이후, 1982년부터 버지니아대학, 1998년 이후 스탠포드 대학으로 옮겨서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75세 되던 2007 6 8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프린스턴 대학 시절인 초기에는 전형적인 분석철학자였던 그는, 분석철학과 결별하고 프래그머티즘의 부활을 외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 작업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로티는 자신의 성장 환경과 지적 여정을 <트로츠키와 야생란>이란 제목의 자서전으로 발간  하였는데, 이 책에는 그가 분석철학에서 네오프래그머티즘으로 전향을 한 이유에 대해 직접 서술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는 15세에 플라톤을 읽고 20세까지 플라톤주의자가 되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모든 철학자들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원리에 기초하고 있으며, 플라톤이 말하는 초월적인 진리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고 회의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으면서 역사성에 눈을 뜨게 되고, 그러한 헤겔의 교훈을 체득한 철학자로서 듀이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데리다를 통해 하이데거를 접하게 되고, 다시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듀이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데카르트주의 비판에 충격을 받아 집필한 책이 바로 <철학과 자연의 거울>이라고 쓰고 있다.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로티는 인식론, 분석철학, 형이상학 등을 포함한 모든 체계적인 철학의 종언을 고했다

    

로티의 철학적 입장은 네오프래그머티즘, 인식론적 행동주의, 탈 근대시민 자본주의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그의 관심은 세세한 철학적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메타 철학적인 물음이었다. 그는 기존의 철학이 갈수록 전문화, 세분화, 지역화 되어 세상과 담을 더욱 높게 쌓고 있으며, 특히 분석 철학자들이 형식 논리학과 과학적 엄밀성이라는 틀에 사로잡혀서 스스로를 세상과 소외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로티는 이러한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는 자문화 중심주의에 입각해서 실천적인 대화를 지속해 나간다면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프래그머티즘 전통과 로티

 2-1. 프래그머티즘이란?

프래그머티즘은 한국에서 주로 실용주의라고 번역된다. 1870년대에 C.S.퍼스에 의해 주장되었고 19세기 말에 W.제임스에 의해 전 세계에 퍼졌으며 20세기 전반(前半)에 와서 G.H.미드와 J.듀이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프래그머티즘은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관점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형이상학적인 여러 장치들을 벗어버릴 것을 요구하는 사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연히 일상적인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이 중시된다. 곧 인간 중심의 철학적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2-2. 프래그머티즘과 네오프래그머티즘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을 계승, 부활시킨 로티는 자신의 프래그머티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프래그머티즘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규정은 그것이 ‘진리’ ‘지식’ ‘언어’ ‘도덕’ 등등의 개념과 같은 철학적 이론화의 대상에 적용된 반본질주의라는 것이다. 이것은 ‘참된 것’ 이란 ‘믿기에 좋은 것’이라고 하는 제임스의 정의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제임스의 요점은 진리란 본질을 갖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프래그머티즘에 대한 두 번째 규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당위적인 것에 대한 진리와 존재에 관한 진리 사이에는 어떤 인식론적 차이도 없고, 사실과 가치 사이에는 어떤 형이상학적 차이도 없으며, 도덕과 과학 사이에는 어떤 방법론적 차이도 없다. (중략)

프래그머티즘에 대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규정은 다음과 같다: 프래그머티즘은 대화적인 것 이외에는 탐구에 있어서 어떤 제약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 대상, 마음, 언어 등의 본성에서 나오는 전반적인 제약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동료 탐구자의 언급에 의해 제기되는 소소한 제약만이 있을 뿐이다. 

반본질주의, 사실과 가치의 통합, 반형이상학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러한 규정은 로티가 대부분 제임스와 듀이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내린 프래그머티즘의 성격 규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로티의 기본적인 철학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3. 로티의 네오프래그머티즘 - 반표상주의

 3-1. 인식론적 기초주의 비판

로티의 네오프래그머티즘이 갖는 철학적 특징은 ‘반표상주의’ 이다. 그리고 이것은 넓은 의미의 반플라톤주의 이다. 여기서 말하는 플라톤주의란 그의 이데아론에서 전개된 이원론적 세계관을 뜻한다. 진리의 세계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존재한다고 하는 플라톤의 관점은 서양철학의 역사를 지배하는 관점인데 로티는 이를 비판하는 것이다.

현상

본질

억견

진지

우연

필연

상대적인 것

절대적인 것

생성, 소멸, 변화

영원, 불멸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

 영속적인 것

오른쪽에 해당되는 것이 반표상주의가 부정하는 것이다. 반표상주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플라톤이 말하는 영원불멸 하며 궁극적인 진리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입장을 거부한다. 로티는 플라톤주의의 전통이 근대 인식론과 현대의 언어 분석철학 속에 계승되어 내려온다고 하는 관점에서 철학사를 바라보고 있다. 근대인식론자들의 ‘오성’ 개념과 현대 분석철학에서의 ‘언어’가 그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으며, 로티의 일차적인 작업은 그런 개념들 속에 숨어있는 표상주의적 관점을 드러내고 그것이 절대적인 근거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근대인식론의 표상주의 및 인식론적 기초주의의 입장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한다.

표상주의란 진리 인식의 주체인 주관과 인식 대상인 객관을 이원론적으로 전제한다. 이런 이원론적인 대립구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명제이다. 데카르트가 이 명제를 통해서 말하고자 한 것은 물리적인 세계와 독립해서 존재하고 사유하는 정신의 실재이다.

데카르트가 마음이라는 비물리적인 실재를 ‘발명’해낸 것은 그가 우리 지식의 확실한 기초를 찾아서 그 위에 모든 지식의 체계를 다시 엄밀하게 세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식의 궁극적인 기초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 인식론적 기초주의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 지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 줄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경험론자인 로크나 독일 관념론의 주창자인 칸트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모두 인식론적 기초주의의 틀 안에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리차드 번슈타인은 철학자들이 지식의 기초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것을 ‘데카르트적 불안’ 이라고 표현했다.

데카르트의 ‘마음’의 발명이나 로크와 칸트의 정합적이지 못한 인식론적 설명들이 모두 ‘거울 메타포’를 이용해서 인간의 지식을 설명해 보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식에 대한 이러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로티의 관심은 전통적인 로고스 중심주의적 사고를 해체하고, 모든 인식론적인 이분법적 사고의 틀(기초주의와 반 기초주의, 실재론과 반실재론, 주관과 객관 등)을 허물어뜨리고, 그리고 이러한 데카르트적 불안에서 이제는 우리가 벗어나 지식의 확실한 기초를 찾는 일에 연연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3-2. 인식론적 행동주의

표상주의의 기본적인 전제는 이원론적인 태도이다. 첫째로 주객이원론(혹은 심신이원론)은 객관적인 진리와 그것을 표상할 수 있는 주관적인 인식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둘째 본질과 형상의 이원론이다. 주객이원론에서 전제된 저 바깥에 있는 객관의 본질이 바로 진리의 원천이 된다.

로티의 반표상주의는 이러한 표상주의들의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진리의 정당화 문제에 있어서 특권적인 지위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의 문제는 사실상 오늘에도 심리철학의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데카르트가 마음이라는 것이 비 물리적인 실재로서 존재한다고 한 이래로 철학자들은 인간의 마음만이 갖는 속성이 무엇인지를 연구해 왔다. 예를 들어 고통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은 철학자들이 신체가 느끼는 고통의 감각과는 별개로 마음이 느끼는 고통의 감각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그것이 신체와 별개로 마음이 존재하는 증거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로티는 ‘제거적 유물론’ 으로 이를 부정한다. 그런 심리적 사건으로서의 고통의 감각이라는 개념이 사실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로티는 악령이 병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원시부족의 예를 든다. 이 원시 부족에게는 배가 아픈 것이 곧 악령의 증거였다. 하지만 현대에는 배가 아프면 악령이 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의학의 발달로 여러 가지 병원균의 이름이 그 악령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시대적인 맥락에 따라서 변하거나 사라진다고 하는 것이다.

로티는 심리적인 사건으로서의 감각과 관련된 단어도 마찬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오늘날 우리가 복통과 악령을 연결시키지 않고도 살 수 있듯이, 심리적인 사건을 나타내는 감각이라는 단어를 제거하더라도 우리가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 사람들은 복통을 일으킨 사람을 통해서 악령을 보았을 것이다. 악령이란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관찰명사’ 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악령을 보는 사람은 없다. 로티는 소위 우리가 관찰명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개 이런 식으로 사라질 수도 있는 단어들이라고 본다. 그리고 감각이라는 것은 관찰명제임으로 이런 식으로 우리 언어 습관에서 마음에 관한 언명들을 제거할 경우 우리에게 남는 것은 우리의 두뇌 작용과 관련한 생리학적 언명들일 것이다. 로티는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예로 안티포디안의 예를 들고 있다.

안티포디안은 지구와 동일한 언어, 생활, 환경, 기술, 철학을 가진 또 하나의 지구이다. 하지만 이 별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와 딱 하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역사에는 데카르트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마음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주관과 객관의 문제, 마음과 물질의 문제 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 이들은 고통의 느낌을 신경섬유의 자극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아기가 뜨거운 난로로 향할 때 엄마는 “아기의 C-섬유가 자극받겠어요” 라고 말한다. 안티포비안에게 있어서는 모든 감각이 마음에 의한 주관적인 표상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번호가 매겨진 신경섬유에 자극이 오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묘사를 통해서 로티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원론자들의 현상/실재의 구분이 반드시 주관적 표상과 객관적 사태에 관한 것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신경섬유의 자극을 통해서도 현상적인 표현은 가능하다

여기서 로티가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정신적 실체가 존재한다고 하는 생각과 그 생각에서 비롯되는 자아와 세계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그림이지, 마음에 관한 우리의 상식적인 어휘 전부를 부정하고, 이를 인위적으로 없애거나 그러한 언어를 대치할 인공언어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로티가 생각하는 자아는 데카르트식의 비물질적인 이성적 주체가 아니라 신체의 윤곽으로 제한된 개별적인 인간을 일컫는다. 이러한 자아의 실재를 이루는 것은 인간 행위의 내적 원인으로서 호르몬, 양성자, 신경섬유, 신념, 욕망, 질병, 다중인격 등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항목들을 포함한다. 한편, 세계는 이러한 신체적인 윤곽의 경계 안에 제한된 개별적인 인간을 둘러싼 나머지 부분이다.

이러한 모델에서 제시되는 자아의 모습은 심리상태에 대한 정신적 기술과 신체 상태에 대한 물리적 기술을 통해 동등하게 서술되는 것이다. 자아를 이렇게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심리 상태와 신체 상태를 두 개의 존재 영역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실재의 두 상태로 보기 때문이다. 자아를 심리 상태와 신체 상태로 표현하는 것은 단지 언어 학습의 결과(습관) 이다.

 

그렇다면 참과 거짓을 구별해 줄 판단 근거로서의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로티는 지식이 철저하게 명제와 명제간의 관계에서 성립한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지식의 정당화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즉 신념의 옳고 그름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 과정에서 판가름 나는 것이다. 우리는 대상의 세계에서 본질을 발견함으로써 진리를 인식한다고 할 수는 없다. 세계는 우리에게 신념과 욕망을 제공하는 원인일 뿐이고 그 신념과 욕망이 올바른가 아니면 추구하기에 합당한 것인가를 결정해주는 것은 나의 대화 상대자들인 주변의 동료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올바른 실천의 기준이 사회적인 합의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은 사회 전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경우 그것을 비판할 기준이 없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는다. 나치의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한 것이 아닐까 한다.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담론의 힘은 우리가 어느 것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기준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 충분한 전거를 이미 가지고 있다.

