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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기본 입장 - 초기불교와 대승

     

 

 

1. 초기불교의 석가의 깨달음

 

1-1. 석가는 어떻게 깨달은 것인가

석가는 무엇을 깨달았으며 왜 깨달으려고 하였을까?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과 더러움이 없는 안온의 열반을 얻기 위해서 였다. - 중아함경 권제 56 <라마경>

 

석가의 깨달음의 특징

①첫째, 석가는 어느 정도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노병사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 영원한 행복, 절대적 기쁨을 추구한다.

 

②둘째, 석가는 죽은 다음의 열반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 속에서 영원한 행복을 찾는다. 그가 선정주의와 고행주의를 포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③셋째, 우리는 흔히 중도, 중용, 중관 등을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상태로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중용은-필요할 때면- 반드시 극단으로 나가고, 그 일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석가에게 있어서 중도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극단적인 쾌락과 극단적인 금욕을 직접 실천해 보았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중용이며 중도인 것이다

석가의 이런 중도사상은 초기 경전에 설해진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에 정착되고 ,이 연기설은 무아론과 무기론에 잘 나타나 있다.

 

1) 십이연기설

모든 중생이 업력에 의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 끊임없이 생사윤회하는 양상을 12단계로 나누어 관찰한 것이 십이연기설이다. 석가는 우리 인간에게 괴로움을 일으키는 갖가지 조건을 12갈래로 이루어진 인과의 연쇄로 분석하였다. 인간의 삶은 과거 생으로부터 현제 생으로, 현제 생에서 다시 미래 생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그것은 영속적이고도 단일한 자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번뇌와 업을 통해 이루어 진다. 이는 석가의 깨달음의 본질이다.

-연기(緣起)?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고,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기에 저것도 멸하는 것이다'라는 석가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진리.

 십이연기설의 가장 핵심적인 뜻 : 인간의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 한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불교학 개론 中에서]

 

12연기

 

1) 무명 - 과거의 생에서 일어난 온갖 번뇌.일체의 번뇌는 무명과 관계하여 일어난다.

2) - 무명에 따라 과거 생에서 지은 온갖 악업
3)
- 모태중에 일어나는 찰나의 5, 원초적 의식

4) 명색 - 6처가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

5) 6 - 감관, 대상, 의식이 접촉하기 전까지의 5온의 상태

6) - 태어나서 3~4세가지의 단계로 아직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분명치 않은 상태.

7) - 괴로움에 대한 지각은 있으나 아직 애탐은 일으키지 않는 5~ 15세의 시기

8) - 의복과 물건, 이성에 대한 갈망 16세부터 성년 까지의 단계

9) - 강말이 증가하여 chg은 물건과 이성에 집착하는 상태의 5

10) - 욕망에 대한 집착으로 갖게 된 업

11) - 전생의 업에 의해 생기는 미래생의 첫 찰나의 5, 현제생에서의 식

12) 노사 - 태어남과 더불어 이전 생에서 지은 업에 의해 초래되는 결과

 

‘무명’과 ‘행’은 과거 생에서 지은 현제 생의 원인, ‘식’에서 ‘수’에 이르는 5지는 그 결과이다. ‘애’와 ‘취’와 ‘유’는 현제 생에서 짓는 미래생의 원인이고, ‘생’과 ‘노사’는 그 결과이다.

 

2) 무아

무아론이란 문자 그대로 영원한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가아를 진아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로써의 나, 자아가 필요하다. 하지만 자아는 영원하고 단일한 실재가 아니라 다만 그 같은 경험을 통해 확인되는 가설적 존재일 뿐이다. 후기 불교인 설일체유뷰에서는 이에 대해 인간의 삶은 과거에서 현제, 현제에서 미래의 생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그것은 영속적이고도 단일한 자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번뇌와 업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즉 우리에게는 몸과 다른 본질적 자아가 존재하며 이것을 무아라고 한다. 이러한 무아는 형태가 없는 생명에너지로서 영원히 소멸되지 않으며 이것을 ‘공()’이라고 한다. 인간의 육체는 죽어서 없어지지만 무아는 윤회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생에서 욕심과 탐욕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 무아론이다

 

