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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2 바가바드기타에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 인도철학

바가바드기타에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바가바드기타는 ‘지존의 노래’라는 뜻의 서사시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친족간의 전쟁에서 군대를 총 지휘하는 왕인 아르주나의 딜레마로부터 시작된다. 크리슈나는 아지주나의 스승이며 그의 마부로 이 전쟁에 참가 하였다. 하지만 이 크리슈나는 지존인 비쉬누의 화신이며, 따라서 바가바드 기타는 지존인 크리슈나의 노래이다.

 아르주나의 딜레마란 전쟁을 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전쟁을 하지 않으면 나라를 빼앗기지만, 전쟁을 하면 친족들과 친구들을 자신의 칼로 죽일 지도 모른다. 이러한 딜레마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격게 되는 것이다. 판검사는 법을 거스른 자신의 어머니를 벌하면 모정을 저버리게 된지만, 벌주지 않으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된다. 혹은 진실을 위해 친구를 배신할 것인지 아니면 우정을 위해 거짓을 말할 것인지 등 그 예는 무수히 많다.

 이러한 딜레마는 우리 인간이 행위를 요구하는 세속에 몸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진실의 아트만을 추구하는 양면성을 가진 존제인 것에서 온 것이다. 즉 현실에서 우리 인간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맡은 바를 행해야 한다. 이것은 다르마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육체를 요구하며, 육체를 통한 행위는 욕망을 낳고, 이것은 진실의 아트만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인도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어떠한 행위이든 세속에서의 행위는 생사윤회의 속박과 괴로움을 낳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속박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진리를 추구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행위를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인간 사회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행위를 통한 의무를 인간이 다하지 않으면 사회가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무로써의 가치는 인간이 추구하는 네가지 가치 중에 하나이다.

 

 아르주나의 번민은 진실의 자아가 아니라 인간의 육체에 의해서 육화된 자아에 의한 것이다. 진실의 자아는 행위하지 않으며 변하지 않고 관조할 뿐이다. 하지만 행위하지 않으면 사회가 유지 될 수 없기에 인도인들은 삶을 네단계로 나누어 이러한 인간의 양면성, 즉 행위함과 동시에 진리를 추구하기를 원하는 것을 시기적으로 절충하였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의무를 마친 사람만이 임서기에들어 진실의 자아를 추구할 수 있다

 

나의 출생과 행위의 신비로움을 진실로 아는 이는

육신을 버린 후 다시 재생하는 일없이 나에게로 온다네.

바가바드 기타 4 9

 

이는 진리를 깨달으면 윤회를 끊고 해탈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기존의 방식에 의하면 행위와 욕망을 다한 후에야 이러한 진리를 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일상 생활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이행 하면서도 진리를 추구하고 깨달음을 얻어 해탈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행위는 욕망을 낳고, 그 욕망은 업을 샇게 되는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세속의 행위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대의 욕망은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그 욕망이 낳게 될 결과에 대한 욕망이다. 따라서 윤회의 속박과 고통을 낳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즉 포기해야 할 것은 행위가 아니라 행위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다. 즉 욕망에 배제된 행위를 하면 사회는 유지 되면서도 해탈을 이룰 수 있다. 행위 그 자체는 더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게 되면 비루해 진다. 욕망과 집착이 배제된 행위는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이다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이와 같이 욕망을 떠난 행위,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가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카르마 요가>이다. 즉 세속의 일상적 행위가 종교적 행위로 승화된 것이다.

 

바라타의 아들이여, 무지한 자는 결과에 집착하여 행위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집착 없이 행위하노라

바가바드 기타 3 25

 

바가바드 기타의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굳이 명상을 위해 세상 모든 것을 등지고 숲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바가바드 기타는 이로 안해 다른 성전보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카르마 요가는 한 인간 개개인이 자아를 완전히 상실한체 오직 그 행위를 사회와 절대자 브라흐만에게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행위를 브라흐만에게 맡기고, 집착을 포기한 채 행위하는 자는

마치 물에 젓지 않는 연잎처럼 더 이상 죄악에 물들지 않는다.

 

그러니 언제나 집착없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행하자.

집착이 없는 자는 행위하면서도 궁극에 이르기 때문이다.

바가바드 기타 10 10, 3 19

 

바가바드 기타는 크리슈나의 노래라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 크리슈나는 물질을 통해 일시 일어난 존재일 뿐, 그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고 불멸의 지존인 비쉬누이고 브라흐만이다. 그는 결코 차별적인 존제가 아니다. 그의 사랑은 무차별 적이며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따라서 그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결국 세계의 모든 존재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다. 이러한 신의 믿음과 사랑은 신과 인간을, 인간과 세계를 하나로 만든다. 이는 사랑의 극치인 동시에 인간존재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믿음과 사랑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것, 이를 <박티 요가>라 한다. 즉 신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것 ,모든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같고 그로 인혜 지혜가 열리고 신에게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박티 요가는 대승불교에 영향을 주었다.

 

“바가바드기타 안에는 우파니샤드로부터 이어받은 지혜의 길은 물론이지만, 새롭게 행위의 길을 강조한다. 행위의 길은 그 이전의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던 분야이다. 보살도를 강조하는 대승불교는 대개 이 행위의 길을 통해서도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혜의 길과 행위의 길은 우리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우리 스스로의 해탈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취하는 해탈방법론은 그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자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3의 믿음의 길(박티 요가)이 바로 그것이다”

 (지혜-실천 통한 해탈방법론 제시. 김호성 동국대 교수 )

신에 대한 사랑 이외에도 지식을 통한 구원을 <즈야야 요가>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진실의 자아와 현상적 자아를 구분하는 것과, 진실의 자아인 아트만이 곧 브라흐만임을 통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을 통해서 욕망을 떠난 행위와 절대적인 사랑이 가능하다.

이렇듯 바가바드기타의 지식과 행위, 그리고 신에대한 사랑이 구원의 도로서 종합 되면서 그 이전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대립 또한 종합되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크리슈나가 인간이 상상 가능한 모든 것으로 드라날 수 있으며, 어떠한 속성도 갖지 않는 절대자 이고 모든 신들중의 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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