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기본 입장 - 초기불교와 대승

     

 

 

1. 초기불교의 석가의 깨달음

 

1-1. 석가는 어떻게 깨달은 것인가

석가는 무엇을 깨달았으며 왜 깨달으려고 하였을까?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과 더러움이 없는 안온의 열반을 얻기 위해서 였다. - 중아함경 권제 56 <라마경>

 

석가의 깨달음의 특징

①첫째, 석가는 어느 정도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노병사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 영원한 행복, 절대적 기쁨을 추구한다.

 

②둘째, 석가는 죽은 다음의 열반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 속에서 영원한 행복을 찾는다. 그가 선정주의와 고행주의를 포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③셋째, 우리는 흔히 중도, 중용, 중관 등을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상태로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중용은-필요할 때면- 반드시 극단으로 나가고, 그 일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석가에게 있어서 중도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극단적인 쾌락과 극단적인 금욕을 직접 실천해 보았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중용이며 중도인 것이다

석가의 이런 중도사상은 초기 경전에 설해진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에 정착되고 ,이 연기설은 무아론과 무기론에 잘 나타나 있다.

 

1) 십이연기설

모든 중생이 업력에 의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 끊임없이 생사윤회하는 양상을 12단계로 나누어 관찰한 것이 십이연기설이다. 석가는 우리 인간에게 괴로움을 일으키는 갖가지 조건을 12갈래로 이루어진 인과의 연쇄로 분석하였다. 인간의 삶은 과거 생으로부터 현제 생으로, 현제 생에서 다시 미래 생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그것은 영속적이고도 단일한 자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번뇌와 업을 통해 이루어 진다. 이는 석가의 깨달음의 본질이다.

-연기(緣起)?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고,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기에 저것도 멸하는 것이다'라는 석가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진리.

 십이연기설의 가장 핵심적인 뜻 : 인간의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 한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불교학 개론 中에서]

 

12연기

 

1) 무명 - 과거의 생에서 일어난 온갖 번뇌.일체의 번뇌는 무명과 관계하여 일어난다.

2) - 무명에 따라 과거 생에서 지은 온갖 악업
3)
- 모태중에 일어나는 찰나의 5, 원초적 의식

4) 명색 - 6처가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

5) 6 - 감관, 대상, 의식이 접촉하기 전까지의 5온의 상태

6) - 태어나서 3~4세가지의 단계로 아직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분명치 않은 상태.

7) - 괴로움에 대한 지각은 있으나 아직 애탐은 일으키지 않는 5~ 15세의 시기

8) - 의복과 물건, 이성에 대한 갈망 16세부터 성년 까지의 단계

9) - 강말이 증가하여 chg은 물건과 이성에 집착하는 상태의 5

10) - 욕망에 대한 집착으로 갖게 된 업

11) - 전생의 업에 의해 생기는 미래생의 첫 찰나의 5, 현제생에서의 식

12) 노사 - 태어남과 더불어 이전 생에서 지은 업에 의해 초래되는 결과

 

‘무명’과 ‘행’은 과거 생에서 지은 현제 생의 원인, ‘식’에서 ‘수’에 이르는 5지는 그 결과이다. ‘애’와 ‘취’와 ‘유’는 현제 생에서 짓는 미래생의 원인이고, ‘생’과 ‘노사’는 그 결과이다.

 

2) 무아

무아론이란 문자 그대로 영원한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가아를 진아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로써의 나, 자아가 필요하다. 하지만 자아는 영원하고 단일한 실재가 아니라 다만 그 같은 경험을 통해 확인되는 가설적 존재일 뿐이다. 후기 불교인 설일체유뷰에서는 이에 대해 인간의 삶은 과거에서 현제, 현제에서 미래의 생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그것은 영속적이고도 단일한 자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번뇌와 업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즉 우리에게는 몸과 다른 본질적 자아가 존재하며 이것을 무아라고 한다. 이러한 무아는 형태가 없는 생명에너지로서 영원히 소멸되지 않으며 이것을 ‘공()’이라고 한다. 인간의 육체는 죽어서 없어지지만 무아는 윤회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생에서 욕심과 탐욕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 무아론이다

 

3) 무기

무기론이란 비현실적인 형이상학의 문제에는 정확한 답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초월적이고 영속적인 실재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은 다만 현실의 초라함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인간의 지적 호기심에 불과할 뿐, 우리는 경험을 초월하는 그 무엇도 알 수 없으며,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1-2.석가는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이 질문에 학자들은 대개 사성제설로 답변을 시도한다. 사성제란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이다.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란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말한다. 사성제는 일체가 고통이라는 고성제, 고통의 원인을 밝혀주는 집성제, 고통을 없애줄 수 있다는 멸성제, 고통을 없애주는 길을 제시한 도성제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 고성제는 치료 대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고