, 공동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실천적인 노력은 대화를 요구하며, 이런 대화를 통해서 궁극적인 기준에 도달할 수는 없겠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4. 전체론적 언어관

로티는 그의 저서인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철학은 자연의 거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지식이나 언어, 이성 등이 세계의 참모습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라는 발상은 양자 간을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인식의 투명성이 보장될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로티는 이를 부정한다. 특히 인식의 주관을 형성하는 언어는 인간이 창안해 낸 방법적인 언어의 기술과 또한 해석의 꾸러미로서 투명할 수가 없으며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피부 바깥으로 나갈 수 없듯이 우리는 언어의 세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이러한 로티의 관점에서는 해석되지 않은 것이란 있을 수 없다. 또한 실재론자들이 주장하는 언어적 해석을 거치지 않은 선험적 인식이라는 것도 성립될 수가 없다. 로티에 의하면, 언어적 해석을 뛰어넘어서 언어와 상응 관계에 놓여 있는 실재나 자연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런 것들은 모두 언어적 해석을 행하는 맥락에서 문제의 대상으로 파악될 때에야 비로소 대상화될 뿐이다. 게다가 언어의 의미는 결국 사회적 정당화의 절차를 거쳐 통용되는 것이므로, 언어란 ‘사회적 실행’이다. 언어세계는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체계 없이 변화하는 우연성을 가지며 언어의 우연성은 언어 해석의 여지가 무한히 열려 있다는 언어의 개방성과 관련이 있다.

 로티의 전체론적 언어철학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로 표현되는 언어와 생활세계 사이의 관계론으로부터 비롯된다. 네오 프래그머티즘의 특징은 모든 개별적인 언어놀이를 생활세계의 맥락으로 고집한다는데 있다. 결국 로티는 우리가 어떤 언어놀이를 할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언어문화 속에 태어나지고, 그 언어를 말하는 가운데 그 문화를 활성화한다. 우리는 그 문화에 불가분하게 구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것의 보존에 기여한다. 심지어 우리는 외국어로 말할 때에도 우리 자신의 문화를 배경으로 해서 말과 관용구를 선택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장기에서 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전반적인 게임을 이해해야만 하듯이, 언어란 어떠한 규칙들, 즉 언어에 있어서 단어들의 다양한 용법을 모두 규제하는 규칙들에 의해서 정의되는 일련의 활동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규칙’이란 어떤 특정 규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형태를 전제로 하는 관습, 습관 그 자체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와 삶의 형태가 다른 존재와는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삶의 형태의 일치가 실천을 통해 확인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우리의 실제 행동을 위한 기준을 구성하는 것은 규칙 사용의 인간 관행이고, 규칙을 사용하는 이런 방식을 옹호하기 위한 정당화나 비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로티의 요점은 우리는 자유롭게 다른 언어를 택하여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언어의 우연성과 언어의 문화 상대성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문화로 이동할 수도 없다. 로티에 의하면, 유럽은 서구 문화를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아니다. 또한 서구 문화의 현재 상태는 어휘의 점진적인 변천으로 소급될 수 있다. 세계를 묘사하는 낡은 은유들은 사멸될 것이며, 새로운 것들이 탄생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우리는 어떤 은유와 어휘들이 이 세계를 가장 적절하게 기술할지를 결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어휘를 판단하게 하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판단을 위한 객관적인 근거란 언어의 외부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티에 의하면, 우리의 언어는 사실상 역사적 우연성의 산물이다. 로티에게 합리성이란 현재 손안에 있는 언어에서 논증들을 함께 엮어 배열하는 일이다. 반면에 상상력은 그러한 언어를 넘어서는 능력, 바꿔 말해서 새롭고, 낯설며, 비합리적인 것들을 나타내는 낱말들과 이미지들을 꿈꾸는 것이다.

 

5. 자문화중심주의와 연대성

5-1 자문화중심주의

 로티는 역사적이지 못한 기준에 의해 인간의 삶과 문화의 기반을 세우려는 모든 시도를 불신하면서, 실용주의를 역사주의와 연결 짓는다. 로티는 역사적 상황이나 맥락을 뛰어넘는 초월성이나 보편성의 추구는 무의미한 강박관념의 소산이라고 비판한다. 로티의 실용주의는 모든 것을 우연과 기회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객관성이나 절대성의 추구를 수용할 수 없다. 따라서 로티는 합리성의 규제적 성격을 강조해 이상화된 합리적 수용가능성을 주장하는 퍼트남의 견해나, 의사소통의 장에서 담론의 선험적 조건에 대한 논의를 통해 합리성을 옹호하려는 하버마스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로티에 의하면 ‘흥미 있는 질문은 어떤 주장이 합리적으로 옹호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주장이 우리의 신념과 욕구에 충분히 정합될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이와 같이 로티가 합리성 대신에 정합성을, 그리고 진리의 발견 대신에 합의의 모색을 옹호한다면, 그의 철학관은 문화적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의 관점에서는 그것 자체로서 ‘정당화’될 수 있는 가치란 허용될 수 없다. ‘자명하게 밝혀진 가치’와 같은 것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로티의 반정초주의가 가치, 도덕, 사회문제 등에 일관되게 적용된다면 당연히 가치의 우연성과 역사성을 인정하는 문화적 주관주의로 귀결될 것이며 이것은 남의 문화적 가치도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상대주의로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로티는 상대주의의 개념이 어떠한 신념도 다른 신념 못지않게 좋다는 견해를 의미하거나 진리란 용어로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절차만큼이나 여러 의미를 지닌다는 견해라고 한다면, 자신의 입장은 결코 이에 편입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이런 식의 상대주의를 배격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응수한다. 그가 그런 식의 상대주의를 지양하는 것은 이러한 상대주의가 현실적, 실천적으로 불가능한 무제약적인 관용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아와 언어의 우연성을 수용하는 역사주의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아무것이나 좋다는 식의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지양하려는 로티의 요청은 그의 자문화중심주의로 이어진다. 로티가 채택한 자문화중심주의란 우리들의 사회와 같은 특정 사회에서 탐구 분야에 따라 달리 쓰이는 친숙한 정당화의 절차에 의거한 서술과 동떨어진 진리나 합리성에 대해서는 언급할 것이 없으며, 갖자 자기들 자신의 공동체에 특권을 부여하는 입장이다.

 로티의 자문화중심주의는 모든 것의 우연성을 수용한다. 우리가 더 이상 어떤 것도 섬기지 않고, 아무 것도 신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어느 것이든 시간과 기회의 산물로 취급하는 그런 관점을 지향하는 것이다. 자신의 문화 역시 역사적 우연성의 산물이며 그것이 좋지 못한 것들을 포함할 수도 있는 것을 인정하지만, 자신의 문화를 기준점 또는 출발점으로 삼아 반성적 균형유지의 실용주의적인 테크닉을 적용해 나가자는 것이 로티의 자문화중심주의의 요지이다. 그렇다면 로티에게서 철학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자기문화에 대한 방어의 논리, 자기문화에 대한 비판이 된다. 로티의 관점에서는 철학이란 문화나 문명을 놓고 그 향방에 대하여 논란을 벌이는 넓은 의미의 정치적인 행위인 것이다.

 

5-2 대화, 연대성,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로티에게는 역사성을 초월한 것은 진리개념이든 합리성이든 의미 없는 것이다. 오류가능주의와 개방성을 전제로 하는 자문화중심의 개념체계들을 초월하는 규범성이란 의미가 없다. 이것은 기존의 사회적 실행을 점진적으로 개선해가자는 개량주의며, 그러한 범주를 벗어난 정초주의적 발상의 논거들은 전혀 수용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내재주의이다. 로티는 이 경우 자문화중심주의가 타 사회에 대하여 배타성을 띤다는 우려는 기우이며, 충분히 개방적인 자문화중심주의는 스스로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하면서, 오히려 내재주의의 철저화를 통한 역사주의를 강조한다. 로티는 초문화적, 초역사적인 준거점이 없이도 기존의 제도와 사회적 실행들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이유로 연대성을 든다.

 로티는 우리는 연대성을 위한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로티에 의하면, 반정초주의에 입각한 실용주의자는 이성, 본질, 합리성 등의 개념에 매달림이 없이 우리가 끊임없이 대화를 지속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라고 보며, 성공을 담보해 주는 아무런 형이상학적 보증도 인식론적 보증도 갖고 있지 않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실용주의자는 어떤 목표를 정해 놓고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로티에게서는 대화 그 자체가 목적이다. 대화만이 인간의 존재를 깨닫는 궁극적 지표이다. 의식의 확실성, 인식의 정당화는 인간과 대상, 관념과 대상간의 대화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대화는 비통상적 담론이다. 통상적 담론은 이미 기존의 사회적 실행에 의하여 그 쓰임새가 인정된 것, 즉 언어 공동체의 합의된 규약에 따라 의미 있는 것으로 인정된 것 이라면, 비통상적 담론은 통상적 담론과 달리 반드시 합의에 이르도록 하는 강요가 없으며, 다양한 진술이 가능한 담론이다.

 그러나 로티의 대화는 반드시 합의를 도출해야한다는 강요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로티가 강조하는 사회적 합의는 퍼트남 식의 규제적 합리성의 이념을 배경으로 한 합의가 아닌 상상력을 동원한 참신한 메타포의 설득을 전제로 한 합의이다.

 로티가 말하는 메타포란 기존의 언어 규칙을 위배하거나 전혀 생소한 규칙을 제안하는 것 등을 가리키며, 이른바 비통상적 담론에 속하는 언어행위이다. 모든 것이 우연과 기회의 산물임을 직시하는 철저한 실용주의자, 역사주의자는 어떤 주장이 실재와 대응됨을 보이려는 노력을 헛수고라고 여기기 때문에, 논증을 통해 진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논증이란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중립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오히려 노력할 것은 참신한 메타포를 창안하여 설득을 행하는 일이다. 관건은 진리의 발견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켜 세상을 더 낫게 만들어갈 메타포의 창출이라는 것이다.

 참신한 메타포는 애초에 낯선 소리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안목을 얻게 해주고 설득을 행하게 되면 통상적 담론의 일부로 편입된다.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의 제안도, 기발한 예술작품도, 천재적인 발명품도 참신한 메타포의 일종이다. 메타포는 기존의 것을 개선해 가는 도구이자 자유 확대의 구체적 수단인 셈이다. 로티는 이런 관점을 미리 정해진 어떠한 틀이나 속박도 거부하는 견지라는 의미에서 낭만주의라 부른다.

