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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철학의 성격과 특징
               
          -우파니샤드에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목차

인도 철학의 성격과 특징

 

1. 인도 철학의 일반적 특성

인도인의 길

삶이 추구하는 네가지 가치

삶의 네 단계

 

1-1. 인도 철학 체계들의 특성

학파적 구분

시대적 구분

 

 

우파니샤드에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2. 우파니샤드란 무엇인가?

베다로부터 우파니샤드로의 이행

우파니샤드란 무엇인가?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

 

2-1. 우파니샤드의 주요개념

브라흐만, 아트만

, 윤회, 해탈

 

 

 

 

인도인의 길

 인도의 철학은 종교적이다. 이 말은 곧 철학 활동의 궁극 목표인 정지를 통해 종교적 욕구인 구원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인도인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해탈하는 것이다. 목샤(moksa) 즉 해탈은 ‘풀다’ ‘해방되다’ ‘벗어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부터의 벗어남, 해방됨을 추구하는가? 나를 억압하고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닌 인간 자신의 욕망이다. 욕망은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됨으로 인간자신을 끊임없이 억압한다. 이러한 욕망은 곧 에고의 소산이며, 인도 철학에서는 이러한 에고를 무지의 소산이라고 말한다. 이를 정리하면, 결국 무지에서 벗어날 때 욕망으로 부터도 벗어 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해탈이라는 것이다. 인도의 거의 모든 철학은 이러한 해탈을 추구하며, 이것은 존재 본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무지에 기인한 욕망은 그릇된 자아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생겨나며 이로 인해 업(카르마)을 발생시킨다. 업은 새로운 욕망과 또 다른 업을 낳게 되고, 이러한 업에 의해 우리의 삶은 윤회를 거듭하게 됨으로, 결국 욕망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는 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윤회에서 벗어나게 됨을 뜻한다. 인도인들에게 죽음은 또 다른 생으로의 시작이며, 생은 죽음으로의 준비기간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며, 이러한 생과 사를 반복하는 인생을 더없이 괴로운 것으로 생각하였다. 무엇이 괴로운가? 욕망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성취했다 하더라고 곧 소멸되고 만다. 이러한 인간의 성취되지 못하는 욕망은 업을 낳게 되고 업에 의해 생과 사를 반복하게 되니 괴롭다. 이러한 괴로움은 자칫 비관론으로 비추어 질 수도 있지만 인도인들의 이러한 윤회에 대한 관념은 의외로 낙관주의에 기초한다. 즉 괴로움은 즐거움으로, 죽음은 불사로 대체 될 수 있으며 이는 해탈을 통해서 가능하다.     

 해탈이란 상대적인 세계를 떠나 절대적 존재를 통찰함으로써 실현되는 절대적 가치이다. 이렇듯 인도의 철학은 종교적이지만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 삶과 일체의 인간 행위에 기초한 것이며, 존재 본성에 대한 통찰과 경험에 대한 인간 삶의 방식, 즉 살아가는 길이다.

 

삶이 추구하는 네가지 가치

 인도인들은 그들의 삶의 가치를 아르타, 카마, 다르마, 목샤에서 구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들의 삶도 네 단계로 나누고 있다.

 ①아르타 - , 세속적 번영, 이익, 소유의 성취.

아르타는 가족을 부양하고 이끌어 가는데 필요한 일상생활의 모든 것과 종교적 의무를 다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다. 물질적 제화 없이 삶은 영위될 수 없으며, 공물 없이는 제사를 지낼 수 없다.

 ②카마 - 음악이나 연극 미술등 예술적 문화적 삶을 통해 드러나는 즐거움, 좁은 의미로는 사랑, 성적 욕망, 쾌락.

아르타의 가치는 결국 그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카마, 즉 즐거움에 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과 희생을 대가로 하는 카마의 추구는 옳지 못함으로, 이를 위해 카마에는 다르마가 전제 되어야 한다

 ③다르마 -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개인의 종교적 도덕적 의무.

