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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2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은 무엇인가 - 인도철학특강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은 무엇인가

 

 

   강 대 웅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 속에서 주인공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은 무엇이고, 이를 얻기 위해 어떤 단계들을 거치는지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인도인들이 추구하였던 네 가지 가치와 삶의 네 단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소설속의 싯다르타는 인도인이며 이러한 인도인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와 삶의 단계를 통해 그의 삶과 그가 추구하였던 것을 정리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인이 삶에서 추구하는 네가지 가치

 인도인들은 그들의 삶의 가치를 아르타, 카마, 다르마, 목샤에서 구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들의 삶도 네 단계로 나누고 있다.

 ①아르타 - , 세속적 번영, 이익, 소유의 성취.

아르타는 가족을 부양하고 이끌어 가는데 필요한 일상생활의 모든 것과 종교적 의무를 다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다. 물질적 제화 없이 삶은 영위될 수 없으며, 공물 없이는 제사를 지낼 수 없다.

 ②카마 - 음악이나 연극 미술등 예술적 문화적 삶을 통해 드러나는 즐거움, 좁은 의미로는 사랑, 성적 욕망, 쾌락.

아르타의 가치는 결국 그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카마, 즉 즐거움에 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과 희생을 대가로 하는 카마의 추구는 옳지 못함으로, 이를 위해 카마에는 다르마가 전제 되어야 한다

 ③다르마 -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개인의 종교적 도덕적 의무.

인간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동시에 사회 복지에 기여함으로써 사회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게끔 하는 이념이 다르마이다.   

 ④목샤 - 해탈, 절대 자유의 경지

진정한 쾌락과 행복이 여기에 있으며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아르타와 카마는 육체의 쾌락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다르마는 이러한 개인의 육체적 쾌락이 타인의 고통이나 희생을 요구하지 않게 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그 이상의 것, 즉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죽지 않는 상태를 바란다. 이것이 목샤이다.

 

인도인의 삶의 네 단계

 인도인들은 삶을 네 단계로 구분함으로써 현실적 삶과 해탈에 대한 추구를 조화시키고 있다.

 ①학생기 - 부보의 슬하를 떠나 다르마를 공부하고 삶에 필요한 기술과 음악, 과학 등을 배우는 시기. 이 교육 제도를 통해 종교적, 철학적 기초를 습득하여 이후 삶의 기초가 되는 성품과 마음가짐을 훈련한다.

 ②가주기 - 집으로 돌아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경제 활동을 하는 시기. 인도인은 태어남과 동시에 세 가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베다를 공부함으로써 스승과 성자에게, 자식을 번창시킴으로써 조상과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고 공물을 바침으로써 신들에게 보답하는 것이 그 빚을 갚는 것인데, 이 가주기는 이러한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시기이다.  
③임서기 - 세속의 의무를 다한 이들이 해탈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소유를 버리고 수행하는 시기. 이 시기는 더 이상 욕망과 쾌락에 물들지 않아야 함으로 인간으로써의 욕망과 의무를 다한 자만이 숲으로 들어갈 수 있다. 절제와 금욕, 고행의 삶을 사는 이들을 침묵의 성자(무니)라 부른다.

 ④유행기 -세속의 욕망을 완전히 떠나는 시기. 세속에 대한 완전한 포기로 인해 살아 있지만 더 이상 살아있는 존재라 하지 않는다. 단지 생물학적인 죽음만이 남아 있음으로 죽어도 일반적인 장례는 치르지 않고, 삼마디라는 의례를 치른다.

 

      

1 <바라문의 아들>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이시기의 싯다르타는 부모님의 슬하에 있으면서 좋은 음식과 좋은 교육을 받으며 아버지 같은 훌륭한 바라문이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고행하고 사색하고, 침잠하는 것에 관심을 쏟았고, 우주의 최고 원리인 범()을 추구하였으며 아트만 속에 있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누구보다 존경할 만한 바라문인 아버지조차 근원적으로 행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으며 제사를 지내거나, 경전을 뒤적이거나, 바라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언제나 성스러운 샘물가에 목을 축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싯다르타는 자기 자신의 자아 속에 있는 근원적인 샘물을 찾아내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 삶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최초의 각성이 고뇌를 끊기 위한 싯다르타의 탐구 여행의 시작이다. 싯다르타는 자신을 둘러싼 평온한 환경을 떠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친구 고빈다와 함께 고난의 길인 사문의 길로 들어선다.  