 이와 같이 매우 극단적인 유명론의 입장에서 삶의 우연성과 역사를 받아들이는 자를 로티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라고 부른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는 궁극적인 어휘조차도 포기할 태세가 되어 있는 사람을 말한다. 로티에 의하면 자유주의자란 무엇보다 잔인성을 가장 혐오하는 인물이며, 아이러니스트란 자신의 가장 핵심적인 신념과 욕구들이 우연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따라서 그것이 시간과 기회를 넘어 선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역사주의적인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한 사람은 비교적 낙과주의적인 면모를 나타내게 마련이어서 고통이 장차 감소될 뿐만 아니라 결국 다른 인간에게 굴욕 당하는 일이 없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로티가 주창하는 자유자의자는 현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유형의 휴머니스트로서 진리나 객관성 혹은 합리성 따위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신축성 있게 자신이 직면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인간성을 극대화하는 인물이다.

 로티는 칸트의 초역사적이며 초문화적 자아를 역사적으로 형성된 공동체로 대치해야만우리가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의 이념이 구체화된다고 본다. 진리는 현실에 일치하고, 공동체 생활의 실천을 통해 발견된다는 실용주의의 탐구에서는 오직 대화의 제재만이 가능하며, 대화의 끊임없는 지속을 통해 상호 이해를 통한 문화적 지평을 열어 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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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이 생각한 확실한 앎의 토대로서의 자아

강대웅

 

들어가는 말

철학이란 확실한 앎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를 위해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앎에 대해 끝까지 질문을 해 본 결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 라는 결론을 얻었다. 즉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앎의 토대가 마음(Cogito)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마음과 몸을 분리시키고, 현상과 실재를 분리시켜서 정신으로 대상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의식의 틀이 변화하였다. 과학저들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이성을 통해 이념적·수학적으로 이 세상을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근대인들이 참된 세계라고 믿고 있는 세계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 신념 때문에 생활세계는 은폐되고 황폐하게 되었다.

로티는 이런 데카르트의 생각은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으며, 마음과 세계를 분리시킨 후 마음으로 이 세상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거울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후설의 판단중지는 바로 그 거울을 깨는 역할을 한다. 이제 후설이 그 거울을 어떻게 깨고, 우리 인식의 확실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보장하는지 알아보자.

 

후설이 되찾으려고 했던 것, 자아

후설은 데카르트가 마음을 잘못 이해하였다고 말한다. 즉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후설이 생각하기에는 자아와 세계는 서로의 상관관계에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늘 자아와 세계가 별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띠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릇된 믿음을 깨고, 우리는 단지 우리 마음에 드러난 것에 대해서 탐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판단중지’ 할 것을 요청한다.

“판단중지는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이 대상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런 믿음을 중단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대상을 직접 지각하며, 지각된 대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지각한 것은 대상 세계의 바로 그 특성이다'는 앞서 정돈된 상식적인 믿음들에 대한 중단이다.

“후설은 자신의 철학이념을 성취하기 위해 '환원', '판단중지', '괄호침', '배제'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를 크게는 "판단중지와 환원이라는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으며, 괄호침과 배제 등은 판단중지에 부수되는 상황으로 간주할 수 있다."

 

후설은 판단중지 이후에 남아있는 것은 현상 그 자체, 사태 그 자체라고 말한다. 이것은 데카르트와 달리 판단중지한 후에도 우리의 세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후설은 판단 중지를 통해 데카르트의 마음(Cogito)을 버린 것이 아니라 현상학의 원형적인 토대로 받아들인다. 판단중지를 통해서 확보한 선험적 주관성이 드러나게 되며, 판단 중지 후에 남는 것이 바로 그  선험적 주관성이 즉 마음(Cogito)이다.

 

세계의 원천으로서의 자아

“후설은 자아를 '체험들의 동일한 극으로서의 자아', '습득성의 기체로서의 자아', '모나드로서의 자아' 등 세 가지 모습으로 강조한다. 이 세 가지 모습의 자아를 세계(대상)와의 관계 속에서 해명해야만 비로소 '자아'개념의 선험적 성격이 분명해 질 것이다.

 

이제 이성이 모든 존재에 부여하는 의미문제를 자연 과학이 외면하면서 결국 제거 되었던 이성이 후설에 의해서 다시 중심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대상의 다양성만큼이나 우리의 체험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그때마다 자아의 시선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확실성을 얻기 위해 대상에 의해 변형되지 않는 순수 자아를 찾아야 한다.

많은 체험들이 시간의 변경과 진행에서 변화하는 반면에, 순수 자아는 결코 변화하지 않는다는 데서 이미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는 이미 서술한 방식으로 체험의 ‘원천’이요 동일극 으로서 체험에, 체험의 질료와 노에시스에 속한다. 노에마의 측면에서는 지향적대상 및 대상적 의미가 그러한 바와 같이, 순수 자아는 체험들을 일치시키는 동일극이다.

예를 들어 나는 하나의 교탁을 생생하게 지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또는 회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탁의 의미는 이 대상의 의미로서 동일하다. 다양한 여러 가지 노에마적 규정 내용에는, 그러므로 동일하게 유지되고 동일한 것으로서 각기 해당하는 규정 내용들의 통일점을 형성하는 하나의 ‘의미 핵심’, “중앙핵심”이 있다. 이 일관하여 유지되는 중앙핵심을 후설은 노에마적 의미, 즉 충만한 노에마아 구별하여 대상적 의미라고 불렀다.

대상적 의미는 궁극적으로 노에마의 단일성과 동일성을 결과한다. 그러한 한, 그것은 하나의 동일극이다. 이것에 상관적으로 순수자아가 다른 하나의 동일극을 이룬다.
우리가 환원 이전에 감각 기관을 수단으로 감각 지각에서 감각적 현실 내의 이러한 감각 물체로서 보거나 느끼는 대상과 지향적 대상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교탁의 존재의미, 우리가 ‘뜻을 둔’, 우리가 얻고자 한 의미는 불태워질 수 없으며, 화학 성분들로 분해될 수도 없다.

 

이러한 순수 자아를 바탕으로 해서 모든 ‘새로운’ 입장은 하나의 지속적 ‘견해’ 및 하나의 주제(경험, 판단, 기쁨, 의지의 주제)를 설립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부터 이전에 그러하였던 바와 동일한 나로서, 또는 지금 그러하며 이전에 그러하였던 바와 동일한 나로서 나 자신을 파악하며, 또한 나의 주제를 고수하였으며 이제 그 주제들을 이전에 정립하였던 그대로 현실적인 주제로서 인계받는 자아로서 나 자신을 파악한다.

순수 자아는 시간화하면서 그 자신이 등장, 퇴장하는 체험의 흐름 내에서 시간적으로 지속하며 시간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시간화한다’는 것은 순수 자아가 내재적 시간 내에서 그 자신을 과서, 현제, 미래의 동일한 자아로서 -지속적 현재에서-시간적으로 구성함을 뜻한다)

순수 자아는 이 체험의 일치 속에 자기 동일성을 확보한다. 즉 순수 자아는 오로지 이 지향적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체험들을 한 자아의 체험으로 확인하고, 이를 통해 자기 동일성을 확보한다. 이렇게 해서 확보된 자아가 '체험들의 동일한 극으로서의 자아'이며 우리 인식의 확실성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나가는 말

후설이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방법을 비판하고 새롭게 만들어낸 현상학은 우리의 판단을 중지함으로써 우리의 잘못된 믿음으로 변형된 인식을 버리고, 마음속에 드러난 것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학문이다. 후설은 이러한 자신의 철학을 연구철학이라고 말한다.

후설은 이를 통해 데카르트의 거울을 깨트린다. 대상에 대한 그릇된 믿음을 깨뜨리는 순간, 대상을 올바르게 반영하는 역할로서의 거울인 마음도 깨어진 것이다. 전통적인 데카르트주의자들이 바라보는 마음 안과 밖이라는 구분을 떠나야 만이 후설이 주장하는 판단 중지를 통한 선험적 주관성이 드러날 수 있다. 이러한 선험적 주관성을 통한 선험적 현상학을 통해 우리는 우리 마음에 드러난 세상을 이전보다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후설의 '자아' 개념의 선험적 성격/ 이성환 교수님, 2002

현상학/ W. 마르크스 지음, 길우 옮김, 서광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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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생명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강대웅

 

 

목차

 

1.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

  ‘호모사피엔스’와 ‘인격체’의 생명의 가치

    - ‘호모사피엔스’의 생명의 가치

    - ‘인격체’의 생명의 가치

 

2. 임신 중절을 통해서 본 인간 생명의 시작

    - 보수주의적 입장

      1) 출생

      2) 체외생존가능성

      3) 태동

      4) 의식

 

3. 태아의 생명의 가치

 

 

 

인간의 생명의 시작은 언제인가라는 물음은 결국, 인간이라는 단어의 의미 정립에 따라 그 시기가 달라진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출산 이후의 생명을 인간으로, 자의식을 가진 이후를 인간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가진 수정란을 인간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미에 대해서 우선 정리한 다음에, 하나의 생명이 언제부터 인간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지 알아보자.

 

1.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

우리는 ‘인간’이라는 말을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의 구성원’이라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인지 아닌지는 염색체를 검사 해보면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이라는 말을 이러한 뜻으로 사용하게 되면 인간의 정자와 난자에 의해 임신된 태아는 존재하게 된 첫 순간부터, 즉 수정란일 때부터 인간 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수정란이 나중에 자라서 유전적으로 인간이 아닌 염색체를 가진 것으로 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심하게 그리고 치유 불가능하게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뇌가 없는 무뇌증 아이도 이러한 구분에 따라서 인간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의 의미는 ‘인간의 지표’에 해당되는 것을 두루 갖춘 인간이다. 이러한 인가의 기준은 개신교 신학자인 플레처(Joseph Fletcher)가 제안한 것으로 자의식, 자기통제, 미래감, 과거감, 타인과 관계 맺는 능력, 타인에 대한 관심, 의사소통, 호기심 등이 그 기준에 속한다.

 

이 두 가지 인간에 대한 의미를 첫 번째 의미는 ‘호모사피엔스’, 두 번째 의미를 ‘인격체’라고 했을 때, 이 두 가지 의미는 겹치는 하지만 일치하지 않는다. 태아, 정신장애아, 갓 태어난 아기 등은 모두 호모사피엔스의 구성원 이지만, 이들은 인격체로서 자의식을 가지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염색체만 호모 사피엔스의 것을 가진 생명체는 인간인가 아닌가?

 

 ‘호모사피엔스’와 ‘인격체’의 생명의 가치

 

- ‘호모사피엔스’의 생명의 가치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명의 가치는 서양 기독교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생명은 하느님이 창조 하였기에 그분의 소유이고, 인간을 죽이거나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은 아닌 하느님의 권리를 침범한 것이라고 말한다. 동물과 식물의 목숨은 인간이 다스리고 사용하라는 권한을 받았기에 이용할 수 있으나 인간의 생명은 인간의 소유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교리가 현대에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 지지는 않지만, 이것이 발생시킨 윤리적 태도는, 우리 종족은 다른 동물 종 보다 특별하며 권리를 가진다는 신념과 어우러져 아직 남아있다

 

- ‘인격체’의 생명의 가치

자의식을 가진 존재는 마래와 과거를 가지는 개별적 존재로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묙망을 가진다. 따라서 자의식을 가진 것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그들의 미래에 대한 욕구를 좌절시키는 것이다.