인간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동시에 사회 복지에 기여함으로써 사회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게끔 하는 이념이 다르마이다.   

 ④목샤 - 해탈, 절대 자유의 경지

진정한 쾌락과 행복이 여기에 있으며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아르타와 카마는 육체의 쾌락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다르마는 이러한 개인의 육체적 쾌락이 타인의 고통이나 희생을 요구하지 않게 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그 이상의 것, 즉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죽지 않는 상태를 바란다. 이것이 목샤이다.

 

삶의 네 단계

 인도인들은 삶을 네 단계로 구분함으로써 현실적 삶과 해탈에 대한 추구를 조화시키고 있다.

 ①학생기 - 부보의 슬하를 떠나 다르마를 공부하고 삶에 필요한 기술과 음악, 과학 등을 배우는 시기. 이 교육 제도를 통해 종교적, 철학적 기초를 습득하여 이후 삶의 기초가 되는 성품과 마음가짐을 훈련한다.

 ②가주기 - 집으로 돌아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경제 활동을 하는 시기. 인도인은 태어남과 동시에 세 가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베다를 공부함으로써 스승과 성자에게, 자식을 번창시킴으로써 조상과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고 공물을 바침으로써 신들에게 보답하는 것이 그 빚을 갚는 것인데, 이 가주기는 이러한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시기이다.   ③임서기 - 세속의 의무를 다한 이들이 해탈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소유를 버리고 수행하는 시기. 이 시기는 더 이상 욕망과 쾌락에 물들지 않아야 함으로 인간으로써의 욕망과 의무를 다한 자만이 숲으로 들어갈 수 있다. 절제와 금욕, 고행의 삶을 사는 이들을 침묵의 성자(무니)라 부른다.

 ④유행기 -세속의 욕망을 완전히 떠나는 시기. 세속에 대한 완전한 포기로 인해 살아 있지만 더 이상 살아있는 존재라 하지 않는다. 단지 생물학적인 죽음만이 남아 있음으로 죽어도 일반적인 장례는 치르지 않고, 삼마디라는 의례를 치른다.

 

학파적 구분

 인도철학은 힌두의 가장 오래되고 신성한 문헌인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따라 정통파와 비 전통파로 나누어 진다. 정통파는 절대자이자 창조주인 이슈바라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리고 이 절대 신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의 인격신으로 찬양과 제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 실재로 논의 될 경우에는 탐구의 대상이 된다. 즉 베다의 가르침은 유신론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무신론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비 전통파는 무신론적으로, 합리적인 우리의 경험과 사유를 벗어난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보며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에 더욱 가깝다.  

 1) 정통파 - 6파 철학

미맘사 - 베다의 제의적 또는 금령적 부분에 바탕을 둠. 제의를 통한 해탈을 추구.

베단타 - 우파니샤드에 바탕을 둠. 해탈의 수단으로 지식을 강조.

바이세시카 - 다원론적 실재론으로 세계를 해명함.

느야야 - 그 다원의 실재에 대한 논리와 타당한 지식에 대한 질문들을 통해 해탈 추구.

샹카 - 근본원질과 순수정신이라는 이원의 실재로써 세계를 해석.

요가 - 이원의 실재를 요가 수행을 통하여 분별 하려고 함.

 2) 비 전통파

불교, 자이나교, 차르바카

 

시대적 구분

 인도의 철학은 베다에서 시작한다. 베다는 신에 대한 찬가로 보편적이고도 우주적인 지식을 담고 있다. 이러한 지식은 신들의 영역이다. 어떠한 인간도 죽음 앞에서는 외소하기 때문에, 이 죽음을 뛰어넘는 상태로 자신의 존재를 무한 확장시키고 고양하기 위해서 이러한 신적인 지식을 획득하려 한다. 이것은 베다의 신들에 대한 찬송과 제사, 그리고 존재 본성에 대한 예지의 통찰을 통해 가능하다.