 

1 <사문들과 함께 지내다>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사문들에게로 나아가 가르침을 받는 이 시기의 싯다르타를 인도의인 삶의 네 단계 중 ‘임서기’로 분류할 수 있다. 부모의 슬하를 벗어나 교육을 받는 학생기를 거쳐서,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가주기를 거친 후에, 그 의무를 다한 사람만이 임서기에 들어 수행을 하게 되는 것이 보통의 삶의 순서이지만 싯다르타는 이런 학생기와 가주기의 단계를 뛰어넘어서 바로 임서기에 들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싯다르타는 인생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극심한 고통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자아로부터 벗어나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닌 상태가 되기 위해 수련을 시작한다. 만약 일체의 자아가 극복되고 사멸된다면, 만약 마음속에 있는 모든 욕망과 모든 충동이 침묵한다면, 틀림없이 궁극적인 것, 그 위대한 비밀에 눈뜨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싯다르타는 사문들 가운데 최 연장자의 가르침을 받아 자기초탈 수련과 침잠 수련을 하였으며 이를 통해 자기 마음의 객관화를 이루고 자아를 벗어는 많은 길들을 배운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은 인생의 고통과 무의미함을 잠시 동안 마비시킬 수는 있지만,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사문들의 곁을 떠나 또 다른 가르침을 찾아 떠난다.  

 

1 <고타마>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사문의 곁을 떠나서 거룩한 세존인 부처를 만난 싯다르타는 번뇌와 번뇌의 유래, 그리고 그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에 대한 설법을 듣는다. 즉 인생은 번뇌이지만 부처의 길을 가는 자는 해탈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싯다르타의 친구 고빈다는 세존의 가르침에 귀의하지만, 싯다르타는 다시 길을 떠난다. 부처의 깨달음이 명백하며 진실인 것에는 의문이 없지만, 부처도 당신 스스로의 구도 행위로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것이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처는 진정 이 세상 모든 것의 생과 사의 법칙과 그 법칙의 단일성과 일체의 연관성을 드러내고 그로 인해 죽음으로부터의 해탈을 얻었지만, 그의 가르침 속에도 그가 그 진리를 깨달은 순간에 혼자 체험한 그 비밀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싯다르타는 가르침과 스승을 떠나 홀로 목표에 도달하든가 죽든가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1 <깨달음>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모든 가르침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난 싯다르타는 지금까지 자신의 수행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의 자아를 산산 조각내어 부수어 버리면서 정작 나 자신이 나한테서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나를 버려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면 스스로가 스스로의 스승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진리를 찾는 것은 나를 버리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이렇게 생각이 바뀌지 지금까지 무의미 해 보였던 이 세상이 다시금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싯다르타는 이제 다양성을 무시하고 통일을 추구하며 깊이 사색하는 것이 아닌, 다양성 자체에 진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따라서 더 이상 통일성과 단일성을 추구하려 숲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음으로 싯다르타는 마을로 향한다

 

2 <카말라>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이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진 그의 눈은 본질적인 것을 찾아 가시적 세계를 넘어선 피안의 세계를 목표로 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이 세상 안에서 고향을 찾고 단순 소박하게, 천진난만하게 세상을 바라보니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렇듯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세상을 바라고보며 새로운 세상을 배우기로 한 싯다르타는 마을로 들어서면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인 카말라에게 사랑의 기쁨을 배우기로 마음먹는다.

 

2 <어린애 같은 사람들 곁에서>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카말라의 마음과 시간을 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지만 사색하고, 기다리고, 단식할 줄 아는 싯다르타의 능력은 그런 일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상인인 카와스와미의 밑에 들어가 장사 일을 배우고, 그렇게 해서 생긴 이익으로 카말라에게 사랑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싯다르타는 가주기의 삶의 양태를 띄면서 사랑과 쾌락인 카마를 얻기 위해 아르타 (, 세속적 번영, 이익, 소유의 성취)를 추구한다. 하지만 그의 삶은 보통의 가주기의 사람들이 사회적 의무를 위해 일을 하고 가정을 꾸려서 자식을 낳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산다. 그는 다르마의 추구를 위해 일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을 위해, 자신의 배음을 위해 이 시기를 산다.    

 

2 <윤회>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싯다르타의 마을 생활로 인해서 그는 많은 세속적 성공과 재산을 얻게 되었고 카말라 곁에도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 속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았다. 그의 삶의 방향은 여전히 사색과 기다림, 그리고 단식의 기술에 의하여 정하여 지고 있었으며 어린아이 같은 속세의 사람들은 그에게 낮선 존재였다, 그리고 그 또한 그런 점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낮선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그는 차츰 세상의 덫에, 쾌락과 욕구, 태만과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려서 자신의 특기인 기다림과 사색, 단식을 할 수 없고 끊임없는 유희를 즐기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이러한 각성을 하게 된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과 안일한 삶, 끝없는 유희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고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2 <강가에서>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그의 마음은 권태와 번민, 그리고 죽음으로 가득 찼으며, 그를 유혹할 수 있는 것, 그를 기쁘게 하고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듯이 느껴졌다. 그는 죽음을 행해 나아가다가 홀연히 옴을 통해서 다시 각성하고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난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인생행로를 뒤돌아보며 이를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즉 자신이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졌던 것은 결국, 자비를 체험하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옴을 듣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올바로 잠을 자고 올바로 깨어날 수 있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그가 행한 수많은 오류와 돌아 돌아온 굴곡진 길은 결국 자기 자신의 아트만을 발견하기 위한 제대로 난 바른 길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가 속세의 부와 쾌락이 좋은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것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이제야 그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활로 인한 구토증과, 삶의 무의미함과, 절망에서 벗어나서, 이전의 탐욕자 싯다르타는 죽고 새로운 싯다르타가 잠에서 깨어남을 느꼈다.    

