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철학의 성격과 특징
               
          -우파니샤드에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목차

인도 철학의 성격과 특징

 

1. 인도 철학의 일반적 특성

인도인의 길

삶이 추구하는 네가지 가치

삶의 네 단계

 

1-1. 인도 철학 체계들의 특성

학파적 구분

시대적 구분

 

 

우파니샤드에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2. 우파니샤드란 무엇인가?

베다로부터 우파니샤드로의 이행

우파니샤드란 무엇인가?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

 

2-1. 우파니샤드의 주요개념

브라흐만, 아트만

, 윤회, 해탈

 

 

 

 

인도인의 길

 인도의 철학은 종교적이다. 이 말은 곧 철학 활동의 궁극 목표인 정지를 통해 종교적 욕구인 구원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인도인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해탈하는 것이다. 목샤(moksa) 즉 해탈은 ‘풀다’ ‘해방되다’ ‘벗어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부터의 벗어남, 해방됨을 추구하는가? 나를 억압하고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닌 인간 자신의 욕망이다. 욕망은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됨으로 인간자신을 끊임없이 억압한다. 이러한 욕망은 곧 에고의 소산이며, 인도 철학에서는 이러한 에고를 무지의 소산이라고 말한다. 이를 정리하면, 결국 무지에서 벗어날 때 욕망으로 부터도 벗어 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해탈이라는 것이다. 인도의 거의 모든 철학은 이러한 해탈을 추구하며, 이것은 존재 본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무지에 기인한 욕망은 그릇된 자아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생겨나며 이로 인해 업(카르마)을 발생시킨다. 업은 새로운 욕망과 또 다른 업을 낳게 되고, 이러한 업에 의해 우리의 삶은 윤회를 거듭하게 됨으로, 결국 욕망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는 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윤회에서 벗어나게 됨을 뜻한다. 인도인들에게 죽음은 또 다른 생으로의 시작이며, 생은 죽음으로의 준비기간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며, 이러한 생과 사를 반복하는 인생을 더없이 괴로운 것으로 생각하였다. 무엇이 괴로운가? 욕망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성취했다 하더라고 곧 소멸되고 만다. 이러한 인간의 성취되지 못하는 욕망은 업을 낳게 되고 업에 의해 생과 사를 반복하게 되니 괴롭다. 이러한 괴로움은 자칫 비관론으로 비추어 질 수도 있지만 인도인들의 이러한 윤회에 대한 관념은 의외로 낙관주의에 기초한다. 즉 괴로움은 즐거움으로, 죽음은 불사로 대체 될 수 있으며 이는 해탈을 통해서 가능하다.     

 해탈이란 상대적인 세계를 떠나 절대적 존재를 통찰함으로써 실현되는 절대적 가치이다. 이렇듯 인도의 철학은 종교적이지만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 삶과 일체의 인간 행위에 기초한 것이며, 존재 본성에 대한 통찰과 경험에 대한 인간 삶의 방식, 즉 살아가는 길이다.

 

삶이 추구하는 네가지 가치

 인도인들은 그들의 삶의 가치를 아르타, 카마, 다르마, 목샤에서 구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들의 삶도 네 단계로 나누고 있다.

 ①아르타 - , 세속적 번영, 이익, 소유의 성취.

아르타는 가족을 부양하고 이끌어 가는데 필요한 일상생활의 모든 것과 종교적 의무를 다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다. 물질적 제화 없이 삶은 영위될 수 없으며, 공물 없이는 제사를 지낼 수 없다.

 ②카마 - 음악이나 연극 미술등 예술적 문화적 삶을 통해 드러나는 즐거움, 좁은 의미로는 사랑, 성적 욕망, 쾌락.

아르타의 가치는 결국 그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카마, 즉 즐거움에 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과 희생을 대가로 하는 카마의 추구는 옳지 못함으로, 이를 위해 카마에는 다르마가 전제 되어야 한다

 ③다르마 -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개인의 종교적 도덕적 의무.

인간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동시에 사회 복지에 기여함으로써 사회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게끔 하는 이념이 다르마이다.   

 ④목샤 - 해탈, 절대 자유의 경지

진정한 쾌락과 행복이 여기에 있으며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아르타와 카마는 육체의 쾌락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다르마는 이러한 개인의 육체적 쾌락이 타인의 고통이나 희생을 요구하지 않게 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그 이상의 것, 즉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죽지 않는 상태를 바란다. 이것이 목샤이다.