3) 무기

무기론이란 비현실적인 형이상학의 문제에는 정확한 답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초월적이고 영속적인 실재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은 다만 현실의 초라함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인간의 지적 호기심에 불과할 뿐, 우리는 경험을 초월하는 그 무엇도 알 수 없으며,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1-2.석가는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이 질문에 학자들은 대개 사성제설로 답변을 시도한다. 사성제란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이다.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란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말한다. 사성제는 일체가 고통이라는 고성제, 고통의 원인을 밝혀주는 집성제, 고통을 없애줄 수 있다는 멸성제, 고통을 없애주는 길을 제시한 도성제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 고성제는 치료 대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고

둘째, - 집성제는 그런 현상에 대한 원인 규명

셋째, - 멸성제는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는 선언

넷째, - 도성제는 구체적으로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

 

불교는 이렇듯 원인을 분석하여 제거하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이야기 한다. 이를 예로 들어 불교가 다른 종교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해 볼 때 ‘가장 논리적인 종교’ 혹은 ‘이론과 실천을 가장 잘 조화시킨 종교’ 라고 말할 수 있다.

 

 

1-3. 깨달음은 어떻게 오는 가 (열반에 이르는 길 -8정도)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석가가 열반에 들기위해 실천한 것을 정리한 것이 8정도(正道) 이다. 여기서 정도는 중도(中道)의 구체적 실현이라 할수 있으며, 불타는 이것이야 말로 인류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밝히고 있다

①정견(正見) -  고·집·멸·도(苦集滅道) 4성제를 바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괴로움의 진리에 대한 통찰이 강조된다.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것의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방법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괴로움은 무상한 것에서 오기 때문에 결국, 정견은 무상과 무아에 대한 통찰이다. 따라서 이는 10악업 중 어리석음을 제거하는 수행도이다.

②정사유(正思惟) - 정견에서 통찰된 내용을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다. 아집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무상함을 깨달을 때, 더 이상 탐욕이나 증오, 남을 해코지 하려는 마음이 사라지고 온화하고 착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이는 10 악업 중 탐욕과 증오를 제거하는 수행도이다

③정어(正語) - 정사유에 따라서 진실한 말과 아름다운 말,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다. 이는 10 악업 중 거짓말, 이간질 하는 말, 욕하는 말, 꾸며낸 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④정업(正業) - 정업이란 앞의 바른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10 악업 중 살생과 도둑질, 사음을 멀리하는 수행도이다.

⑤정명(正命) - 정견에 다른 올바른 방식으로 생활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다.

⑥정정진(正精進) - 앞의 일들을 꾸준히 노력하여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⑦정념(正念) - 몸은 부정한 것이고, 느낌은 괴로운 것이고, 마음은 무상한 것이며, 그 밖의 모든 존재는 무아라는 것을 항상 마음에 담아두고 항상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⑧정정(正定) - 올바른 명상을 말한다. 불교에서의 올바른 명상이란 고요함과 헤아림이 균등한 상태이다.

 

불교는 지혜를 통한 해탈을 주장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반드시 도덕적 금계와 명상에 수반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이같은 지혜만이 우리의 삶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킬수 있다.

 

 

 

2. 대승불교의 성립

 

2-1. 대승의 기원

대승불교는 형식적인 계율과 출가 수행의 최고의 이상이었던 아라한의 무오류성을 부정하고 오직 불타만이 초월적 존재라 생각하였다. 이들이 생각하는 불타는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시 모습을 나타낸 것을 뿐이며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법의 시현이며, 그의 언설은 모두 진리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오로지 일념으로 불타를 생각하며 불탑에 예배함으로써 불타와 직접 대면하여 그의 법음을 듣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즉 구원자로서의 불타를 믿으며 불상과 불탑을 숭배하고, 배운자 못배운자 남녀노소 모두를 피안으로 인도하는 거대한 수레란 듯의 대승(大乘)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전의 부파 불교와 아비달마 불교는 그 엄격한 계율에 따라 수행해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기에 수행자가 아닌 일반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불타를 믿고 숭배하면 일반 대중 모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대중 불교는 보다 넓게 퍼져 나갈 수 있었다.

 

대승불교의 경전

대승불교의 경전인 <반야경>은 불타가 직접 설한것을 제자들이 기록한 경전이 아니라, 수행자들이 탑 앞에서 혹은 삼매에 들어서 시공을 초월한 법신으로서의 불타를 직접 친견하고 전해들은 법문을 집결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설하는 ‘반야바라밀다’ 라는 새로운 법이야 말로 ‘모든 부처와 보살의 어머니’라고 말하며, 이것이 존재의 실상인 동시에 대비(大悲)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였다. 반야바라밀다는 불타 깨달음의 본질이며 이것의 증득 없이는 6바라밀의 완성도 없다.  