둘째, - 집성제는 그런 현상에 대한 원인 규명

셋째, - 멸성제는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는 선언

넷째, - 도성제는 구체적으로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

 

불교는 이렇듯 원인을 분석하여 제거하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이야기 한다. 이를 예로 들어 불교가 다른 종교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해 볼 때 ‘가장 논리적인 종교’ 혹은 ‘이론과 실천을 가장 잘 조화시킨 종교’ 라고 말할 수 있다.

 

 

1-3. 깨달음은 어떻게 오는 가 (열반에 이르는 길 -8정도)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석가가 열반에 들기위해 실천한 것을 정리한 것이 8정도(正道) 이다. 여기서 정도는 중도(中道)의 구체적 실현이라 할수 있으며, 불타는 이것이야 말로 인류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밝히고 있다

①정견(正見) -  고·집·멸·도(苦集滅道) 4성제를 바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괴로움의 진리에 대한 통찰이 강조된다.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것의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방법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괴로움은 무상한 것에서 오기 때문에 결국, 정견은 무상과 무아에 대한 통찰이다. 따라서 이는 10악업 중 어리석음을 제거하는 수행도이다.

②정사유(正思惟) - 정견에서 통찰된 내용을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다. 아집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무상함을 깨달을 때, 더 이상 탐욕이나 증오, 남을 해코지 하려는 마음이 사라지고 온화하고 착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이는 10 악업 중 탐욕과 증오를 제거하는 수행도이다

③정어(正語) - 정사유에 따라서 진실한 말과 아름다운 말,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다. 이는 10 악업 중 거짓말, 이간질 하는 말, 욕하는 말, 꾸며낸 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④정업(正業) - 정업이란 앞의 바른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10 악업 중 살생과 도둑질, 사음을 멀리하는 수행도이다.

⑤정명(正命) - 정견에 다른 올바른 방식으로 생활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다.

⑥정정진(正精進) - 앞의 일들을 꾸준히 노력하여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⑦정념(正念) - 몸은 부정한 것이고, 느낌은 괴로운 것이고, 마음은 무상한 것이며, 그 밖의 모든 존재는 무아라는 것을 항상 마음에 담아두고 항상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⑧정정(正定) - 올바른 명상을 말한다. 불교에서의 올바른 명상이란 고요함과 헤아림이 균등한 상태이다.

 

불교는 지혜를 통한 해탈을 주장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반드시 도덕적 금계와 명상에 수반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이같은 지혜만이 우리의 삶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킬수 있다.

 

 

 

2. 대승불교의 성립

 

2-1. 대승의 기원

대승불교는 형식적인 계율과 출가 수행의 최고의 이상이었던 아라한의 무오류성을 부정하고 오직 불타만이 초월적 존재라 생각하였다. 이들이 생각하는 불타는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시 모습을 나타낸 것을 뿐이며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법의 시현이며, 그의 언설은 모두 진리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오로지 일념으로 불타를 생각하며 불탑에 예배함으로써 불타와 직접 대면하여 그의 법음을 듣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즉 구원자로서의 불타를 믿으며 불상과 불탑을 숭배하고, 배운자 못배운자 남녀노소 모두를 피안으로 인도하는 거대한 수레란 듯의 대승(大乘)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전의 부파 불교와 아비달마 불교는 그 엄격한 계율에 따라 수행해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기에 수행자가 아닌 일반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불타를 믿고 숭배하면 일반 대중 모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대중 불교는 보다 넓게 퍼져 나갈 수 있었다.

 

대승불교의 경전

대승불교의 경전인 <반야경>은 불타가 직접 설한것을 제자들이 기록한 경전이 아니라, 수행자들이 탑 앞에서 혹은 삼매에 들어서 시공을 초월한 법신으로서의 불타를 직접 친견하고 전해들은 법문을 집결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설하는 ‘반야바라밀다’ 라는 새로운 법이야 말로 ‘모든 부처와 보살의 어머니’라고 말하며, 이것이 존재의 실상인 동시에 대비(大悲)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였다. 반야바라밀다는 불타 깨달음의 본질이며 이것의 증득 없이는 6바라밀의 완성도 없다.  