 

삶의 네 단계

 인도인들은 삶을 네 단계로 구분함으로써 현실적 삶과 해탈에 대한 추구를 조화시키고 있다.

 ①학생기 - 부보의 슬하를 떠나 다르마를 공부하고 삶에 필요한 기술과 음악, 과학 등을 배우는 시기. 이 교육 제도를 통해 종교적, 철학적 기초를 습득하여 이후 삶의 기초가 되는 성품과 마음가짐을 훈련한다.

 ②가주기 - 집으로 돌아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경제 활동을 하는 시기. 인도인은 태어남과 동시에 세 가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베다를 공부함으로써 스승과 성자에게, 자식을 번창시킴으로써 조상과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고 공물을 바침으로써 신들에게 보답하는 것이 그 빚을 갚는 것인데, 이 가주기는 이러한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시기이다.   ③임서기 - 세속의 의무를 다한 이들이 해탈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소유를 버리고 수행하는 시기. 이 시기는 더 이상 욕망과 쾌락에 물들지 않아야 함으로 인간으로써의 욕망과 의무를 다한 자만이 숲으로 들어갈 수 있다. 절제와 금욕, 고행의 삶을 사는 이들을 침묵의 성자(무니)라 부른다.

 ④유행기 -세속의 욕망을 완전히 떠나는 시기. 세속에 대한 완전한 포기로 인해 살아 있지만 더 이상 살아있는 존재라 하지 않는다. 단지 생물학적인 죽음만이 남아 있음으로 죽어도 일반적인 장례는 치르지 않고, 삼마디라는 의례를 치른다.

 

학파적 구분

 인도철학은 힌두의 가장 오래되고 신성한 문헌인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따라 정통파와 비 전통파로 나누어 진다. 정통파는 절대자이자 창조주인 이슈바라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리고 이 절대 신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의 인격신으로 찬양과 제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 실재로 논의 될 경우에는 탐구의 대상이 된다. 즉 베다의 가르침은 유신론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무신론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비 전통파는 무신론적으로, 합리적인 우리의 경험과 사유를 벗어난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보며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에 더욱 가깝다.  

 1) 정통파 - 6파 철학

미맘사 - 베다의 제의적 또는 금령적 부분에 바탕을 둠. 제의를 통한 해탈을 추구.

베단타 - 우파니샤드에 바탕을 둠. 해탈의 수단으로 지식을 강조.

바이세시카 - 다원론적 실재론으로 세계를 해명함.

느야야 - 그 다원의 실재에 대한 논리와 타당한 지식에 대한 질문들을 통해 해탈 추구.

샹카 - 근본원질과 순수정신이라는 이원의 실재로써 세계를 해석.

요가 - 이원의 실재를 요가 수행을 통하여 분별 하려고 함.

 2) 비 전통파

불교, 자이나교, 차르바카

 

시대적 구분

 인도의 철학은 베다에서 시작한다. 베다는 신에 대한 찬가로 보편적이고도 우주적인 지식을 담고 있다. 이러한 지식은 신들의 영역이다. 어떠한 인간도 죽음 앞에서는 외소하기 때문에, 이 죽음을 뛰어넘는 상태로 자신의 존재를 무한 확장시키고 고양하기 위해서 이러한 신적인 지식을 획득하려 한다. 이것은 베다의 신들에 대한 찬송과 제사, 그리고 존재 본성에 대한 예지의 통찰을 통해 가능하다.

베다 시대의 최고의 선은 제사였다. 하지만 도시가 생기면서 이전의 전통적인 사고와 실제 생활은 더 이상 일치하지 않게 되었고, 믿는 것을 뛰어 넘어 만인이 수긍할 수 있는 진실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믿음의 대상이었던 베다는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마지막 부분으로 베다의 궁국 목적이란 뜻인 베단타라고도 한다. 이러한 우파니샤드는 이러한 베다에 대한 탐구에서 산출 된 것이다. 우파니샤드 이외에도 불교와 자이나교, 그리고 인간에게 가능한 거의 모든 사유가 이러한 도시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정통 바라문사상은 불교와 자이나교등 새로운 믿음들이 생겨남에 따라 이에 대응하기 위해 그들의 제도와 사상을 정비였고, 이 과정에서 스승에게서 제자에서 암송으로 전달되어왔던 지혜에 의해 통찰된 철학적 담론들이 문자로 정리 되었다. 이것이 ‘슈루티’ 즉 전승서로써 이러한 경전들이 정리되어 인도 전통 철학의 근간이 된다.