그렇다면 반야란 무엇인가? 반야경의 중심 사상인 반야는 공()에 대한 예지의 통찰인 무차별, 무분별의 지혜를 말한다. <금강경>에 의하면 우리가 언어로서 분별하는 일체의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갖지 않는다. 무자성이고 공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갖는 차별적 특성은 모두 언어적 분별에서 일어난 사실일 뿐 진실이 아니다. 따라서 일체의 세계는 공으로서 어떠한 차별도 없다.  

2-2. 대승 보살도

대승불교는 보살의 불교이다.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고자 노력하는 이’로 설명된다. 즉 기존의 진정한 보살은 석가보살 뿐이었으나 그 의미가 보편화 되고 확대 되면서 불타가 되기 전의 수행하는 모든 중생이 보살로 불리게 되었다. 보살은 반드시 출가자에 한정되지 않으며, 마음이 산란한 자라고 하더라도 탑이나 사당안에 들어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라고 한번만 외우면 그들은 이미 불도를 이룬 것이다. 보살에는 관음, 문수, 보현, 대세지와 같은 대보살도 있지만, 대승교설을 믿고 보리심(지혜의 마음)을 일으켜 보살도를 실천하려 발원한 이도 보살이다.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열반이 최고의 선이었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번뇌와 해탈의 대립이 실재하지 않으며 일시적인 것이라 한다. 즉 번뇌도 공이고 열반도 공이다. 생사번뇌가 공이며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생사는 그 자체로 열반이 된다. 즉 대승의 보살에게는 번뇌도 생사도 오히려 열반과 해탈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2-3. 보살의 길 - 6바라밀  

바라밀이란 피안에 이른 상태란 뜻이다. 6바라밀의 실천을 통해 석가보살도 지혜와 자비의 완성을 추구하였다. 바라밀을 닦는 것은 무차별, 공에 입각한 실천이기 때문에 특정한 지점의 도달이나 완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여기서 보면 저기가 피안이지만, 막상 그 강을 건너서 보면 아까 그 곳이 피안이다. 따라서 결과에 집착함이 없이 닦아가는 것이 바라밀의 참 뜻이다. 모든 보살은 보리심을 일으켜 이러한 6바라밀을 닦음으로써 마침내 부처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①보시(布施) 바라밀 - 보시란 베푸는 것이다. 베푸는 것에는 물질적인 베풂인 재시,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법시, 두려움과 금심을 함게하고 도와주는 무외시 세가지가 있다. 보시는 주는자와 받는자의 차별이 없는 것으로, 보시라는 선행에 집착하거나 공덕의 대가를 바래서는 안되는 무주상의 보시가 보시바라밀이다.  

②지계(持戒) 바라밀 - 지계란 계를 지킨다는 뜻이다. 대승의 보살계에는 10가지 대계가 있다. 살생, 도둑질, 음란함,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욕설, 탐욕, 미워함 등에서 떠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계 역시 공한 것임으로 거기에 집착함이 없이 스스로 지키는 것이 지계 바라밀이다.

③인욕(忍辱) 바라밀 - 인욕이란 참고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고()이며, 이러한 괴로운 세계에 사는 한 참고 견디는 수 밖에 없다. 화내는것보다 더한 죄악은 없다, 하지만 인욕보다 어려운 고행은 없다. 하지만 욕된 일을 당했을 때 참지 못하고 화가 나는 것은 진실로 ‘나’가 있다는 잘못된 믿음, 에고의 소산이다. 그럼으로 분노와 미움은 오직 참고, 자비로 극복되는 것이다.

④정진(精進) 바라밀 - 불타는 입멸하면서 ‘생겨난 것은 반드시 멸하는 것이니, 게으르지 말라’고 하였다. 따라서 선법을 향상시키는데 움직이지 않는 마음으로 닦는 정진이 뒤 따라야 한다.  

⑤선정(禪定) 바라밀 - 선정이란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 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으로, 세계의 실상이 무자성이며 공임을 삼매로서 직관하여,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수행이다.

⑥반야(般若) 바라밀 - 반야란 뛰어난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이때의 지혜는 무분별의 지혜로써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다. 공의 예지 아래서는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이 구분이 없음으로 반야 일체의 세속적 행위는 종교적 행위로 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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