그렇다면 반야란 무엇인가? 반야경의 중심 사상인 반야는 공()에 대한 예지의 통찰인 무차별, 무분별의 지혜를 말한다. <금강경>에 의하면 우리가 언어로서 분별하는 일체의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갖지 않는다. 무자성이고 공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갖는 차별적 특성은 모두 언어적 분별에서 일어난 사실일 뿐 진실이 아니다. 따라서 일체의 세계는 공으로서 어떠한 차별도 없다.  

2-2. 대승 보살도

대승불교는 보살의 불교이다.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고자 노력하는 이’로 설명된다. 즉 기존의 진정한 보살은 석가보살 뿐이었으나 그 의미가 보편화 되고 확대 되면서 불타가 되기 전의 수행하는 모든 중생이 보살로 불리게 되었다. 보살은 반드시 출가자에 한정되지 않으며, 마음이 산란한 자라고 하더라도 탑이나 사당안에 들어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라고 한번만 외우면 그들은 이미 불도를 이룬 것이다. 보살에는 관음, 문수, 보현, 대세지와 같은 대보살도 있지만, 대승교설을 믿고 보리심(지혜의 마음)을 일으켜 보살도를 실천하려 발원한 이도 보살이다.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열반이 최고의 선이었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번뇌와 해탈의 대립이 실재하지 않으며 일시적인 것이라 한다. 즉 번뇌도 공이고 열반도 공이다. 생사번뇌가 공이며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생사는 그 자체로 열반이 된다. 즉 대승의 보살에게는 번뇌도 생사도 오히려 열반과 해탈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2-3. 보살의 길 - 6바라밀  

바라밀이란 피안에 이른 상태란 뜻이다. 6바라밀의 실천을 통해 석가보살도 지혜와 자비의 완성을 추구하였다. 바라밀을 닦는 것은 무차별, 공에 입각한 실천이기 때문에 특정한 지점의 도달이나 완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여기서 보면 저기가 피안이지만, 막상 그 강을 건너서 보면 아까 그 곳이 피안이다. 따라서 결과에 집착함이 없이 닦아가는 것이 바라밀의 참 뜻이다. 모든 보살은 보리심을 일으켜 이러한 6바라밀을 닦음으로써 마침내 부처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①보시(布施) 바라밀 - 보시란 베푸는 것이다. 베푸는 것에는 물질적인 베풂인 재시,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법시, 두려움과 금심을 함게하고 도와주는 무외시 세가지가 있다. 보시는 주는자와 받는자의 차별이 없는 것으로, 보시라는 선행에 집착하거나 공덕의 대가를 바래서는 안되는 무주상의 보시가 보시바라밀이다.  

②지계(持戒) 바라밀 - 지계란 계를 지킨다는 뜻이다. 대승의 보살계에는 10가지 대계가 있다. 살생, 도둑질, 음란함,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욕설, 탐욕, 미워함 등에서 떠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계 역시 공한 것임으로 거기에 집착함이 없이 스스로 지키는 것이 지계 바라밀이다.

③인욕(忍辱) 바라밀 - 인욕이란 참고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고()이며, 이러한 괴로운 세계에 사는 한 참고 견디는 수 밖에 없다. 화내는것보다 더한 죄악은 없다, 하지만 인욕보다 어려운 고행은 없다. 하지만 욕된 일을 당했을 때 참지 못하고 화가 나는 것은 진실로 ‘나’가 있다는 잘못된 믿음, 에고의 소산이다. 그럼으로 분노와 미움은 오직 참고, 자비로 극복되는 것이다.

④정진(精進) 바라밀 - 불타는 입멸하면서 ‘생겨난 것은 반드시 멸하는 것이니, 게으르지 말라’고 하였다. 따라서 선법을 향상시키는데 움직이지 않는 마음으로 닦는 정진이 뒤 따라야 한다.  

⑤선정(禪定) 바라밀 - 선정이란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 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으로, 세계의 실상이 무자성이며 공임을 삼매로서 직관하여,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수행이다.

⑥반야(般若) 바라밀 - 반야란 뛰어난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이때의 지혜는 무분별의 지혜로써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다. 공의 예지 아래서는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이 구분이 없음으로 반야 일체의 세속적 행위는 종교적 행위로 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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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달마 불교에서의 인간과 세계의 이해

 

  

     

 

 

목차

 

1장 우주

1. 누가 우주를 창조하였는가

2. 우주의 형성과 파괴

3. 우리가 사는 곳

 

2장 인간

1. 삼계(三界). 오취(五趣). 사생(四生)

2. ()의 이론

3. ()과 윤회(輪廻)

4. 번뇌(煩惱)의 세계(世界)

5. 12연기(緣起)

6. 무상과 무아

7. 열반

 