 이후 베다를 기본으로 하여 제사를 통한 믿음을 중요시 하였던 바라문교(브라마니즘)에 민속 신앙이 혼입되어 지금의 힌두교가 되었다하지만 힌두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규정 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것으로, 인도인들의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 철학과 불교는 서로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였으나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사원이 파괴되면서 불교는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고, 복잡한 힌두교의 다신론은 엄격한 이슬람교의 일신론의 영향을 받아 시크라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 영국의 식민 통치 아래서 인도의 문화제 정체성을 찾기 위해 인도의 고전인 <베다><우파니샤드><바가바드기타> 등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지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베다로부터 우파니샤드로의 이행

우파니샤드는 스승으로부터 은밀하게 전수받은 심오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즉 누구나에게 전수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자격을 갖춘 제가가 스승에게로 나아가 일대 일로 대화를 통해 전해진 가르침이란 뜻이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마지막 부분으로 베다의 끝(anta) 부분으로 궁극적 가치를 담고 있다. 도시의 생성으로 인해서 이전의 제사를 중심으로 한 신의 찬양이 주를 이루었던 베다는 한계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베다가 탐구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되어 베다의 끝이 된 것이 바로 우파니샤드이다. 베다 시대의 주된 관심은 자연의 운행과 질서 그리고 이것의 근원인 신에 대한 찬미였다면, 우파니샤드의 시대는 자연의 신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정신세계와 그 안에서 살아있는 내면의 신인 아트만으로 관심이 넘어오게 된 것이다

 

우파니샤드란 무엇인가?

인도의 철학은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진리를 찾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우파니샤드 또한 이러한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에 만연한 고통과 존재의 허망함, 그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탄생과 죽음에 대한 고민과 번뇌에 대한 고민이고, 이것에서 벗어나게 되는 진리를 찾으려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제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을 ‘진리’라 부르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추구해야할 최고의 목적을 이러한 진리의 발견에 두고 있다.

이러한 우파니샤드는 인도인들의 철학과 종교와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상으로서 힌두교와 불교, 자이나교와 그 외 모든 인도의 사상은 이러한 우파니샤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파니샤드는 인도를 넘어 전 세계에 전파되어 있는데, 특히 불교를 통해 티벳,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반도에 전해 졌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교 용어라고 생각하는 열반, 윤회와 업 등은 불교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우파니샤드로부터 온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주된 관심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궁극적 본질과 우주의 원리, 그리고 ‘나’란 어떠한 존재이며 이 세상과 나는 어떠한 관계인가? 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이러한 문제들의 핵심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세계는 생성과 소멸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는 진실이 아니다. 우파니샤드는 이러한 변화를 궁극적 존재에 대한 통찰을 통해 극복하려하였다. 이렇듯 우파니샤드는 인류 공통의 문제인 자아와 정신세계에 대해서 깊이 사색하고 탐구한 것임으로 특정 종교나 철학을 위한 경전이 아니라 인종, 문화, 종교를 뛰어 넘은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그들이 주는 가르침은, 곧 우주 세계 속의 주인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과, 그 나의 가능성은 무한하게 크다는 것, 또한 스스로를 크게 혹은 작게 만드는 능력이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리, 진리를 깨달은 자를 신의 이름으로 왜곡하여 인격체로 만듦으로써 쉽게 이해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초기 우파니샤드 이후에는 우파니샤드가 종교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고, 도이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여러 종파가 생겨났다. 바가바드기타는 이러한 우파니샤드의 신격화를 가장 잘 보여준다.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차별적이고도 변화하는 세계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우파니샤드에서는 세계는 단일한 실재인 사트(sat, 그것.존재.)의 필연적 산물이며, 그것은 다시 사트로 회귀한다고 말한다. 변화와 차별의 세계는 단지 단일한 사트가 명칭과 형태를 달리하여 나타난 것일 뿐, 그 본질은 동일하다. 인간이 추구하는 세계는 이러한 차별이 극복된 하나의 단일한 세계이다. 인간에게 이 세계의 차별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러한 차별은 현상일 뿐이다. 실재가 아닌 현상은 무상하다. 곧 차별도 무상하다. 즉 현상은 차별적으로 있다가 사라지는 것임으로 무상한 것일 뿐이다. 하나됨의 세계, 그것은 곧 브라흐만이다. 세계의 궁극적 본질은 바로 단일한 실재인 브라흐만인 것이다. 단일한 실재인 브라흐만은 자아를 통해서 알려질 수 있다. 인격적 바탕이 되는 나의 내적 자아는 브라흐만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브라흐만이 곧 아트만이다.