선호 공리주의자들은 인격체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일반적으로 다른 존재의 생명을 빼앗는 것보다 더욱 나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인격체를 죽이는 것은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심적이고 중요한 선호의 광범위한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격체를 죽이게 될 경우 그 희생자가 미래에 계획했던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가지는 존재로 볼 수 없는 존재는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선호를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선호공리 이전에, 인간은 스스로 ‘생명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미국 철학자인 툴리(Michael Tooley)는 생명에의 권리를 갖는 유일한 존재는 자신이 일정한 시기에 걸쳐서 존재하는 개별적 존재, 즉 인격체라고 주장한다. , 생명의 권리가 개별적인 존재의 생존을 지속시킬 권리라면, 그때 생명에의 권리를 소유하는 데 상관되는 욕망은 개별존재로서의 생존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러나 자신을 일정한 시기에 걸쳐서 존재하는 개별적 존재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 즉 인격체만이 이러한 욕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인격체만이 생명에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2. 임신 중절을 통해서 본 인간 생명의 시작

‘호모사피엔스’와 ‘인격체’의 생명의 가치를 통해 인간의 의미와 인간 생명의 권리를 알아  보았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언제부터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자. 인간들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였을 경우 낙태, 즉 임신 중절이라는 의료 행위를 한다. 이러한 임신 중절 행위에 앞서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언제부터 인간이냐, 즉 인간으로서의 생명의 시작이 언제부터이냐 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생명의 시작은 수정 직후의 수정란을 인간으로 보는 입장과, 14일 이후, 10주 이후, 6개월 이후 등으로 나눠지며, 그렇게 나누는 기준에 따라서 낙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967년까지 스웨덴과 덴마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서구 민주국가에서 임신중절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1973년 미국 대법원은 임신 6개월 내에는 산모가 중절 할 헌법적 권리를 가진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서유럽의 국가들은 거의 모두 임신 중절을 자유화 하였다. 그렇다면 임신 중절의 보수적인 입장과 그 반대 입장을 통해, 인가의 생명의 시작이 언제인지 되물어 보자.

 

- 보수주의적 입장

첫 번째 전제 : 죄없는 인간을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두 번째 전제 : 인간의 태아는 죄없는 인간이다.

결론 : 그래서 인간의 태아를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낙태에 찬성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두 번째 전제를 부정한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수정란과 아이가 동일한 염색체로서 연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수정란부터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수정란이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도 부모의 요청에 의해 아이를 죽일 수 없듯이 낙태도 허용할 수 없다.

하지만 수정란과 인간 사이에 도덕적으로 의미있는 구분선이 없다는 것은 사실인가?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구분선으로는 출생, 체외생존 가능성, 태동, 그리고 의식의 시작등이 있다. 이들을 차례로 분석해 보자.

 

1) 출생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태아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궁 속에 있는 가 밖에 있는가라는 존재의 위치가 그 존재를 죽이는 것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조산아는 임신 말기에 있는 태아보다 덜 발달되었다. 하지만 조산아는 배 밖에 있음으로 죽여서는 안 되지만, 이보다 더 발달된 태아는 죽여도 된다는 주장은 기이하게 들릴 뿐이다.

태아와 아이는, 자궁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우리가 볼 수 있든 없든, 동일한 존재로서 동일한 인간적 특성을 지니며, 동일한 정도의 고통을 알고 느낀다.

 

2) 체외생존가능성

체외생존 가능성은 미국의 6개월 내에는 산모가 중절을 할 수 있다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미국 대 법원은 체외 생존이 가능 할 때에 국가가 아이의 생명을 보호할 법적인 강제가 생긴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6개월 이후의 체외 생존 가능한 태아는 산모의 자궁 밖에서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할 능력을 가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외 생존이 아직 불가능한 태아도 잠제적인 생명을 가진 인간이다. 그리고 체외 생존 가능성은 의료 기술에 따라 변한다. 30년 전에는 두 달 이상 먼저 태어난 아이는 생존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세달 먼저 태어난 아이, 6개월 된 아이도 체외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의료 기술이 발달하여 그보다 일직 5개월, 혹은 4개월 된 아이도 체외에서 생존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의 생명의 시작이 앞당겨 지는 것인가?

자유주의자들은 태아가 살아남기 위해서 전적으로 산모에게 의존 한다는 사실을 이유로 태아가 생명에의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체외에서 생존이 불가능한 태아가 그 생명을 산모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해서, 산모에게 그 아이를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노인, 중증 장애인 등의 목숨의 권한이 그들을 돌보는 사람에게 있지 않는 것과 같다.

 

3) 태동

태동이란 아이의 움직임을 산모가 처음으로 느끼는 때이다. 하지만 이것은 산모의 입장에서 움직임을 느낀 것일 뿐, 그 이전부터 태아는 이미 살아 있었다. 살아 있었으나 단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 생명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

 

4) 의식

태아는 수정 후 6주에 이미 태아는 운동이 발생하며, 7주에는 두뇌 활동이 감지된다. 이를 바탕으로 태아는 임신 초기단계에서도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본적인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능력과 의식은 실제적으로 도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와 같이 우리는 출생, 체외생존 가능성, 태동, 그리고 의식의 시작에서 신생아와 태아 사이의 도덕적으로 인간과 인간 이전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경정적인 구분선이 없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 태아는 인간인가? 인간의 생명의 시작은 수정란부터인가? 하지반 이 물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처음에 우리가 나누어본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 즉 ‘호모사피엔스’ 인가 ‘인격체’ 인가에 따라 태아의 위상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3. 태아의 생명의 가치

 

임신 중절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적 입장의 첫 번째 논변인 ‘죄없는 인간을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우리의 특별한 가치부여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인격체’로 보게 된다면 태아를 인간으로 보기 힘들다. 태아가 합리적이거나 자의식 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인간이 ‘호모사피엔스’만을 의미하게 된다면, 이때는 보수주의자들의 태아의 생명에 대한 옹호가 도덕성을 결여하게 되고, 따라서 ‘죄없는 인간을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라는 첫 전제가 힘을 잃는다. 종족의 구성원의 조건과 죄의 유무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태아는 인격체로서도, 호모사피엔스의 구성원으로서도 그 목숨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인가? 태아의 현재적 상태만 본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태아는 현제의 상태뿐만이 아니라 잠재적 생명, 잠재적 인간이라는 측면에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잠재적 생명으로서의 태아

첫 번째 전제 : 잠재적 인간을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두 번째 전제 : 인간의 태아는 잠재적 인간이다.

결론 : 그래서 인간의 태아를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태아가 인간인가에 대한 여부는 앞의 논의를 통해 확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태아가 잠재적 인간이라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를 ‘호모사피엔스’로 할 때와 ‘인격체’로 할 때에 모두 해당한다. 하지만 태아를 잠재적 인간으로 보면서 처음 주장에 비해서 두 번째 주장은 첫 번째 전제가 약화되었다. 싹이 나는 도토리를 베어 내는 것이 고색창연한 떡갈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아의 생명의 잠재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태아에게 생명에의 권리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태아를 죽이는 것이 세계로부터 미래의 합리적이고 자의식적인 존재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고 자의식 적인 존재가 본질적으로 가치롭다면, 인간의 태아를 죽이는 것은 세계로부터 본질적으로 가치로운 것을 빼앗는 것이며, 그래서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더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인간 생명의 시작을 논하는 그 논의 자체가 순수하지 못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생명의 시작이 착상 때부터이니, 뇌가 형성되는 시기부터이니 등의 주장들은 생명 공학의 발전과 함께 시작 되었으며, 이런 주장들은 자신들 연구에 대한 윤리적 비난을 피해가려는 시도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생명의 시작에 대한 수정설, 착상설(14일 전후), 뇌기능설(60), 체외생존능력설(28), 분만설 등의 견해는 연구의 성과를 통해 이익을 보기를 원하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을 뿐, 그 대상이 되는 인간(태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은 수정된 첫 세포부터 시작하고 수정란, 배아, 태아는 인간이 될 잠재적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 생명체로서 존중해야 한다.

 

참고 문헌 - 실천 윤리학. 피터 싱어 지음. 황경식, 김성동 옮김. 철학과 현실사. 1997

 


:

인간 대상 실험의 문제

 

 강대웅

 

 

목차

1. 인간에 대한 실험

2. 인간 대상 실험에서 윤리적 문제

 1)이익과 위험의 평가

  2)치료적인 그리고 비치료적인

  3)인간 대상의 이용(착취)

  4)자발적 동의에의 확인

  5)정보가 제공된 동의의 확인

  6)무능력과 대리동의

  7)정의와 인간실험대상들

  8)실험대상으로 봉사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9)윤리적으로 오점이 있는 지식의 이용

  10)신뢰와 신용

3. 인간 배아와 태아에 대한 실험

 

인간 대상 실험의 문제 요약문

 

인간에 대한 실험의 역사는 그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갖가지 위험한 실험을 의학의 발전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노예, 혹은 포로, 혹은 죄수, 그리고 현제에 이르러서는 빈민국 국민들과 같이 경제적으로 하층민인 사람들에게 감행되면서 진행되어왔다. 뉘른베르크 강령 등을 통해서 인체실험대상자의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자발적인 동의’가 보장되는 것이 전 세계적으로 공감대를 형성 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법적으로 제약할 수는 없으며 지금 이 시대에도 그러한 보장을 받지 못하고 의료 실험, 신약 실험에 이용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과학의 진보와 의학적 복지의 신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연구의 위험은 피할 수 없고, 의료행위 안에 존재하는 위험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러한 인간 대상의 실험은 여러 가지 윤리적인 문제를 불러 일으킨다. 우리는 그것이 생명, 자율성, 존엄성, 정의, 행복 같은 가치들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보아야만 하고, 관련된 과정에서 생기는 결과에 대해 주의 깊게 평가해야 한다.

윤리적 문제는 다음의 세 가지 형태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이익과 손해, 위험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실험대상이 된 사람의 자율성과 존엄성에 대한 문제와 관련된다. 세 번째는 부담의 분배와 이익의 사용, 그리고 다른 연구와 관련된 행동에서의 정의 문제와 관련된다.

이러한 의료 실험에 의해 발생되는 윤리적인 문제들을 잘 분석하고 파악하여, 인간의 대상화를 방지하고 의료 발전도 함께 이루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에 대한 실험의 영역에서 놓쳐서는 안 될 문제가 인간 배아와 태아에 대한 실험문제이다. 살아있는 인간배아와 태아를 이용한 실험에서 야기되는 윤리적인 문제는 앞에서 논의한 인간 대상 실험과는 다소 다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자율성이나 동의로부터가 아니고 배아와 태아 자체가 권리를 가지는지에 대한 지위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배아 실험을 통한 인간에게 주어질 많은 이익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중추신경계가 아직 현성되지 않은 초기 배아는 연구 과정에서 이용당하더라도 어떤 고통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고통을 느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 배아이기 때문에 다른 연구 재료와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계 50여개국 400여명의 의사들이 한 자리에 모인 2008 세계의사회(WMA) 서울 총회에서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서, 다른 대안이 없는 경우에 국한 하여 연구할 수 있으며, 그 실험 대상이 되는 배아줄기세포는 인공수정의 목적으로 생성됐으나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되지 못한 여분의 배아만을 연구에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 연구를 위한 배아의 사용을 배아 발달 후 첫 14일 이내 또는 원시선(primary streak)이 형성되기 전 기간으로 규정하고 있다. 14일이 기준에 되는 이유는 수정 후 14일 직후부터 중추신경계와 심장, 뇌가 빠르게 발달하기 때문이다

 

 

본 문

 

1. 인간에 대한 실험

인간에 대한 실험의 역사는 18세기 말과 19세기 말 인식론과 방법론의 변화 시기에 이루어 졌으며, 이시기에 사람들은 질병을 신체의 특정 기관과 조직 안에 있는 병적인 존재에 의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외과적인 새로운 의학 기술들은 노예들에게 그것을 테스트 해보면서 발전 하였으며, 전쟁기간에 독일인들은 유태인을 대상으로, 일본인들은 한국인과 중국인 포로들을 대상으로 그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갖가지 위험한 실험을 의학의 발전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감행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기소된 독일 의사와 과학자들은 ‘소수의 생명을 희생하여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실험을 위해 실험 대상이 없어서는 안 되며, ‘역사적으로 의학 실험에서 지원자들이 실험에 참여하겠다는 적합한 동의를 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며 자신들의 끔찍한 행위를 정당화 하려고 하였다.