 

2 <뱃사공>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죽어있는 것과 같은 생활 속에서는 들려오지 않았던 내면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그 내면의 마음의 소리는 싯다르타에게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나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로운 이 강물 옆에 머물면서 이러한 진리를 배우라고 말한다. 이러한 진리는 곧 자신의 전생도 과거가 아니며, 죽음이나 범천에로의 회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니며,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것, 즉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인간이 시간이라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힘겨운 일과 적대감이 제거되고 극복되는 것이다

그는 뱃사공인 바주데바 곁에 머물면서 강으로부터 경청하는 법, 고요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영혼으로, 활짝 열린 영혼으로, 격정도 소원도 판단도 없이 귀기울여 듣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마을에 머물렀을 때 자신에게 사랑을 알려주었던 카말라를 다시 만나게 되고, 그녀의 죽음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싯다르타는 이러한 깨달음을 머리가 아니라 두 눈으로,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죽어가는 그녀의 얼굴에서 싯다르타는 그녀의 젊은 날의 모습과 늙은 모습, 그리고 자신의 늙은 모습과 젊었던 때의 모습을 동시에 보면서, 현제와 동시성이라는 감정이, 영원성이라는 감정이 그의 마음을 파고 들어와 온통 가득 채웠으며, 그는 그 순간 모든 생명의 불멸성과 모든 순간의 영원성을 깊이 느꼈다.     

 

2 <아들>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카말라는 싯다르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왔다. 하지만 그 아들은 싯다르타에게 근심과 걱정으로 다가왔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아들이 쾌락과 권세의 늪에 빠지지는 않을까, 자기가 저질렀던 모든 과오들을 되풀이 하지는 않을까, 윤회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아들에게는 아들의 길이 있으며 그것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아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맹목적이요, 일종의 번뇌요, 또한 이 사랑이 윤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과 그로부터 오는 쾌락을 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고통을 맛보고, 이런 어리석은 짓도 해보고 싶었다그는 가주기의 사람들처럼 자식을 위해 일하고 자식을 먹이고 돌보기 위해 노력 하지만 아들은 결국 싯다르타에게서 도망쳐서 마을로 돌아간다.

 

2 <>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아들에 대한 사랑을 경험하고, 또 그 사랑을 떠나보내면서 싯다르타는 보다 인간적으로 변해있었다. 예전보다 덜 총명하고 덜 오만스러워진 대신에, 더 따듯하고 더 호기심이 많고 더 많은 관심을 가진 눈길로 사람들을 보았다. 그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사람들의 충동들, 어린애 같은 유치한 짓들, 단순하고 어리석은 부분들이 억센 생명력을 가지며, 이런 것들 대문에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사랑할 수 있으며, 그들의 모든 욕정과 행위들 하나하나에서 생명, 그 생동하는 것, 그 불멸의 것, ()을 보았다. 지식인이자 사색가인 자기가 그들보다 앞선 것은, 모든 생명의 단일성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서 조화, 세계의 영원한 완전성에 대한 깨달음, 미소, 단일성이 그의 내면에서 서서히 꽃피워 났다.

그는 강의 서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모든 소리를 듣고, 전체, 단일성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개의 말로 이루어 졌으며, 그것은 완성이라는 의미의 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순간 싯다르타는 운명과 싸우는 일을 그만두었으며, 고민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그 단일성의 일부를 이루면서 그 생명의 흐름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동료이자 스승인 뱃사공 바리데주는 그에게 이러한 깨달음이 왔음을 축하하고, 숲으로 들어간다. 바리데주는 이미 인간 존재를 뛰어 넘어서 영원한 존재로 자체였으며, 이제 싯다르타가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하자 자신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는 듯이 숲으로 떠나는 그의 모습은 인도인의 삶의 단계에서 마지막인 유행기의 모습이었다.

 

2 <고빈다>에서 싯다르타가 추구하였던 것

어린 시절 함께 사문에게로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으나, 부처에게 귀의하면서 갈라져서 각자의 길에서 구도를 해온 오랜 친구 고빈다가 싯다르타를 찾아온다. 고빈다는 부처의 말씀에 따라서 도를 깨우치려고 아였으나, 싯다르타는 스스로 그 진리를 찾았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고빈다가 싯다르타에게 가르침을 얻고자 하자, 싯다르타는 자기가 찾으려고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서 결국 자기의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 들일수가 없으며, 다라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것은 열려있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아무 목표도 가지지 않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진리는 완전성과 단일성을 가지기에 말로 표현되어지는 일면적인 것으로는 그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이러한 싯다르타의 이야기는 한평생 부처의 말씀을 쫒아서 구도를 해온 고타마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고빈다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가르침이라는 것, 바로 그 무수한 말들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까닭은 해탈과 미덕이라는 것도, 윤회와 열반이라는 것도 순전히 말에 지나지 않으며, 다만 열반이라는 단어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말이나 사상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싯다르타가 평생 동안 추구하였던 ‘목샤’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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