 

 

우파니샤드의 주요 개념

-브라흐만과 아트만

우파니샤드의 주제는 최고의 실재인 브라흐만과 아트만이다. 우주의 나를 브라흐만 이라고 한다면 개체로서의 나는 아트만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트만이란 무엇인가? 내 눈앞의 펼쳐진 모든 것은 볼 수 있지만 그것을 보는 그 눈은 그 자신은 볼 수 없듯이, 자아는 스스로의 그 자체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을 통해 다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이러한 우주 만유의 토대가 되는 근원적 주체를 아트만이라고하였다.  

하지만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둘이 하니라 하나이다. 작은 열매 속에 큰 나무가 될 근원이 담겨져 있듯이 개체의 아트만 속에는 최고의 실재인 브라흐만이 들어있다. 즉 브라흐만을 아는자 브라흐만이 된다. 아트만이 실재라면 브라흐만은 실재의 실재로서 진실의 진실이다.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렇듯 자기 자신인 아트만이 브라흐만과 동일한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이는 아트만, 즉 나에 대한 주체적인 자아 발견이 곧 진리를 얻는 것임을 뜻한다

 

- , 윤회, 해탈

윤회는 업에 의하여 생겨난다. 스스로 만든 업에 따라 그 업을 만든 자가 업에 의한 책임을 지는 곳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며, 또한 이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새로운 업을 만들 수도 있는 것 또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다. 윤회의 목적은 이러한 업의 결과를 겪는 것과 새로운 업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렇듯 우파니샤드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주체성을 강조한다. 비관론적 운명론으로 업을 이해한다면 인간은 전생의 업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업보를 짊어지고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씌어져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스스로 그 업을 만들 수도 있고 벗어날 수 있음으로 낙관론 적이고 적극적인 것이다.

업이 계속하여 생기는 이유는 욕망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회를 그치고자 한다면 욕망이 남지 않도록 나 자신, 내 안의 욕망을 비워내야 한다. 육체를 통한 욕망을 버리고 나 자신이 브라흐만임을 깨달을 때,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것이 곧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해탈이며 윤회의 목적이다.

해탈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며, 그가 만든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세계는 모든 다양성이 하나로 통일되어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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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달마 불교에서의 인간과 세계의 이해

 

  

     

 

 

목차

 

1장 우주

1. 누가 우주를 창조하였는가

2. 우주의 형성과 파괴

3. 우리가 사는 곳

 

2장 인간

1. 삼계(三界). 오취(五趣). 사생(四生)

2. ()의 이론

3. ()과 윤회(輪廻)

4. 번뇌(煩惱)의 세계(世界)

5. 12연기(緣起)

6. 무상과 무아

7. 열반

 

3장 아비달마의 법()의 세계

1. 마음의 작용-심소법(心所法)

2.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는 힘 - 心不相應行(심불상응행)

3. 제법의 삼세실유(三世實有)

 

 

 

 

1장 우주

 

 

1. 누가 우주를 창조하였는가

 

 구사론에 따르면, 세계는 '사트바 카르만(sattva-karman)'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사트바'란 보통 유정(有情), 중생(衆生)으로 번역되는 말로서, 이 세상에 생명을 지니고 존재하는 것, 모든 살아있는 것을 의미한다. '카르만'은 보통 '()'으로 번역되지만, 행위, 동작의 의미이다. 따라서 '사트바 카르만'은 생명있는 것의 행위, 생명체의 생활. 활동이라는 뜻이다.

 서양 기독교의 세계관은 자연이 만들어 지고 그 공간을 생물과 인간이 차례로 채우지만 불교에서는 반대로 생명을 가진 것의 행위, 동작에 의해 자연계가 생겨난다고 한다. 즉 자연계의 성립에 이전에 생명을 가진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살아 행위함, 이것이 전체로서 하나의 우주를 창출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생각했다. 우주를 생성하는 에너지와 하나의 개체, 한 인간이 살아 행위하고 동작하는 힘은 근원적으로 동일하다.