이 사건을 판결하면서 뉘른베르크 법원은 의학실험을 정당화 하는데 필수적인 10가지 요소를 명시하였다. 10가지가 ‘뉘른베르크 강령’ 이다. 10개 조항 중에서도 핵심은 다음과 같은 제1항이다.

“인체실험대상자의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자발적인 동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것은 실험대상자가 동의를 할 수 있는 법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어떠한 폭력, 기만, 협박, 술책, 강요가 없는 가운데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분명한 이해와 지식에 근거하여 결정할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위해서는 실험대상자에게 실험의 성격, 기간, 목적, 방법, 예상되는 불편과 위험, 건강상의 영향 등에 대해 알려 주어야 한다. 이러한 책임은 실험을 지도하고 참여하는 연구자 개개인에게 있다.

 

하지만 의학전문가 모임과 국제적 의학 그룹은 뉘른베르크 강령을 받아들이기를 꺼렸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실험에 앞서 동의를 절대적으로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1964년에 세계의학 협회는 헬싱키 선언으로 알려진 연구와 실험을 위한 또 다른 강령을 제안 한다. 헬싱키 선언은 뉘른베르크 강령의 동의 규정에서 핵심을 빼버렸기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후 의학 전문가들 사이에서 보다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헬싱키 선언( 32개 조항)의 주요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일반적으로 승인된 과학 원칙에 따라야 하며, 연구대상자(피험자)들의 건강과 권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윤리적 기준에 합당해야 한다.

2. 실험 계획과 수행은 독립적인 윤리심사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거쳐야 한다.

3. 연구대상자의 이익에 대한 고려는 과학 발전과 사회의 이익에 앞서야 한다.

4. 약자의 입장에 있는 연구대상자들은 특별히 보호해야 한다.

5. 연구대상자가 연구자와 종속관계에 있는 경우 특히 주의해야 한다.

6. 연구 자체의 목적과 방법, 예견되는 이익과 내재하는 위험성 등에 관하여 연구대상자에게 사전에 충분히 알려주어야 하며, 그들로부터 충분한 설명에 근거하여 자유로이 이루어진 동의를 받아야 한다.

7. 동의는 그 연구에 참가하지 않고 독립된 위치에 있는 의료인이 받아야 한다.

8. 법률상 무능력자에 대해서는 국내법에 따라 법적 대리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9. 연구결과를 발표할 때 연구자는 이 선언에 규정된 원칙을 따라야 한다.

10. 학술지는 이 선언을 준수하지 않는 논문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러한 조항들을 따라야 할 법적 규제력은 없다. 그리고 현제에 이르러 전 세계적으로 인간 대상 실험을 본격적으로 다룬 법규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나라에는 법규 대신에 인간 대상 실험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있고 이를 심사하는 위원회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에는 그것을 따르지 않는 연구자나 그들이 속한 기관에 직접적인 제재가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고 전 세계 어디에도 진행 중인 연구를 적극적으로 모니터하는 위원회는 없다. 실제로 그들은 연구자의 의도에 의존하여, 연구자의 행동을 면밀히 조사하기 보다는 연구 계획안에 언급된 것만을 심사한다.

이렇듯 인간 대상의 실험에서 법률과 위원회 심사는 충분한 보호 장치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 대상의 실험에서 많은 부분이 실험대상자의 보호는 실험자의 윤리적 태도와 행위에 달러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 대상의 실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윤리적인 문제들을 살펴보자.

          

2. 인간 대상 실험에서 윤리적 문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과학의 진보와 의학적 복지의 신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연구의 위험은 피할 수 없고, 의료행위 안에 존재하는 위험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실험대상으로서 인간의 이용은 윤리적 문제를 야기시킨다. 우리는 그것이 생명, 자율성, 존엄성, 정의, 행복 같은 가치들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보아야만 하고, 관련된 과정에서 생기는 결과에 대해 주의 깊게 평가해야 한다.

 

윤리적 문제는 다음의 세 가지 형태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이익과 손해, 위험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실험대상이 된 사람의 자율성과 존엄성에 대한 문제와 관련된다. 세 번째는 부담의 분배와 이익의 사용, 그리고 다른 연구와 관련된 행동에서의 정의 문제와 관련된다.

 

이익과 위험의 평가

연구자들과 의학종사자들은 의학실험에서 인간이 해로움에 노출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기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위험보다는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실험과정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그것이 수반하는 위험이나 불편과 관련되며, 결과적으로 얻어지는 이익을 평가하는 것 이상이다. 인간 대상에 대한 관심은 실험과정에서 그가 어떤 취급을 받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 대상의 연구는 인간의 존엄성 원칙 - 인간의 자기 제어와 자율적 결정능력의 주요성을 인정하는 - 에 반드시 따르는 것이다. 실험대상이 된 사람은 실험의 다양한 국면에서 이러한 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치료적인 그리고 비치료적인

치료법 실험의 경우 그것을 통해 기대되는 이익은 곧바로 대상자 자신에게 돌아온다. 부과된 위험도 그들의 몫이고, 이익도 그렇다.

비치료적 실험의 경우에는 이익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개인이 견뎌야 하는 위험을 다른 사람에게 발생될 이익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비치료적 실험의 경우 그 실험이 대상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치료적인 실험이 행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경우라 하더라도 치료가 잠시 중단될 수도 있고, 현제 최상의 치료법으로 여겨지는 것보다 나쁜 치료를 받을 수도 있다. 그 경우에 부가적인 위험의 부과는 그것이 과학적으로 보다 유용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이유로 항변될 수도 있다. 유예되거나 바뀐 치료법의 부정적인 영향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보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 과정의 특징을 그 대상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인간 대상의 이용(착취)

비치료적 실험이 다른 사람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실험 대상들은 이용된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주어진 도움을 이용하는 것과 그들을 결정능력이 없는 대상으로 여기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실험대상이 된 사람들은 그들의 취약성 - 복잡한 실험 과정에 대한 생소함, 관련되는 기술의 정보에 대한 무지, 병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 - 으로 인해 그들이 일상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보다 더 많이 착취당할 수도 있다.

인간 대상 실험에서 인간이 다른 사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착취를 피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자율적인 가치체계에 기초하여 자율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그 대상들에게 주어야만 한다.

 

동의

각각의 대상에 의해 주어진 동의의 본성과 질은 착취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중요하다. 적절한 정보를 제공받은 대상에 의해 주어진 자발적 동의는 실험과정에서 그가 단지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동의의 타당성 규명은 개인의 자율성 존중을 확보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피해를 막고 사기와 협박의 사용을 피하고, 자기-감시 메커니즘을 지닌 연구자를 만들며, 합리적 의사결정 과정을 증진시키기 위해 중요하다.

 

자발적 동의에의 확인

뉘른베르크 강령은 자발적 동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동의할 수 있는 법적인 능력,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다른 어떤 강제나 협박의 요소 혹은 숨겨진 강요나 억압을 통한 간섭의 부재가 자발적 동의이다.

하지만 관계되는 사람들 간의 권력관계 속에 ‘커다란 불균형이 존재할 때는 강요의 기회와 유혹이 상존한다’

예를 들어 윤리적으로 의심이 가는 죄수에 대한 실험사례들에는 죄수들이 장티푸스, 말라리아, 콜레라에 감염되는 것에 분명히 동의 했다는 경우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 경우 동의의 자발성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런 과정은 이성이 있는 사람의 참여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이 인식하지 못한 경우에도 권위에 대한 두려움이나 존경심 때문에 그 실험대상자가 진정으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들거나 혹은 아예 없어질 수도 있다.

실험대상을 유혹하는 보상이나 다른 인센티브의 이용도 또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착취는 인간 대상이 그들의 시간과 노력에 대해 적절히 보상받지 못할 때 발생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보상 또한 자율성을 훼손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대상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보상(금전적 보상, 혹은 죄의 감면, 학점 등)이 사용되는 경우에 표면화 된다. 이런 경우 실험 대상들은 ‘비합리적인 특혜’에 대한 호소에 의해 희생될 수도 있다. 따라서 연구자와 의존적 관계에 있는 대상의 이용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 적절하다.

 

정보가 제공된 동의의 확인 

실험에 대한 설명은 실험 대상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자율적인 결정을 위해 얼마만큼의, 그리고 어떤 정보가 필수적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보의 공개가 실험 대상에게 해를 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에 따라서는 정보 제공의 보류가 정당화 될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실험 대상자가 비이성적인 믿음을 선호 한다면 그것 또한 존중해 주어야 한다.

 

무능력과 대리동의  

실험 대상이 되는데 있어서 이성적인 판단이 힘든 사람들, 예를 들어 어린이들과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 마약이나 마취 상태에 있는 사람, 분만중인 여성, 그리고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예상하거나 평가할 수 없는 위험 상황으로부터 보호 받아야 한다.

이들에 대한 실험은 그 대상에 대한 이익을 직접적으로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그 실험은 위험이 아주 적은 경우에만 허용될 수 있다. 따라서 대리인은 실험 대상의 이익을 충분히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정의와 인간실험대상들

실험 대상의 모집은 위험이 계층 간에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경우 착취의 장이 될 수도 있다. 사실상 언제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위험 부담을 지니고 주로 이용되는 개인이나 그룹들이 있고, 그 구분이 사회 경제적 수준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계급착취의 한 형태가 될 것이다.

위험은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 짊어지고 이익은 부유한 사람들이 차지하는 경우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정의의 문제이다.

손해나 고통에 대한 충분한 보상은 또한 실험의 장 안에서 정의를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것은 연구자가 행할 수도 있는 무책임, 태만, 사기 혹은 다른 범죄에 대한 일종의 벌로 해석될 수 있다.

 

실험대상으로 봉사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사람들은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는가? 생명의학 연구로부터 나온 지식의 혜택이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함으로, 모든 사람들은 연구대상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런 지식을 형성하는 과업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왔다.

그러나 의학연구의 이익이 모든 사람에게 항상 유용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러한 이익이 조금이나마 유용하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의학연구 결과로부터 나온 약이나 치료법, 기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그리고 사실 연구비용은 의료관리비용을 증가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런 상황 아래서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를 말하는 것은 솔직하지 않다.