3장 아비달마의 법()의 세계

1. 마음의 작용-심소법(心所法)

2.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는 힘 - 心不相應行(심불상응행)

3. 제법의 삼세실유(三世實有)

 

 

 

 

1장 우주

 

 

1. 누가 우주를 창조하였는가

 

 구사론에 따르면, 세계는 '사트바 카르만(sattva-karman)'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사트바'란 보통 유정(有情), 중생(衆生)으로 번역되는 말로서, 이 세상에 생명을 지니고 존재하는 것, 모든 살아있는 것을 의미한다. '카르만'은 보통 '()'으로 번역되지만, 행위, 동작의 의미이다. 따라서 '사트바 카르만'은 생명있는 것의 행위, 생명체의 생활. 활동이라는 뜻이다.

 서양 기독교의 세계관은 자연이 만들어 지고 그 공간을 생물과 인간이 차례로 채우지만 불교에서는 반대로 생명을 가진 것의 행위, 동작에 의해 자연계가 생겨난다고 한다. 즉 자연계의 성립에 이전에 생명을 가진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살아 행위함, 이것이 전체로서 하나의 우주를 창출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생각했다. 우주를 생성하는 에너지와 하나의 개체, 한 인간이 살아 행위하고 동작하는 힘은 근원적으로 동일하다.

 

2. 우주의 형성과 파괴

 

 우주의 형성은 구사론의 기술에 따르면 우선 아무런 존재도 없는 광대하고 텅빈 공간에 사트바 카르만의 힘이 활동함으로써 '미풍(微風)'이 불면서 원반 모습의 견고한 '대기의 층'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대기층 위에 '물의 층'이 형성된다. 물의 층은 다시 사트바 카르만에 의해 부는 바람으로 말미암아 "끊인 우유의 표면에 막이 생기는 것 같이" 점차 응고되어, 상층의 7분의 2 '황금의 층'이 된다. 나머지 7분의 5는 물의 층으로 남아있다. 결국 무한하다고 하여도 상관이 없는 광대한 원반에 펼쳐져 있는 대기층의 중심부에, 이에 비해서는 훨씬 작으나 동일한 원반 모습의 물과 황금의 층이 중첩되어 놓여 있다. 이 황금의 층의 표면이 대지이다. 그리고 대지 위에는 다시 산. 강 등이 형성되며, 이리하여 여기에 자연계가 완성되는 것이다.

 자연계가 완성되면 여기에 생물 즉 유정(sattva)이 발생한다. 이 발생에도 정해진 순서가 있어, 우선 천상의 세계부터 시작된다. 즉 처음부터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하늘의 신들이다. 다음으로는 지표 세계에 인간. 동물 등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지하 세계 즉 지옥에도 지옥의 사트바가 태어남으로써 세계 형성의 과정은 완료된다.

 세계 형성의 과정에 계속하여 다음의 20안타라칼파 동안에는 형성된 세계가 지속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끝나면 세계 파멸의 과정이 따른다. 이것도 20안타라칼파 동안 계속되며, 세계 형성의 과정과 전혀 역의 순으로 이루어지며, 그런 다음에는 단지 광대하고 텅 빈 공간만이 남는다. 이로부터 20안타라칼파 동안은 텅빈 공간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무의 기간이다. 이 기간이 지나가면 다시 사트바 카르만이 미풍을 일으켜, 다음의 세계 생성의 기간이 시작된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세계의 형성. 지속. 파멸. 공무의 네 과정이 계속 순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대자연의 생멸의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하여 무한의 과거로부터 무한의 미래에까지 영원히 계속된다.

 

 

3. 우리가 사는 곳

 지상의 세계에서 우리가 사는 곳은 수메루산의 남쪽, 일곱 외륜산 바깥의 큰 바다 가운데에 삼각형으로 돌출되어 있는 잠부주이다. 잠부주 북부에는 아홉의 검은 산이 가로놓여 있다. 이를 지나 더욱 북쪽으로 나아가면 '눈의 산(히말라야)'이 있으며, 눈의 산 저쪽에는 '향기로 가득찬 산'이 있다. 눈의 산과 향기로 가득찬 산 사이에는 '염열(炎熱)의 괴로움이 없는 연못'이 있고, 여기에는 강가(갠지스강), 신두(인더스강), 쉬타, 바크슈의 4대하가 흘러 잠부대륙을 윤택하게 하고 있다. 뭇 사람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이 연못에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한다. 위에 기술한 잠부주는 결국 고대 인도인의 눈에 비친 인도의 국토이다.