 

2. 우주의 형성과 파괴

 

 우주의 형성은 구사론의 기술에 따르면 우선 아무런 존재도 없는 광대하고 텅빈 공간에 사트바 카르만의 힘이 활동함으로써 '미풍(微風)'이 불면서 원반 모습의 견고한 '대기의 층'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대기층 위에 '물의 층'이 형성된다. 물의 층은 다시 사트바 카르만에 의해 부는 바람으로 말미암아 "끊인 우유의 표면에 막이 생기는 것 같이" 점차 응고되어, 상층의 7분의 2 '황금의 층'이 된다. 나머지 7분의 5는 물의 층으로 남아있다. 결국 무한하다고 하여도 상관이 없는 광대한 원반에 펼쳐져 있는 대기층의 중심부에, 이에 비해서는 훨씬 작으나 동일한 원반 모습의 물과 황금의 층이 중첩되어 놓여 있다. 이 황금의 층의 표면이 대지이다. 그리고 대지 위에는 다시 산. 강 등이 형성되며, 이리하여 여기에 자연계가 완성되는 것이다.

 자연계가 완성되면 여기에 생물 즉 유정(sattva)이 발생한다. 이 발생에도 정해진 순서가 있어, 우선 천상의 세계부터 시작된다. 즉 처음부터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하늘의 신들이다. 다음으로는 지표 세계에 인간. 동물 등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지하 세계 즉 지옥에도 지옥의 사트바가 태어남으로써 세계 형성의 과정은 완료된다.

 세계 형성의 과정에 계속하여 다음의 20안타라칼파 동안에는 형성된 세계가 지속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끝나면 세계 파멸의 과정이 따른다. 이것도 20안타라칼파 동안 계속되며, 세계 형성의 과정과 전혀 역의 순으로 이루어지며, 그런 다음에는 단지 광대하고 텅 빈 공간만이 남는다. 이로부터 20안타라칼파 동안은 텅빈 공간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무의 기간이다. 이 기간이 지나가면 다시 사트바 카르만이 미풍을 일으켜, 다음의 세계 생성의 기간이 시작된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세계의 형성. 지속. 파멸. 공무의 네 과정이 계속 순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대자연의 생멸의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하여 무한의 과거로부터 무한의 미래에까지 영원히 계속된다.

 

 

3. 우리가 사는 곳

 지상의 세계에서 우리가 사는 곳은 수메루산의 남쪽, 일곱 외륜산 바깥의 큰 바다 가운데에 삼각형으로 돌출되어 있는 잠부주이다. 잠부주 북부에는 아홉의 검은 산이 가로놓여 있다. 이를 지나 더욱 북쪽으로 나아가면 '눈의 산(히말라야)'이 있으며, 눈의 산 저쪽에는 '향기로 가득찬 산'이 있다. 눈의 산과 향기로 가득찬 산 사이에는 '염열(炎熱)의 괴로움이 없는 연못'이 있고, 여기에는 강가(갠지스강), 신두(인더스강), 쉬타, 바크슈의 4대하가 흘러 잠부대륙을 윤택하게 하고 있다. 뭇 사람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이 연못에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한다. 위에 기술한 잠부주는 결국 고대 인도인의 눈에 비친 인도의 국토이다.

 이와 같이 대기. . 황금의 세 층의 기반 위에 서있는 수메루산을 중심으로 하여, 이를 둘러싼 네 개의 대륙, 해와 달, 천계. 지옥 등 모든 것이 포함된 자연계의 한 단위가 성립된다.

 

 

 

2장 인간

 

1. 삼계(三界). 오취(五趣). 사생(四生)

 

 불교는 이 공간 안에서 태어나고 죽어가는 생명체, 즉 인간의 삶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아비달마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유정)의 외면적 존재방식은 '삼계(三界)', '오취(五趣)', '사생(四生)'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삼계(三界)'라는 말은 옛 부터 일상적인 말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셋을 말한다. 욕계는 본능적 욕망이 성하고 강하게 작용하는 세계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색계(色界)란 물질, 육체의 세계 즉 육체를 갖고 생존하는 세계의 의미가 되며, 무색계는 육체가 없는, 순수한 정신적 생존의 세계가 될 것이다. 지하의 세계. 지표의 세계. 공중의 세계(천계) 중의 하층은 욕계에, 천계에 상층은 색계에 속하며, 무색계는 그 위 천계의 최상층에 있다고 한다. 1) '지옥(地獄)' 2) '아귀(餓鬼)', 3)'축생(畜生)', 4)'인간(人間)'. 천계에는 5)'()'(천인, 천녀. 즉 하늘의 신들)의 생활이 있다. 이를 '오취(五趣)'라고 한다. 이 다섯에 '아수라(阿修羅)'를 더하여 육취(六趣) 라 한다. 온갖 고통을 겪는 지옥은 물론이고, 기갈의 고통을 받는 아귀이건, 약육강식의 축생(동물계)이건, 모두 인간의 생활에 비해 열등하며 고뇌가 많으며 바람직스럽지 못한 경우이다.(지옥. 아귀. 축생을 三惡趣, 三惡道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천계는 인간세계보다 훨씬 훌륭하고 행복하며 바람직스러운 경지이다.