베다 시대의 최고의 선은 제사였다. 하지만 도시가 생기면서 이전의 전통적인 사고와 실제 생활은 더 이상 일치하지 않게 되었고, 믿는 것을 뛰어 넘어 만인이 수긍할 수 있는 진실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믿음의 대상이었던 베다는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마지막 부분으로 베다의 궁국 목적이란 뜻인 베단타라고도 한다. 이러한 우파니샤드는 이러한 베다에 대한 탐구에서 산출 된 것이다. 우파니샤드 이외에도 불교와 자이나교, 그리고 인간에게 가능한 거의 모든 사유가 이러한 도시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정통 바라문사상은 불교와 자이나교등 새로운 믿음들이 생겨남에 따라 이에 대응하기 위해 그들의 제도와 사상을 정비였고, 이 과정에서 스승에게서 제자에서 암송으로 전달되어왔던 지혜에 의해 통찰된 철학적 담론들이 문자로 정리 되었다. 이것이 ‘슈루티’ 즉 전승서로써 이러한 경전들이 정리되어 인도 전통 철학의 근간이 된다.

 이후 베다를 기본으로 하여 제사를 통한 믿음을 중요시 하였던 바라문교(브라마니즘)에 민속 신앙이 혼입되어 지금의 힌두교가 되었다하지만 힌두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규정 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것으로, 인도인들의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 철학과 불교는 서로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였으나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사원이 파괴되면서 불교는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고, 복잡한 힌두교의 다신론은 엄격한 이슬람교의 일신론의 영향을 받아 시크라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 영국의 식민 통치 아래서 인도의 문화제 정체성을 찾기 위해 인도의 고전인 <베다><우파니샤드><바가바드기타> 등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지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베다로부터 우파니샤드로의 이행

우파니샤드는 스승으로부터 은밀하게 전수받은 심오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즉 누구나에게 전수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자격을 갖춘 제가가 스승에게로 나아가 일대 일로 대화를 통해 전해진 가르침이란 뜻이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마지막 부분으로 베다의 끝(anta) 부분으로 궁극적 가치를 담고 있다. 도시의 생성으로 인해서 이전의 제사를 중심으로 한 신의 찬양이 주를 이루었던 베다는 한계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베다가 탐구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되어 베다의 끝이 된 것이 바로 우파니샤드이다. 베다 시대의 주된 관심은 자연의 운행과 질서 그리고 이것의 근원인 신에 대한 찬미였다면, 우파니샤드의 시대는 자연의 신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정신세계와 그 안에서 살아있는 내면의 신인 아트만으로 관심이 넘어오게 된 것이다

 

우파니샤드란 무엇인가?

인도의 철학은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진리를 찾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우파니샤드 또한 이러한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에 만연한 고통과 존재의 허망함, 그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탄생과 죽음에 대한 고민과 번뇌에 대한 고민이고, 이것에서 벗어나게 되는 진리를 찾으려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제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을 ‘진리’라 부르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추구해야할 최고의 목적을 이러한 진리의 발견에 두고 있다.