 

윤리적으로 오점이 있는 지식의 이용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연구로부터 얻어진 지식의 사용은 훔친 물건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치에 의해 수행된 잔인한 유대인 인간 실험을 통해서 얻어진 유용한 의학적, 과학적 정보가 그 예이다. 하지만 이렇듯 건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얻어진 지식의 사용을 훔친 물건을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포기해야 할 책임이 있는가?

윤리적인 오점이 있는 지식을 만약 포기하고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실험 대상들의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지식을 이용한다면 비정상적이고 착취적인 수단을 통해 얻어진 결과물을 묵과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따라서 윤리적으로 오점이 있는 지식을 이용할 때에는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처벌하고 이를 통해 미래에 또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엄격한 법의 집행이 함께 이루어 져야 한다.   

 

신뢰와 신용

기술적으로 올바른 인간 대상 실험을 위한 안전장치는 윤리적 건전성의 확보를 위해 주요 개념들을 이해하고 명백히 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윤리적으로 건전한 실험의 핵심 요소로서 동의의 확인이 주로 실험 대상을 피해로부터 보호하고 그들의 자율성을 보존하는 법적인 수단이라는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연구자들을 보호하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여긴다.

보다 이상적인 것은 ‘연구자는 그의 우월한 지위와 그에게 거는 기대와 믿음 때문에 그의 의뢰인에 대해 전심전력하는 충성과 헌신의 의무를 지닌다’. 이것은 목표를 공유하면서 생긴 상호간의 신뢰가 형성된 관계이다.

 

3. 인간 배아와 태아에 대한 실험

살아있는 인간배아와 태아를 이용한 실험에서 야기되는 윤리적인 문제는 앞에서 논의한 인간 대상 실험과는 다소 다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자율성이나 동의로부터가 아니고 배아와 태아 자체가 권리를 가지는지에 대한 지위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대상의 실험일 경우, 그 실험으로 인해 인간의 목숨이 위험하다면 아무리 좋은 의학적 목적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 실험은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인 도덕적 동의가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도덕적 동의는, 배아연구 윤리에 대한 논의의 시발점이 연구목적으로 인간을, 인간의 목숨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될 수 없다는 것에 전제가 된다.

 

배아를 사용하는 연구에서 정당화 문제는 항상 논의에서 최전면에 놓이곤 한다. 즉 언제부터 인간이냐 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이는 인간 배아와 태아에 대한 실험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면 먼저 수정의 초기단계와 배아의 발단단계에 대해 명확히 알아야 한다. 일반적인 여성의 경우에 난소에서 만들어진 난자가 나팔관을 따라 이동해서 정자와 만나고 거기에서 수정된다. 수정된 난자는 처음 4일동안은 세포를 만들고, 다음 10일 동안은 태반, 양막, 탯줄 그리고 다른 막들이 형성된다. 이렇게 14일이 지나고 나면 중추 신경계와 척추를 형성할 원시선이 만들어 지고, 8주가 지나면 신체의 모든 기관과 장기가 형성되어 배아가 아니라 태아가 된다. 즉 수정 순간을 인간 시작으로 본다면 배아 및 태아 연구는 근본적으로 불가능 하다. 하지만 14일이전의 배아를 아직 인간으로서의 특성이 드러나기 전의 세포로 인식한다면 14일 이전의 배아에 대해서는 실험이 가능할 것이다.

 

배아의 사용으로부터 야기된 윤리적 문제는 개인적인 도덕성 문제라기보다는 공적인 문제로 여겨졌다. 즉 연구를 위해 살아있는 배아의 이용을 허용하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것의 허용 여부는 즉각적으로 법적인 문제가 된다.

일반적으로 입법의 전제는 전반적으로 공리주의자의 손해-이익 비교에 기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임의 경감이 가장 큰 이익이라는 점을 받아들였다. 게다가 논의를 진행하면서 배아를 사용하는 연구로부터 나오는 다른 이익들이 보다 명확하게 알려질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자연유산의 원인을 밝히는 데도 유용할 수 있고, 새로운 피임법이 발견될 수도 있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아의 초기단계에서 잘못된 유전자를 찾아낼 가능성과 더 나아가 그것들을 대체할 가능성이 앞으로의 연구를 통한 아마도 가장 큰 이익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 의회는 유전병을 없애거나 줄일 가능성에 입각하여 배아 연구 실험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배아 실험을 통한 인간에게 주어질 많은 이익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는 듯이 보인다. 중추신경계가 아직 현성되지 않은 초기 배아는 연구 과정에서 이용당하더라도 어떤 고통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고통을 느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 배아이기 때문에 다른 연구 재료와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른 인간 실험에 있어서는 오직 그 연구가 실험 대상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이익이 되는 경우에만 실험에 이용될 수 있다. 하지만 배아는 동의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궁에 착상되는 것이 아니라 파괴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연구로부터 오는 이익은 배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묵과 할 수 없는 일이듯이, 배아 연구에 있어서도 배아가 인간이고 살아 있는 것이라는데 동의 한다면 연구를 위해 이들을 이용하고 파괴하는 것은 잘못이다.

 

배아 연구에 대한 허용 여부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으며 영국에서는 허용 되지만, 미국에서는 위의 이유로 정부 기금을 사용한 배아 연구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배아연구를 완전히 금하지 않는 나라의 경우에는 수정으로부터 14일 까지의 배아를 사용하는 연구를 허용하고 있다. 14일이 기준에 되는 이유는 수정 후 14일 직후부터 중추신경계와 심장, 뇌가 빠르게 발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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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에이즈

 

  대웅

 

 

목차

1. 에이즈란 어떠한 병인가?

 

2. 약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2-1. 의약품 접근권에 의한 인간 죽음

   2-2. 자유무역협정(FTA)이 사람을 죽인다

 

3. 개발도상국에서의 보건 자원의 할당

 

1. 에이즈란 어떠한 병인가? (에이즈는 불치병인가?)

의학이 발달하면서 에이즈는 감염사실을 조기에 발견해 적절한 치료를 꾸준히 받으면 완치되지는 되지 않더라도 고혈압처럼 관리 가능한 질환임에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는 그들의 숨을 조르며 '질환'에 의해서가 아닌 '자살'에 의한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에이즈 바이러스(HIV)에 감염된 환자에게서 유발되는 에이즈는 감염 3~6주 후 감기 몸살 같은 증상이 1~2주 나타나다가 회복되고 이후 10여년간 증상이 없는 잠복기가 지속된다.

그리고 그 동안 바이러스가 감염자의 면역 세포를 파괴해 계속 증식하면서 결국 면역 기능의 손상을 불러와 잠복기 말기에는 에이즈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최근에 개발되고 있는 새로운 치료법은 에이즈 바이러스의 최적 증식 장소인 림프 조직에까지 효과를 미치는 것으로 보이고 있어, 환자의 체중, 기력, 면역 기능이 회복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실제로 미국과 프랑스 등 보건 당국은 에이즈 환자의 사망률이 1998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선 것도 새로운 복합 치료제 덕분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처럼 의학이 발달하면서 에이즈 치료제도 함께 발전해 현재 대부분의 에이즈 환자는 지속적인 관리와 치료만 수반된다면 완치 대신 삶의 연장을 할 수 있게 됐다.

강문원 강남성모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모든 에이즈 환자는 아니나 대부분의 에이즈 환자는 약을 꾸준히 복용하고 지속적인 검사를 한다면 일반적으로 삶의 연장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약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에이즈 환자 중 극히 일부이다.

 

2. 약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다국적 제약회사들은 신약 개발을 위해 높은 약값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다국적 제약회사들은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데 8천억원이 든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약값은 높게 책정하지 않으면 또 다른 신약을 개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부풀려진 금액이다.

한국 화이자제약 부회장인 아멕 픽션은 2006 6월 한국 보건복지부의 약값절감정책에 대한 반대 기자회견 자리에서 신약의 가치는 생명과 삶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줌으로 특히 불치병 환자들에게 혁신적 신약이 갖는 가치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이며, 자신들의 목표는 약값을 내려서 약에 대한 접근성을 낮추는 것, 즉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접근성을 높이는 것, 즉 약값을 많이 받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2-1. 의약품 접근권에 의한 인간 죽음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에이즈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의약품 접근권 때문에 죽는다.

에이즈 치료제의 기적의 약, 꿈의 약 푸제온을 예로 들이 이야기 해 보자.

우선 에이즈 환자들에게 생명의 희망이 되고 있는 로슈(Roche) 제약사의 ‘푸제온’이란 약은 어떠한 약인가? 푸제온은 다른 에이즈 치료약과 달리 내성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혁신적인 에이즈를 치료약이라고 한다.

AI 치료제 '타미플루'로 유명한 다국적 제약사 로슈의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은 기존의 에이즈 치료제에 내성이 생긴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어 심평원에서 두 차례에 걸쳐 필수의약품으로 지정받았다. 현재 푸제온은 보험약가 24996원에 보험에 등재돼 있다.

 

그러나 '푸제온'을 개발한 다국적 제약회사 로슈는 정부와의 약가협상에서 정부가 제시한 약가가 3970원으로 조정돼야 한다며 4년째 국내에 공급하고 있지 않다.(의약품이 국민에게 공급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보험적용 여부를 결정하고 건강보험공단이 제약회사와 약가협상을 통해 약값을 결정, 국민에게 공급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따라서 정부와 제약회사간의 이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을 경우에는 협상이 결렬되고 해당 의약품은 시장에 공급되지 않게 된다.)

이에 한 에이즈 환자가 '푸제온'을 공급받지 못해 면역력이 약해져 한쪽 눈이 실명되는 등 인권을 침해당했다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이 에이즈 환자는 진정서에서 '내성으로 인한 기회질환에 시달리는 에이즈 환자들에게 푸제온은 반드시 필요한 필수약제이며 로슈의 공급거부는 명백한 생명권 유린이자 인권침해'라고 말하며 '푸제온'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강제실시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강제실시권이란, 국가가 자국민 건강 보호를 위해 특허에 의한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고, 제네릭의약품(복제약)을 생산할 수 있는 권리로 세계무역기구 무역관련 지적재산권협정(WTO/TRIPs) 상에도 공중보건을 위해 특허권자의 허락 없이 제3자나 정부가 복제약을 생산, 공급할 수 있도록 "의약품 특허에 대한 강제실시"가 가능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에이즈 약에 대한 강제 실시는 태국과 싱가포르 등 개발도상국과 유럽에서도 실시되고 있다.

 

 

 

2-2. 자유무역협정(FTA)이 사람을 죽인다?

약값이 이렇게 비싼 이유는 무엇인가? 95 WTO 가 출범 되면서 그 이후에 계발된 약들은 그 약에 대한 특허권을 가지게 되었고, 특허를 가진 기업 이외에는 그러한 신약에 대한 연구 성과를 공유 할 수가 없음으로 자연스럽게 95년 이후에 생겨난 신약은 값이 비싸게 되었다. 따라서 불치병이 아님에도 불치병으로 불리게 된 병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치료약이 있으나, 이를 사먹을 돈이 없어서 죽는 인구는 일 년에 천만명 이며,   병명은 말라리아, 결핵, 에이즈 이다.