 그러나 천계는 서양 기독교의 천국이나 이상화 된 파라다이스와 같은 영원한 행복의 세계는 아니다. 다른 사취에 비하면 그 격이 높기는 하지만, 轉變과 쇠망을 피할 수 없는 세계이다. 따라서 이 천계의 생존도 인간 및 지옥에서의 생존과 마찬가지로 윤회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유정은 오취의 어느 하나에 속하여 살아가며 죽으면 또한 오취의 어느 하나로 태어난다. 예를 들어 인간의 한 생애를 마치고 하늘의 신으로 태어나는 유정도 있을 것이며,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도 있을 것이다. 이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지옥에서 고통을 겪는 자도 천계의 신도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2. ()의 이론

 

 이러한 윤회는 그 유정의 행위 업 (Karman,)에 따른 것이다. 과거의 선한 행위의 결과는 현재 즐겁고 바람직스러운 생애를 초래하고, 과거의 악한 행위의 결과는 현재 괴롭고 바람직스럽지 못한 생애를 초래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이다.

 업의 이론에 의하면 과거의 행위가 현재의 자기의 존재방식을 결정한다고 하지만, 이는 자기의 존재방식이 이미 과거에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주어져 있어 현재로서는 이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이유는 과거의 업이 현재의 상황을 결정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업은 미래의 상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지금의 삶이 전생의 업으로 비루할지라도 이번 생을 열심히 잘 살면 다음 생은 달라질 수 있다.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탄식하는 사람에게 업론은 운명론이 되지만, 현재에 서서 미래를 바라보는 자에게 그것은 반대로 자신을 고무하여 밝은 미래를 개척하게끔 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업이 유정의 존재방식 모두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인과관계가 무수히 작용하여 순간순간의 인간의 생존을 구성하며, 업과 그 결과라는 관계는 무수하고 다양한 인과관계 중에서 다만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3. ()과 윤회(輪廻)

 

 불교는 무아(無我)를 설한다. '()'라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악한 행위를 하여 그 결과 지옥. 아귀. 축생과 같은 좋지 못한 경계에 태어나는 것도, 선한 행위를 하여 그 결과 보다 좋은 경계에 태어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다. 불교가 본래 지향하는 바는 윤회를 초월한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윤회는 도덕적 선악의 세계이다. 평상의 인간(범부)은 선악의 세계에 산다. 이러한 인간의 선악적 존재를 지탱하는 지주는 아비달마논사에 의하면 업의 인과의 원칙이다. 아비달마에서는 누구도 다른 사람에 대해 그 선악을 판단할 수 없고, 전자의 신과 같은 자가 어디엔가 있어 사람의 선악을 심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생애에 과보가 나타나지 않고, 다음 생애(來世) 또는 그 다음 생애에서야 나타난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행위는 필연적으로 과보를 받는다. 이것은 절대의 원칙이다.

 업의 결과의 필연성과 자업자득, 이 두 원칙이 있음으로써 선악의 기본이 성립된다. 업의 이론은 평상적 인간의 삶의 세계의 도덕적 질서 수립을 말하는 것이다. 아비달마의 입장은 업과 윤회의 세계를 궁극적으로 그러해야 할 모습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며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평상적 인간의 삶의 현실과 선악의 원리가 그 삶을 관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도덕적 요구를 승인한다.

 불교에 의하는 한 우리의 세계는 업에 의해 유전 상속한다.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탄생으로 이어진다. 업을 이야기 하는 한 윤회는 필연적인 것이다.

 

4. 번뇌(煩惱)의 세계(世界)

 

 업이 윤회의 삶을 결과할 때에는 필히 번뇌를 수반한다고 한다. . 윤회의 세계는 또한 번뇌의 세계이며 이 세계의 일체는 유루라고 한다.