이러한 우파니샤드는 인도인들의 철학과 종교와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상으로서 힌두교와 불교, 자이나교와 그 외 모든 인도의 사상은 이러한 우파니샤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파니샤드는 인도를 넘어 전 세계에 전파되어 있는데, 특히 불교를 통해 티벳,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반도에 전해 졌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교 용어라고 생각하는 열반, 윤회와 업 등은 불교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우파니샤드로부터 온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주된 관심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궁극적 본질과 우주의 원리, 그리고 ‘나’란 어떠한 존재이며 이 세상과 나는 어떠한 관계인가? 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이러한 문제들의 핵심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세계는 생성과 소멸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는 진실이 아니다. 우파니샤드는 이러한 변화를 궁극적 존재에 대한 통찰을 통해 극복하려하였다. 이렇듯 우파니샤드는 인류 공통의 문제인 자아와 정신세계에 대해서 깊이 사색하고 탐구한 것임으로 특정 종교나 철학을 위한 경전이 아니라 인종, 문화, 종교를 뛰어 넘은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그들이 주는 가르침은, 곧 우주 세계 속의 주인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과, 그 나의 가능성은 무한하게 크다는 것, 또한 스스로를 크게 혹은 작게 만드는 능력이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리, 진리를 깨달은 자를 신의 이름으로 왜곡하여 인격체로 만듦으로써 쉽게 이해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초기 우파니샤드 이후에는 우파니샤드가 종교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고, 도이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여러 종파가 생겨났다. 바가바드기타는 이러한 우파니샤드의 신격화를 가장 잘 보여준다.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차별적이고도 변화하는 세계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우파니샤드에서는 세계는 단일한 실재인 사트(sat, 그것.존재.)의 필연적 산물이며, 그것은 다시 사트로 회귀한다고 말한다. 변화와 차별의 세계는 단지 단일한 사트가 명칭과 형태를 달리하여 나타난 것일 뿐, 그 본질은 동일하다. 인간이 추구하는 세계는 이러한 차별이 극복된 하나의 단일한 세계이다. 인간에게 이 세계의 차별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러한 차별은 현상일 뿐이다. 실재가 아닌 현상은 무상하다. 곧 차별도 무상하다. 즉 현상은 차별적으로 있다가 사라지는 것임으로 무상한 것일 뿐이다. 하나됨의 세계, 그것은 곧 브라흐만이다. 세계의 궁극적 본질은 바로 단일한 실재인 브라흐만인 것이다. 단일한 실재인 브라흐만은 자아를 통해서 알려질 수 있다. 인격적 바탕이 되는 나의 내적 자아는 브라흐만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브라흐만이 곧 아트만이다.

 

 

우파니샤드의 주요 개념

-브라흐만과 아트만

우파니샤드의 주제는 최고의 실재인 브라흐만과 아트만이다. 우주의 나를 브라흐만 이라고 한다면 개체로서의 나는 아트만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트만이란 무엇인가? 내 눈앞의 펼쳐진 모든 것은 볼 수 있지만 그것을 보는 그 눈은 그 자신은 볼 수 없듯이, 자아는 스스로의 그 자체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을 통해 다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이러한 우주 만유의 토대가 되는 근원적 주체를 아트만이라고하였다.  

하지만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둘이 하니라 하나이다. 작은 열매 속에 큰 나무가 될 근원이 담겨져 있듯이 개체의 아트만 속에는 최고의 실재인 브라흐만이 들어있다. 즉 브라흐만을 아는자 브라흐만이 된다. 아트만이 실재라면 브라흐만은 실재의 실재로서 진실의 진실이다.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렇듯 자기 자신인 아트만이 브라흐만과 동일한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이는 아트만, 즉 나에 대한 주체적인 자아 발견이 곧 진리를 얻는 것임을 뜻한다

 

- , 윤회, 해탈

윤회는 업에 의하여 생겨난다. 스스로 만든 업에 따라 그 업을 만든 자가 업에 의한 책임을 지는 곳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며, 또한 이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새로운 업을 만들 수도 있는 것 또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다. 윤회의 목적은 이러한 업의 결과를 겪는 것과 새로운 업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렇듯 우파니샤드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주체성을 강조한다. 비관론적 운명론으로 업을 이해한다면 인간은 전생의 업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업보를 짊어지고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씌어져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스스로 그 업을 만들 수도 있고 벗어날 수 있음으로 낙관론 적이고 적극적인 것이다.

업이 계속하여 생기는 이유는 욕망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회를 그치고자 한다면 욕망이 남지 않도록 나 자신, 내 안의 욕망을 비워내야 한다. 육체를 통한 욕망을 버리고 나 자신이 브라흐만임을 깨달을 때,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것이 곧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해탈이며 윤회의 목적이다.

해탈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며, 그가 만든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세계는 모든 다양성이 하나로 통일되어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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