그나마 각 나라의 정부 차원에서 약에 대한 접근권을 낮추기 위해 "의약품 특허에 대한 강제실시"를 통해 복제약을 만들어 공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인해 이러한 시도도 못하게 되었다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하게 되면 저작권에 관한 법률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국 국영제약회사가 만든 질라비드는 글락소스미스클라인에서 생산하는 에이즈 치료제 콤비드의 복제약이다. 태국은 국가 사업차원에서 국영 기업을 통해 질라비드를 생상하여 돈이 없어 에이즈 치료를 받지 못하는 국민들을 치료하기 시작 하였다. 질라비드는 콤비드의 1/6 가격으로 이를 통해 수많은 태국 에이즈 환자들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FTA를 통해 콤비드가 특허권을 행사하게 되면 태국의 국가 에이즈 치료 프로그램이 붕괴되어 수많은 태국 에이즈 환자들이 죽어 갈 것이다.

 

2006년 제 16차 국제 에이즈회의가 열린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다국적 제약기업인 ABBOTT의 행포와,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한 생명포기 각서를 쓰게 된 에이즈 환자들 문제가 주 의제였다. ABBOTT사는 ‘칼레트라’라는 에이즈 치료약을 생산하고 있지만, 이 약은 제 3세계에서는 판매를 하지 않는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에이즈 치료를 위해 복제약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자국민 중에 에이즈 환지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ABBOTT사는 말레이시아의 복제약이 자신들의 회사의 약인 ‘칼레트라’에 대한 저작권을 침해하였음으로 생산과 판매를 중단 할 것과, 자신들의 약을 고가에 구입 할 것을 자유무역 협정을 명분으로 내걸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세계의약품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 제약회사들은 FTA를 통해서  그 특허권을 더욱 강화하고자 한다. 지금 현제도 제약회사는 이윤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서 연구를 할 것인지, 그 연구 된 약을 생산을 할 것인지, 그리고 생산한 약을 판매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따라서 그들의 수지에 맞지 않으면 치료약이 개발되어 있어도 한번 먹어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이렇듯 너무 비싼 신약 가격으로 인해 사람들은 약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죽어간다.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약값을 일부 내린다 해도 하루 1~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 사람들이 1년에 500달러의 약값을 지불할 수는 없다.

 

3. 개발도상국에서의 보건 자원의 할당

개발도상국에게 중요한 윤리 문제들 중 하나가 바로 에이즈 퇴치를 위한 자원의 할당이며, 이것은 보건 분야를 위한 자원할당에서 지속적으로 방생하는 문제와 결부되어있다. GNP 2% 미만이 보건 분야에 할당되는 상황에서 효과적인 에이즈 퇴치운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다수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소득의 상당 부분을 국방을 위해 지출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각종 사회 부패에 의해서 의료 해택을 위한 자원이 부족한 상태이다.

에이즈 치료 비용은 개발도상국의 에이즈 환자 대다수에게는 너무 비싼 비용이 든다. 그리고 비록 이들 나라의 대부분이 무료 치료를 제공하는 보건체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치료비용은 극히 제한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에서는 공중 보건체계를 통해 현제 박을 수 있는 건 항레트로바이러스 약 뿐이다. 다른 약을 구하는 경제적인 부담은 환자의 능력이다.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은 국가 보건체계가 이런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에이즈에 감염된 환자들에게 단백질분해요소 억제제, 뉴클레오티드 유사체와 같은 치료약을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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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존재론

철학 2009. 2. 12. 19:09 |

플라톤의 존재론                         

대웅

 

들어가기 전에. 존재론이란?

철학사적으로 볼 때 '존재론'이라는 명칭은 비교적 늦게 형성되었지만, 그러나 그 학문의 내용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철학의 일부, 아니 핵심부를 이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Organon]과 형이상학[Metaphysica] 등에는 이미 거의 모든 존재론의 문제들이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322/1) "존재자로서의 존재자(to on he on)와 이것에 자체적으로 귀속되는 것에 관한 학문이 있다"(Aristoteles, Metaphysica, 1003a 21/22)고 하면서 이 학문을 "제일철학"(prote philosophia)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말해진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와 이 존재자에 본래적으로 속하는 것은 '존재자의 있음[존재, hoti esti]과 무엇임[본질, ti esti]'으로 해석되어 중세와 근대 초의 형이상학의 핵심 문제가 된다. 그러나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란 어떤 특정한 존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존재한다[있다]'는 술어가 속할 수 있는 일체의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존재론의 대상은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인 한, 바로 그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 까닭[이유, 원인, 근거, 목적]의 탐구가 된다.

 

플라톤이 생각한 존재론

이데아란 무엇인가?

플라톤 존재론의 핵심은 ‘자체적 존재’ 개념이다. 이 개념은 존재론적, 인식론적 사유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개념들 (의미, 보편자, 추상체, 성질 자체, 실재, 실체, 물 자체, 선험적 존재)에 앞서는 개념이다. 플라톤은 경험계의 사물들이 지닌 성질이나 속성의 모델이나 원형에 해당 하면서도 이들과는 분리되어 독립해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형상, 그리스 어로 이데아(idea)이다. 만약 이러한 이데아들이 감각적 사물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우리가 감각에 의해서 만나게 되는 세계 즉 감각계 (혹은 현상계)는 일상적인 개별물들 예컨대 나무, , , 사람, 별 등등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고 이데아계 혹은 초감각계는 개념대상 즉 이데아들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이다전자는 감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세계인 반면에 후자는 우리의 지성에 의해서 인식되는 세계이다

즉 이데아는 진정한 실재이고 인식의 대상을 넘어선 감각계 사물들의 원형이며, 나아가 우리 행위의 준거 역할을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언어의 근거가 되며 그 언어를 바탕으로 한 우리 사유 활동의 근거가 된다.

이데아는 이렇듯 자체적으로 존재하며 존재의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최상위를 차지하는 것이 선의 이데아이며, 바로 이러한 선의 이데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목적과 방향을 부여한다.

 

최상위 존재로서 선()의 이데아

플라톤은 <국가>에 나오는 선의 이데아를 최상의 형용사들을 동원하여 기술하고 있다. 선의 이데아는 플라톤의 윤리학은 물론, 윤리적 삶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것 중에서 가장 최 정점을 차지하는 이데아이다. 그렇다면 선의 이데아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국가> 6권에서 철인이란 형상들을 사랑하는 자로서 그의 가장 중요한 탐구 대상이 선의 이데아라고 말한다. <국가>에 등장하는 태양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가 모두 선의 이데아를 드러내기 위한 비유이다.

우선 태양의 비유를 살펴보면, 태양 빛이 없이는 그 어떤 가시적인 존재도 우리 눈앞에 스스로 보여 질 수 없다. 따라서 태양은 가시적인 것에 가시성을 부여하고, 그것은 우리가 그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렇듯 이데아 또한 알려지는 것에 진리성을, 아는 자들에게 인식 능력을 불어 넣어 준다. 따라서 선의 이데아는 모든 존재와 진리와 인식의 근거이다.   

이데아는 본성상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이고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일체의 물질적 사물들은 이데아에 비해 열등한 존재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물과 이데아간에는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즉 개별물들은 이데아를 모방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동굴의 비유’를 제시하고 있다여기서 이데아와 개별물 간의 관계는 사물과 그것의 그림자에 비유되고 있다.

 

플라톤의 이원론 - 플라톤은 세계를 눈에 보이는 현상계(동굴 속에선 본 그림자)와 참된 실재인 이데아의 세계(동굴 밖의 태양에 의해 드러난 세계)로 양분했다. 현상계는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이며 이데아는 초감각의 세계이다. 현상계는 존재의 개별성을 가졌으나 이데아는 보편성을 지닌 영원불변의 세계이다. 플라톤은 현상계를 이데아의 그림자로 상정하고 원형의 실제계인 이데아를 지향하여 모방할 뿐이라고 했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개별물들이 이데아에 비해 열등하다는 사실로부터 플라톤은 자연의 변화를 목적론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그에 의하면 현상적 세계의 존재자들 즉 개별물들은 불완전한 존재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해지기 위해서 완전한 존재자인 이데아를 보다 닮으려고 노력한다. 즉 현상의 세계는 목적인 이데아를 향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데아(형상론)와 언어

플라톤의 이러한 이데아론은 다양한 철학적 기능을 하며, 여러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 준다. 이데아는 우리가 늘 사용하는 수많은 어휘들의 의미 근거이며, 경험적 사물들이 가지는 성질들의 존재론적 원인이 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한 문장을 이해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문장이나 그를 구성하는 어휘들이 표현하는 객관적 사태에 대해서, 그 의미를 안다는 뜻이다.

 

“다수의 사물들을 하나의 동일한 표현에 의해 기술할 대마다 우리는 매번 어느 하나의 고유한 형상을 상정하는 습관이 있다.

 

다수의 서로 다른 사물들을 하나의 동일한 표현에 의해 우리가 기술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물들을 넘어서는 하나의 형상이 존재하며, 그 다수의 사물들이 이 형상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이름을 가진 수많은 개별 사물들을 사유의 눈으로 파악하면 하나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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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사상이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2007080006 강대웅

 

 현대인들을 현대 이전의 시대 사람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 주의, 그리고 과도한 욕심으로 인한 자연 파괴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문제일 지도 모른다.

 왜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다른 사람의 그것 보다 우선시하는 것일까? 왜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 하게 된 것일까? 왜 자신들의 욕망으로 인해 자연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파괴해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현대인들이 진리에서 마음이 멀어졌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여 자신의 육체의 기쁨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욕망하는 것에서 이 모든 문제가 나온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다 보니 나의 옆집에, 그리고 윗집 아랫집에 어떤 이웃이 사는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옆집에서 불량 만두를 만들어서 파는지, 아랫집에서 불량 기름을 만들어서 파는지 관심이 없게 된다. 그리고 그들 또한 자신의 경제적 욕심만 채우면 그만일 뿐,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불편을 겪거나 탈이 난다고 해도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질 만능 주의는 이러한 개인주의에서 나온다. 무분별한 자연 파괴와 개발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식물들의 입장은 고사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귀한 자연 환경마저도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파괴하고 개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희랍 사상에서는 소크라테스와 그 주변에 따르던 이들을 통해서 선에의 의지를 가지고 진리를 추구하는 참 철인의 모습을 현 시대의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이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였다. 이들이 추구하여 알았던 진리는, 중요한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하늘 위의 이데아에서 온 것이며, 이 세상 모든 것은 것 또한 이데아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자신의 영혼을 닦아서 진리를 알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육체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너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자신의 욕심만을 생각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한번이라도 둘러보고 생각하게 되며, 나의 나쁜 생각과 행동이 결국은 내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나와 내 육체를 통한 욕심을 버리고 영혼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이를 통해 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희랍 철학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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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사유란 무엇이며, 철학함이란 무엇을 뜻하는가그리고

철학적 사유와 철학함을 이행하는 방법과 과정은 어떠한 것인가?

 

대웅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호기심, 자신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인간의 본성, 본질, 의미, 가치 등을 궁금해 한다. 이러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 인문학,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철학은 인문학 중에서도 이러한 인간이란 무엇인가 대한 질문에 가장 근본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은 인간에 대한 이러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진실,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즉 앎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학문으로써 인간의  굼금증을 해결 하려고 하는 학문인 것이다.