 '유루(有漏)'는 원어인 산스크리트어로는 사스라바(s srava)이다. '아스라바( srava)를 지닌 것'이란 뜻이다. 아스라바가 번뇌의 의미라면, 사르라바 즉 유루는 '번뇌를 지닌 자'라는 의미가 된다. 번뇌를 지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설일체유부적으로 이를 표현하면, 범부의 세계에 있어 모든 존재는 "번뇌의 대상이거나, 번뇌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영역에 속한다. 깨달음이 영역에 속하는 것은 모두 '무루(無漏)'이다.

 모든 존재는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두 이러한 의미에서 유루이다. 즉 번뇌를 지닌 것이다. 업은 윤회함으로 번뇌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이러한 평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벗어나, 즉 업과 번뇌에 지배되는 미혹의 세계에서 초월하여 궁극적 진실인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은 지혜로써 마음을 번뇌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무루의 길이다. 이 실천도를 나아가는 자는 '성자'로 불린다. 불교에서 말하는 성자는 번뇌를 끊은 자인 것이다. 이렇듯 모든 번뇌를 끊고 일체의 진리와 만난 자를 ‘아라한’이라고 한다.

 

 

5. 12연기(緣起)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이고, 법을 보는 자 연기를 보는 자이다”

 불타는 괴로움을 일으키는 갖가지 조간들을 12 갈래로 이루어진 인과의 연쇄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를 12연기(緣起) 라고 한다. ‘연기란 ~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 난다’ 는 뜻으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 난다는 말로 정형화 될 수 있다. 즉 지금 현제는 내가 과거에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따라 형성된 것이며,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따라 지금 이후의 미래가 달라진 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속적이고도 단일한 자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번뇌와 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연기에 대한 여러 설중에서 과거 현제 미래의 생에 걸쳐 5온이 상속하는 것이라는 분위(分位) 연기설이 전통적 정설로 인정되어 지는데, 이는 부파불교의 가장 유력하였던 부파인 설일체유부의 학설로서 이에 따라 12연기를 삼세(三世) 양중(兩重)의 인과설로 해석하게 되었다. ‘무명’과 ‘행’은 과거 생에서 지은 현제 생의 원인이고, ‘식’에서 ‘수’에 이르는 5지는 그 결과이며 (이상 과거현제의 인과), ‘애’와 ‘취’와 ‘유’는 현제 생에서 짓는 미래생의 원인이고, ‘생’과 ‘노사’는 그 결과이다(이상 현제미래의 인과).   

 

6. 무상과 무아(無我)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변화의 영역이다. 영원한 것은 다만 사유와 언어의 세계일 뿐 현실이 아니다. 불교에서의 언어는 마치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는 수단이듯이 다만 사물을 지시하는 도구일 뿐이지만, 현실의 세계는 언제나 추상의 언어에 은폐되어 나타난다.

 자아란 경험의 조건인 5온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5온의 상속을 일시 가설한 것일 뿐이다.

 

첫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행위하는 것인가?

2 5천 가지 부품의 결합체를 일시 차() 라고 이름할 뿐 그것과는 별도의 차가 존재하지 않듯이, 5온의 총아를 일시 자아라고 이름할 뿐 그것의 토대가 되는 별도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영속적이고도 단일 보편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경험(혹은 세계)은 어떻게 지속 가능한 것인가?

고정불변의 자아가 존재하여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번뇌와 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셋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데 도덕적인 책임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그에 집착함으로써 온갖 번뇌와 업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끊임없이 유전하게 된다. 초기불교의 윤리는 무아에 기초한 ‘버림’의 윤리이다. 세계의 모든 악은 탐욕과 증오로부터 비롯되며, 그것은 바로 자아에 대한 그릇된 믿음인 무지로부터 야기된다. 자아를 버리지 않는 한 괴로움의 속박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7. 열반

 

열반이란 경험세계 자체(5)의 소멸이 아니라 그것을 괴로움의 세계로 드러나게 하는 조건들, 이를테면 무지와 그에 따른 아집과 집착, 그리고 탐욕과 증오 등의 소멸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것은 5온 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끔 하는 조건이 된다. 그럴 때 열반은 사후가 아닌 살아있는 동안 ‘지금 여기서’ 획득하는 것이며, 현실의 삶을 자유롭고 풍요로운 충만함으로 이끄는 힘이 된다.