 이와 같이 대기. . 황금의 세 층의 기반 위에 서있는 수메루산을 중심으로 하여, 이를 둘러싼 네 개의 대륙, 해와 달, 천계. 지옥 등 모든 것이 포함된 자연계의 한 단위가 성립된다.

 

 

 

2장 인간

 

1. 삼계(三界). 오취(五趣). 사생(四生)

 

 불교는 이 공간 안에서 태어나고 죽어가는 생명체, 즉 인간의 삶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아비달마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유정)의 외면적 존재방식은 '삼계(三界)', '오취(五趣)', '사생(四生)'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삼계(三界)'라는 말은 옛 부터 일상적인 말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셋을 말한다. 욕계는 본능적 욕망이 성하고 강하게 작용하는 세계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색계(色界)란 물질, 육체의 세계 즉 육체를 갖고 생존하는 세계의 의미가 되며, 무색계는 육체가 없는, 순수한 정신적 생존의 세계가 될 것이다. 지하의 세계. 지표의 세계. 공중의 세계(천계) 중의 하층은 욕계에, 천계에 상층은 색계에 속하며, 무색계는 그 위 천계의 최상층에 있다고 한다. 1) '지옥(地獄)' 2) '아귀(餓鬼)', 3)'축생(畜生)', 4)'인간(人間)'. 천계에는 5)'()'(천인, 천녀. 즉 하늘의 신들)의 생활이 있다. 이를 '오취(五趣)'라고 한다. 이 다섯에 '아수라(阿修羅)'를 더하여 육취(六趣) 라 한다. 온갖 고통을 겪는 지옥은 물론이고, 기갈의 고통을 받는 아귀이건, 약육강식의 축생(동물계)이건, 모두 인간의 생활에 비해 열등하며 고뇌가 많으며 바람직스럽지 못한 경우이다.(지옥. 아귀. 축생을 三惡趣, 三惡道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천계는 인간세계보다 훨씬 훌륭하고 행복하며 바람직스러운 경지이다.

 그러나 천계는 서양 기독교의 천국이나 이상화 된 파라다이스와 같은 영원한 행복의 세계는 아니다. 다른 사취에 비하면 그 격이 높기는 하지만, 轉變과 쇠망을 피할 수 없는 세계이다. 따라서 이 천계의 생존도 인간 및 지옥에서의 생존과 마찬가지로 윤회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유정은 오취의 어느 하나에 속하여 살아가며 죽으면 또한 오취의 어느 하나로 태어난다. 예를 들어 인간의 한 생애를 마치고 하늘의 신으로 태어나는 유정도 있을 것이며,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도 있을 것이다. 이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지옥에서 고통을 겪는 자도 천계의 신도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2. ()의 이론

 

 이러한 윤회는 그 유정의 행위 업 (Karman,)에 따른 것이다. 과거의 선한 행위의 결과는 현재 즐겁고 바람직스러운 생애를 초래하고, 과거의 악한 행위의 결과는 현재 괴롭고 바람직스럽지 못한 생애를 초래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이다.

 업의 이론에 의하면 과거의 행위가 현재의 자기의 존재방식을 결정한다고 하지만, 이는 자기의 존재방식이 이미 과거에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주어져 있어 현재로서는 이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이유는 과거의 업이 현재의 상황을 결정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업은 미래의 상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지금의 삶이 전생의 업으로 비루할지라도 이번 생을 열심히 잘 살면 다음 생은 달라질 수 있다.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탄식하는 사람에게 업론은 운명론이 되지만, 현재에 서서 미래를 바라보는 자에게 그것은 반대로 자신을 고무하여 밝은 미래를 개척하게끔 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업이 유정의 존재방식 모두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인과관계가 무수히 작용하여 순간순간의 인간의 생존을 구성하며, 업과 그 결과라는 관계는 무수하고 다양한 인과관계 중에서 다만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3. ()과 윤회(輪廻)

 

 불교는 무아(無我)를 설한다. '()'라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악한 행위를 하여 그 결과 지옥. 아귀. 축생과 같은 좋지 못한 경계에 태어나는 것도, 선한 행위를 하여 그 결과 보다 좋은 경계에 태어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다. 불교가 본래 지향하는 바는 윤회를 초월한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윤회는 도덕적 선악의 세계이다. 평상의 인간(범부)은 선악의 세계에 산다. 이러한 인간의 선악적 존재를 지탱하는 지주는 아비달마논사에 의하면 업의 인과의 원칙이다. 아비달마에서는 누구도 다른 사람에 대해 그 선악을 판단할 수 없고, 전자의 신과 같은 자가 어디엔가 있어 사람의 선악을 심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생애에 과보가 나타나지 않고, 다음 생애(來世) 또는 그 다음 생애에서야 나타난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행위는 필연적으로 과보를 받는다. 이것은 절대의 원칙이다.