철학에서 이러한 앎을 얻는 방법은 이성적 사유 활동을 통하여 끊임없이 의문을 가져서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본질에 다다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철학은 이성으로 하는 것이지만 이성만으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이성으로 의심하고 의심하여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본질을 알려고 한다면 결국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바로 그것뿐(Cogito, ergo sum)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관을 통하게 되면 의심할 수 없는 것, 우리가 알고자 하는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 이러한 합리적이고 연역적인 이성적 사유 활동을 통해 직관하는 능력을 연마하여, 근본의 근본을 탐구하면서 최초의 근원에 도달하려는 활동이 철학이고 철학적 사유이다

그렇다면 철학 함이란 문엇인가? 철학함 이라는 것은 곧 이러한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는 고장되어 있지 않으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언어란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것임으로, 거기에 본질 그 자체인 것을 밀어 넣으면 변형되어, 그 자체를 언어로 드러내지 못한다. 따라서 진리는 언어로 된 지식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얻어야만 한다.

선각자, 이러한 진리를 먼저 깨달고 실천한 이라고 전해지는 사람으로는 부처님과 예수님이 있다. 이들이 철학자로 분류 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들이 인간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들이 깨달은 진리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 그리고 ‘자비’ 이다. 이것은 곳 인간에 대한 인간 상호간의 존중과 이해를 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믿는 것,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 씩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은 옳다고 생각 하면서도 타인의 생각은 틀렸다고 쉽게 치부해 버리곤 한다. 그렇다면 너와 나가 다르지 않은, 공통된 진리는 무엇인가? 철학으로 이러한 참 진리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나를 버리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너와 나가 다르지 않고, 너와 나의 진리가 같다는 것, 즉 참 진리를 얻으려면 나를 버려야 한다. 결국 나를 비워 낸다는 것은 내 육체에 대한 사랑, 육체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 쾌락, 욕정, 욕심 등을 버리는 것이다. 이렇듯 나와 내 육체를 잊고 영혼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면, 나를 버리고 그 비워진 자리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나를 버리고 너와 세상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 바로 비워 냄으로써 본질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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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론의 논변들                        

강대웅

 

 

 신은 존재 하는가? 신이 존재 한다는 것을 인간은 어떻게 알수 있는가? 신이 있다는 것은 종교를 믿으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종교를 가지고 있으나 회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인장할 수 있는, 믿음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신의 존재에 대해 증명할 수 있을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학문적으로 증명한 여러 주장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존재론적 주장과 우주론적 주장, 그리고 설계론적(목적론적)주장이다. 존재론적 주장은 신이 존재하지 않음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우주론적 증명은 세계에 관한 경험적인 사실로 시작하여, 이러한 사실들의 원인을 설명하려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무한 한 연쇄로 우연히 일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필연적인 존재, 혹은 제1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설계론적 주장은 세계의 질서·아름다움, 그리고 명확한 목적성이 이 세계를 설계한 지성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존재론적 주장

 존재론적 주장은 주로 종교적 지성인에 의해 사용되어진 주장으로서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상상할 수 없다는 신앙적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만약 최상의 완전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음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1. 사람들은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2. 가장 위대한 존재자가 마음속의 관념으로서만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3. 실재하는 존재자는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것보다 더 위대하다.

4.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보다 더 위대한 존재자, 즉 실재하는 존재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5. 그런데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보다 더 위대한 존재자는 없다.

6. 그러므로 가장 위대한 존재자는 실제로 존재한다.

 

 이러한 존재론적 주장을 한 안셀무스는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즉 신)를 모르는 사람도 존재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일단 신의 존재, 가장 위대하면서 가능한 존재자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대는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안셀무스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고닐로는, 우리는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를 생각 하거나 실제로 이해할 수 없음으로 그의 첫 번째 논변 부터가 잘못 되었다고 말한다.

 현대의 안셀무스주의자들은 적절한 신 개념은 논리적인 필연성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신은 최대로 완전하다고 생각 되어져야 하고, “위대한 존재자가 갖춰야 할 상호 양립가능한 속성들의 최대로 완전한 집합을 필연적으로” 그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필연적 존재는 위대하게 만드는 속성이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존재함이 하나의 정의에 포함될 수 있는 속성이나 서술이라면, 그리고 신의 정의에 포함되어야만 하는 바람직한 속성이라고 한다면 존재론적 논증은 타당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존재가 존재함이라는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존재함이 문법적으로는 서술어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는 아주 다른 논리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는 신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하나의 입증으로 간주되는 존재론적 논증은 실패하게 된다

 

 

우주론적 주장

 우주론적 증명은 세계의 개체사물이나 그 존재의 사실성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신을 그 궁극적 원인으로 추론하며, 세계가 그 자체의 이해능력과 존재를 초월하는 어떤 존재에 의존해 있다고 본다. 우주론적 증명의 고전적인 진술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Summa Theologica(1부 제2 3)에 실려있다. 우주론적 주장은 세계에 관한 우리의 경험적인 사실들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의 존재, 우연적 존재자들은 인과 조건들의 무한한 연쇄로는 설명될 수 없음으로 이러한 것들의 원인이 되는 필연적 존재자, 혹은 인격적인 작인이 존재해야 그런 사실들이 설명된다고 말한다. 우주론적 논변은 두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클락, 테일러 등이 주장한 바에 의하면 제일 원인은 반드시 시간상의 최초 원인이 될 필요는 없지만, 다른 모든 것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의존해야 하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우주론적 증명의 또 다른 형태는 알 킨디와 알 가잘리라는 아랍 철학자들이 주장한 칼람의 논변으로 시간상의 제일 원인을 논증한다.

 

칼람의 우주론적 주장

1. 존재하기 시작한 모든 것은 그것의 존재 원인을 갖는다.

2. 우주는 존재하기 시작했다.

3. 그럼으로 우주는 그것의 존재 원인을 갖는다.

4. 현실태적 무한(actual infinite)은 존재할 수 없다.

5. 사건들의 시간적 연속으로서 시초가 없는 연속은 현실태적 무한이다.

6. 그러므로 사건들의 시간적 연속으로서 시초가 없는 연속은 존재할 수 없다.

 

 전제 1은 직관적으로 명백하여 모든 것이 무()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하지 않는 한 참이다. 이러한 칼람 우주론적 논변은 이슬람교에 있어서 신이 존재함에 대한 표준적인 증명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구 철학자들은 무한한 시간적 소급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서구의 철학자들이 주장한 또다른 우주론적 주장에서는 무한한 시간적 소급들이 가능함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신이 존재함에 대한 다섯가지 증거들을 그가 어떤 공시적 질서라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특징들 - 동작(변화), 인과작 행위, 생성, 소멸하는 존재들, 가치의 등급, 그리고 질서 - 위에다 근거를 둔다. 이들은 비록 세계가 시작이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세계를 성명하기 위해서는 신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존재하며 그 신이 모든 것의 존재함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변화나 인과관계 같은 것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아퀴나스는 무한한 시간적 역행들이 가능함을 인정한다. 각각의 변화나 인과행위는 앞의 것에 의해서 선행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일제히 일어나는 일련의 변화나 원인은 반드시 첫 번재 것들 - 그 자신 변화의 요소이기는 하지만, 다른 것으로부터 파생되지 않거나 파생될 수 없는 변화나 인과 행위의 영향을 받지 않는 행위 - 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변화나 인과적 행위의 궁극적 근거는 신이다.

 

1. 만약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이거나, 또는 어떤 다른 것들이 그것을 존재하도록 원인을 제공한다.

2. 우연적인 존재가 존재함은 칠연적인 것이 아니다.

3. 하나의 우연적인 존재는 어떤 다른 존재에 의하여 존재하도록 만들어 졌다.

4. 일련의 우발적인 존재들은 첫 번째 것을 가지고 잇거나, 또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5. 만약 그 시리즈가 첫 번째 존재를 가지고 있다면 그때는 하나의 필연적 존재가 존재하며, 이것이 그 첫 번째 존재를 존재하게 만든다.

6. 만약 일련의 우발적 존재들이 첫 번째 것을 가지지 않는다면 하나의 필연적 존재가 존재하며, 이것이 시리즈 전체를 존재하게 만든다.

7. 만약 우발적인 것들이 존재 한다면, 그 존재들이 있게 한 필연적인 존재가 존재한다.

8. 우발적인 존재들은 존재한다.

9. 하나의 필연적인 존재가 있으며, 이것이 우발적인 존재들을 존재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우주론적 주장의 이러한 3번과 6번으로 부터의 추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타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주론적인 주장은 충분한 이유의 원칙 위에 의존한다. 그 원칙의 가장 강한 변형은 신의 자유와 모순 된다. 약화된 변형들은 모순되지 않으며, 그 주장의 결론을 이글어 내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하다. 충분한 이유의 원칙은 하나의 실용적인 일반화로, 합리적인 사고의 전제 조건으로, 그리고 필연적인 진리로 이해되어져 왔다. 그 원칙은 인간 탐구의 성공으로부터 약간의 지지를 받는다. 그것은 이성의 요구를 나타낼 수도 있으며, 어떤 것들을 필연적인 진리로 승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약간의 지지를 보내며, 그 원칙의 약한 변형들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어떤 강한 이유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약화된 변형 중의 어떤 것은 그것에 대한 반대안보다 더 타당할 수 있다.

 

존재론적(목적론적)주장

 존재론적 주장은 유신론적 주장 중에서 가장 널리 널리 통요되어온 주장이다. 목적론적 증명은 세계에 있는 사물이 종말이나 목적을 위해 기능을 발휘하는 우주의 기능적 질서를 관찰하는 데서 출발한다. 의도적인 행동은 결국 이지적(理智的)인 목적을 지닌 존재가 계획하거나 감독하는 것이라는 이 논증은 최종 원인에 관한 개념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자면 우주론적 논증의 한 형태이다. 이러한 논증을 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데이비드 흄을 둘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논증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우주를 질서정연한 기계로 간주한다. 설계론적 주장은 우리가 살고있는 현상 세계에 존재하는 특징 - 아름다움, 인식될 수 있는 질서, 생명 지각 등 - 에 의존한다. 즉 이 세계가 지적인 설계를 보여주는 흔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 만든 그 어떠한 것 보다 복잡하지만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질서 정연하다. 따라서 이러한 것을 설계하고 창조한 완벽한 존재의 흔적을 그 자연 안에서 찾을 수 있다.

 18, 9세기 설계론적 주장은 동물의 신체 구조, 눈같은 부분, 그리고 위성의 움직임에 중점을 두었다. 이 주장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들은 그러한 것들이 분명한 설계를 보여준다는 것은 인정 하지만, 그것들이 과학에 의해 가장 잘 설명된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면 비평가들은 동물의 신체 구조와, 부분들이 설계자 보다는 진화론에 의해서 더 적절하게 설명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현대의 설계론적 주장의 옹호자들은 우주의 보다 보편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설계론적 주장이 비록 성공적일 지라도 그것은 단지 세계가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정신의 목적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은 이 마음이 전지전능 하다거나, 완벽하게 선하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 증거가 몇몇의 협력하는 설계자가 있기 보다는 단지 하나의 신적인 정신이 있다는 것조차도 보여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설계론적 주장은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근거를 확립해 주지 않는다

 

 

참고 서적

종교의 철학적 의미 / 마이클 피터슨 외 / 종호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 2005

종교 철학, 4개정판 / H / 김희수 / 동문선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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