 업의 결과의 필연성과 자업자득, 이 두 원칙이 있음으로써 선악의 기본이 성립된다. 업의 이론은 평상적 인간의 삶의 세계의 도덕적 질서 수립을 말하는 것이다. 아비달마의 입장은 업과 윤회의 세계를 궁극적으로 그러해야 할 모습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며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평상적 인간의 삶의 현실과 선악의 원리가 그 삶을 관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도덕적 요구를 승인한다.

 불교에 의하는 한 우리의 세계는 업에 의해 유전 상속한다.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탄생으로 이어진다. 업을 이야기 하는 한 윤회는 필연적인 것이다.

 

4. 번뇌(煩惱)의 세계(世界)

 

 업이 윤회의 삶을 결과할 때에는 필히 번뇌를 수반한다고 한다. . 윤회의 세계는 또한 번뇌의 세계이며 이 세계의 일체는 유루라고 한다.

 '유루(有漏)'는 원어인 산스크리트어로는 사스라바(s srava)이다. '아스라바( srava)를 지닌 것'이란 뜻이다. 아스라바가 번뇌의 의미라면, 사르라바 즉 유루는 '번뇌를 지닌 자'라는 의미가 된다. 번뇌를 지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설일체유부적으로 이를 표현하면, 범부의 세계에 있어 모든 존재는 "번뇌의 대상이거나, 번뇌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영역에 속한다. 깨달음이 영역에 속하는 것은 모두 '무루(無漏)'이다.

 모든 존재는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두 이러한 의미에서 유루이다. 즉 번뇌를 지닌 것이다. 업은 윤회함으로 번뇌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이러한 평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벗어나, 즉 업과 번뇌에 지배되는 미혹의 세계에서 초월하여 궁극적 진실인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은 지혜로써 마음을 번뇌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무루의 길이다. 이 실천도를 나아가는 자는 '성자'로 불린다. 불교에서 말하는 성자는 번뇌를 끊은 자인 것이다. 이렇듯 모든 번뇌를 끊고 일체의 진리와 만난 자를 ‘아라한’이라고 한다.

 

 

5. 12연기(緣起)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이고, 법을 보는 자 연기를 보는 자이다”

 불타는 괴로움을 일으키는 갖가지 조간들을 12 갈래로 이루어진 인과의 연쇄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를 12연기(緣起) 라고 한다. ‘연기란 ~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 난다’ 는 뜻으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 난다는 말로 정형화 될 수 있다. 즉 지금 현제는 내가 과거에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따라 형성된 것이며,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따라 지금 이후의 미래가 달라진 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속적이고도 단일한 자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번뇌와 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연기에 대한 여러 설중에서 과거 현제 미래의 생에 걸쳐 5온이 상속하는 것이라는 분위(分位) 연기설이 전통적 정설로 인정되어 지는데, 이는 부파불교의 가장 유력하였던 부파인 설일체유부의 학설로서 이에 따라 12연기를 삼세(三世) 양중(兩重)의 인과설로 해석하게 되었다. ‘무명’과 ‘행’은 과거 생에서 지은 현제 생의 원인이고, ‘식’에서 ‘수’에 이르는 5지는 그 결과이며 (이상 과거현제의 인과), ‘애’와 ‘취’와 ‘유’는 현제 생에서 짓는 미래생의 원인이고, ‘생’과 ‘노사’는 그 결과이다(이상 현제미래의 인과).   

 

6. 무상과 무아(無我)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변화의 영역이다. 영원한 것은 다만 사유와 언어의 세계일 뿐 현실이 아니다. 불교에서의 언어는 마치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는 수단이듯이 다만 사물을 지시하는 도구일 뿐이지만, 현실의 세계는 언제나 추상의 언어에 은폐되어 나타난다.

 자아란 경험의 조건인 5온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5온의 상속을 일시 가설한 것일 뿐이다.

 

첫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행위하는 것인가?

2 5천 가지 부품의 결합체를 일시 차() 라고 이름할 뿐 그것과는 별도의 차가 존재하지 않듯이, 5온의 총아를 일시 자아라고 이름할 뿐 그것의 토대가 되는 별도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영속적이고도 단일 보편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경험(혹은 세계)은 어떻게 지속 가능한 것인가?

고정불변의 자아가 존재하여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번뇌와 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셋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데 도덕적인 책임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그에 집착함으로써 온갖 번뇌와 업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끊임없이 유전하게 된다. 초기불교의 윤리는 무아에 기초한 ‘버림’의 윤리이다. 세계의 모든 악은 탐욕과 증오로부터 비롯되며, 그것은 바로 자아에 대한 그릇된 믿음인 무지로부터 야기된다. 자아를 버리지 않는 한 괴로움의 속박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7. 열반

 

열반이란 경험세계 자체(5)의 소멸이 아니라 그것을 괴로움의 세계로 드러나게 하는 조건들, 이를테면 무지와 그에 따른 아집과 집착, 그리고 탐욕과 증오 등의 소멸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것은 5온 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끔 하는 조건이 된다. 그럴 때 열반은 사후가 아닌 살아있는 동안 ‘지금 여기서’ 획득하는 것이며, 현실의 삶을 자유롭고 풍요로운 충만함으로 이끄는 힘이 된다.

 그렇다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8정도를 통해 중도를 실현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이야기한다. 중도란 극단적인 고행이나 지나친 쾌락을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존재 본성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이것이 정견(正見)이다. 정견은 바로 무상과 무아에 대한 통찰이다. 경전에서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 의 4성제를 바로 관찰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으며 이 중에서도 괴로움의 진리에 대한 통찰이 강조된다. 괴로움을 알지 못하면 그것의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방식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계戒 정定 혜慧 를 3학學 이라고 하여, 해탈의 세 축으로 삼고 있다. 8정도 중에서 정견과 정 사유는 혜학에 포함되고, 정어정업정명은 계학에, 정념과 정정은 정학에, 그리고 정정진은 3학 모두에 포함된다. 3학은 모든 괴로움과 속박에서 벗어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불타는 이것이야 말로 바로 인류의 무거운 짐을 벗어 놓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3장 아비달마의 법()의 세계

 

1. 마음의 작용-심소법(心所法)

 

 아비다르마라는 말은 “법에 대하여”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설일체유부(일체의 법이 실재한다고 주장)에서는 “법에 대한 연구”라는 의미로 해석하며, 팔리상좌부에서는 “훌륭한 법”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불타가 설한 “법”에 대한 연구이다. 다르마란 불타가 설한 교법을 말한다. 불타의 교법은 현실의 인간 존재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인간 존재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현상’으로 존재하고 있고, 동시에 ‘요소적 실재’이기도 하다. 현상으로서의 현실은 육체와 정신, 외계 등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또 다시 세세한 요소로 분석된다.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무상하다. 따라서 법은 실재이긴 하지만 ‘영원한 실재’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에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적인 법을, 상주하는 법 (무위법-조작됨이 없는 법, 더 이상 소멸하지 않는 존재) 과 무상한 법 (유위법-다양한 인과적 관계로써 조작되어 생성 소멸하는 경험세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이 부파불교 시대이다. 무위법은 열반으로 대표된다. 열반은 시간을 초월한 실재이며, 불타는 깨달음을 통해 이 열반과 합일하였다. 유부에서는 열반을 깨달음의 지혜의 힘에 의해 번뇌가 끊어지고 번뇌가 영구히 불생하게 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유위법은 무상하다. 이 무상함에 대해 상좌부나 유부는 유위법은 자상을 갖지만 1찰나만 현세에 존재한다고 해석하였다. 유위법은 실재이지만, 찰나 멸한다는 점에서 법은 파악될 수 없다.

 

 유루법은 번뇌에 더럽혀진 법을 말한다. 무루법은 번뇌에 더럽혀져 있지 않은 법이다. 불타나 아라한의 깨달음의 지혜는 번뇌를 모두 끊고 있기에 무루이다. 아함경에는 많은 종류의 번뇌가 밝혀져 있다. 이것은 번뇌를 끊는 것이 불교의 주목적이기 때문이다. 아비다르마 시대에는 이 아함경의 심소법(心所法-마음에 소유된 법) 을 이어 받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발전시킨다. 번뇌를 끊기 위해 번뇌와 다른 심리 작용이 어떻게 협동하는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부는 심소법을 독립의 실체로 보았다. 탐욕과 분노는 작용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양자가 다른 기능을 갖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유부가 46종의 심소를 독립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마음은 갖가지 심리작용을 그 속에 포함하는 하나의 종합된 통일체로 보았다. 하지만 심소를 각각 독립적인 것으로 보면, 마음의 일체성과 통일성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유부는 ‘심심소(心心所)의 구생(俱生)’ 을 설한다. 즉 심심소의 구생에 의해 심 작용의 통일적 활동을 설명하며 이러한 의미의 심심소의 협동을 ‘상응(相應)’이라고 한다

 팔리불교에서도 심심소의 상응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만 유부와 그 내용이 조금 다르다. 팔리불교에서는 22심소 중 1법도 빠지는 것이 없다. 1법이 부족하면 다른 21심소도 모두 부족한 것이 된다. 전부가 갖추어 지지 않으면 생길 수 없다. 1법은 나머지 21심소의 존재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심심소의 관계를 ‘상응인(相應因)’ 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사리불아비담론의 심소법은 33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팔리불교나 유부와는 다르다. 또한 성실론의 심소법은 39법 혹은 49법이 된다. 하지만 성실론의 심소법은 別體(별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량부와 대중부계는 심소의 독립을 부정하였다고 한다. 이들 부파에서는 마음을 하나의 전체로 보는 견해가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受(받을 수)가 있을 때는 마음 전체가 受로 되어 있는 것이며, 想이 있을 때는 마음 전체가 想으로 된다고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즉 갖가지 다른 심리현상을 마음이라는 하나의 것의 다양한 나타남(마음의 차별)으로 해석한 것이다.

 유부는 무아설을 기계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심소법을 각각 별체라고 했다. 그리고 유부는 심심소를 찰나멸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마음이 유기적으로 통일성을 갖추고 활동하는 이유를 밝히기 어렵다. 따라서 심심소의 상응이라는 것을 설하여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마음의 관찰, 심리분석에 있어서 다른 학파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정교하고 치밀한 학설을 전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팔리상좌부의 학설은 더욱 상세하다.

 

2.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는 힘-心不相應行(심불상응행)

 

 심불상응행은 단지 불상응행이라고도 말해진다. 즉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行 을 말한다. 심소법은 심왕과 상응하는 법이며, 그것은 심심소의 구생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존재자이다. 불상응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생멸의 4() 이다. 유부에 있어서 이것이 찰나멸을 성립시키는 힘을 가리킨다. 세간은 제행무상이지만, 거기에는 제행을 무상하게끔 하는 힘이 있다. 이 힘은 찰나멸의 제법을 1찰나에 生 하게끔 하는 것이 없으면 안된다고 보고, 그러한 실제적인 힘을 갖는 것으로서 4相 을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無常力 을 실체화 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非色非心 의 심불상응행법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사리불아비담론 제 3권과 성실론 7, 정량부, 화지부, 대중부등 많은 부파에서 심불상응행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팔리상좌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생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미묘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3. 제법의 삼세실유(三世實有)

 

 설일체유부는 일체의 법이 실재한다고 주장하였던 부파이다. 이들은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를 기본 명제로 삼고 있다. 불타는 무상을 설하였는데 어째서 삼세(과거,현재, 미래)가 진실로 존재하고 법체가 항상 있다는 것인가

 삼세실유란 미래현재과거라는 시간 자체가 실재한다는 말이 아니라 삼세에 걸친 유위제법의 실유를 의미하며, 그것은 결국 법체항유와 다른 말이 아니다. 즉 제법 자체는 삼세에 걸쳐 실재하지만 그것이 처한 상태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라는 시간적 변화의 차별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정통유부의 학설로 승인된 세우의 ‘위부동설(位不同設)’이다. 어떤 법이 아직 작용하지 않은 상태를 미래라 하고, 지금 작용하고 있는 상태를 현제라 하며, 이미 작용을 마친 상태를 과거라 하지만, 법 자체로써는 동일하다. 삼세라는 시간의 흐름은 제법의 변이에 의해서 가능하며, 따라서 지금 작용하고 있는 현제는 오로지 제법의 생성과 소멸의 순간일 따름이다. 이러한 제법분별에 의해서 초월적, 초경험적인 자아를 끌어오지 않아도 세계는 설명 가능하다.

 

 하지만 대승불교는 이러한 설일체유뷰의 설명을 ‘현상의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는 불교의 기본 명제와 모순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설일체유부의 ‘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에 반발하여 ‘무’와 ‘공’을 주장 한다. 즉 일체의 법은 공()이고, 그것은 무자성이다. 자아는 물론이거니와 법 또한 공한 것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혹 택멸의 열반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갖지 않는다.

 

  

 

 

 

 

 

 

 

 

참고 

1. 아비달마의 철학 :上山春平,櫻部建『아비달마의 哲學』하지메 사쿠라베 /호영/ 민족사

2. 인도불교의 역사 :印度佛敎의 歷史 히라가와 아끼라 / 이호근/민족사

3. 인도철학과 불교 권오민 지음/ 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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