 그렇다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8정도를 통해 중도를 실현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이야기한다. 중도란 극단적인 고행이나 지나친 쾌락을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존재 본성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이것이 정견(正見)이다. 정견은 바로 무상과 무아에 대한 통찰이다. 경전에서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 의 4성제를 바로 관찰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으며 이 중에서도 괴로움의 진리에 대한 통찰이 강조된다. 괴로움을 알지 못하면 그것의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방식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계戒 정定 혜慧 를 3학學 이라고 하여, 해탈의 세 축으로 삼고 있다. 8정도 중에서 정견과 정 사유는 혜학에 포함되고, 정어정업정명은 계학에, 정념과 정정은 정학에, 그리고 정정진은 3학 모두에 포함된다. 3학은 모든 괴로움과 속박에서 벗어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불타는 이것이야 말로 바로 인류의 무거운 짐을 벗어 놓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3장 아비달마의 법()의 세계

 

1. 마음의 작용-심소법(心所法)

 

 아비다르마라는 말은 “법에 대하여”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설일체유부(일체의 법이 실재한다고 주장)에서는 “법에 대한 연구”라는 의미로 해석하며, 팔리상좌부에서는 “훌륭한 법”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불타가 설한 “법”에 대한 연구이다. 다르마란 불타가 설한 교법을 말한다. 불타의 교법은 현실의 인간 존재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인간 존재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현상’으로 존재하고 있고, 동시에 ‘요소적 실재’이기도 하다. 현상으로서의 현실은 육체와 정신, 외계 등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또 다시 세세한 요소로 분석된다.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무상하다. 따라서 법은 실재이긴 하지만 ‘영원한 실재’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에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적인 법을, 상주하는 법 (무위법-조작됨이 없는 법, 더 이상 소멸하지 않는 존재) 과 무상한 법 (유위법-다양한 인과적 관계로써 조작되어 생성 소멸하는 경험세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이 부파불교 시대이다. 무위법은 열반으로 대표된다. 열반은 시간을 초월한 실재이며, 불타는 깨달음을 통해 이 열반과 합일하였다. 유부에서는 열반을 깨달음의 지혜의 힘에 의해 번뇌가 끊어지고 번뇌가 영구히 불생하게 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유위법은 무상하다. 이 무상함에 대해 상좌부나 유부는 유위법은 자상을 갖지만 1찰나만 현세에 존재한다고 해석하였다. 유위법은 실재이지만, 찰나 멸한다는 점에서 법은 파악될 수 없다.

 

 유루법은 번뇌에 더럽혀진 법을 말한다. 무루법은 번뇌에 더럽혀져 있지 않은 법이다. 불타나 아라한의 깨달음의 지혜는 번뇌를 모두 끊고 있기에 무루이다. 아함경에는 많은 종류의 번뇌가 밝혀져 있다. 이것은 번뇌를 끊는 것이 불교의 주목적이기 때문이다. 아비다르마 시대에는 이 아함경의 심소법(心所法-마음에 소유된 법) 을 이어 받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발전시킨다. 번뇌를 끊기 위해 번뇌와 다른 심리 작용이 어떻게 협동하는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부는 심소법을 독립의 실체로 보았다. 탐욕과 분노는 작용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양자가 다른 기능을 갖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유부가 46종의 심소를 독립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마음은 갖가지 심리작용을 그 속에 포함하는 하나의 종합된 통일체로 보았다. 하지만 심소를 각각 독립적인 것으로 보면, 마음의 일체성과 통일성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유부는 ‘심심소(心心所)의 구생(俱生)’ 을 설한다. 즉 심심소의 구생에 의해 심 작용의 통일적 활동을 설명하며 이러한 의미의 심심소의 협동을 ‘상응(相應)’이라고 한다

 팔리불교에서도 심심소의 상응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만 유부와 그 내용이 조금 다르다. 팔리불교에서는 22심소 중 1법도 빠지는 것이 없다. 1법이 부족하면 다른 21심소도 모두 부족한 것이 된다. 전부가 갖추어 지지 않으면 생길 수 없다. 1법은 나머지 21심소의 존재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심심소의 관계를 ‘상응인(相應因)’ 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사리불아비담론의 심소법은 33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팔리불교나 유부와는 다르다. 또한 성실론의 심소법은 39법 혹은 49법이 된다. 하지만 성실론의 심소법은 別體(별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량부와 대중부계는 심소의 독립을 부정하였다고 한다. 이들 부파에서는 마음을 하나의 전체로 보는 견해가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受(받을 수)가 있을 때는 마음 전체가 受로 되어 있는 것이며, 想이 있을 때는 마음 전체가 想으로 된다고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즉 갖가지 다른 심리현상을 마음이라는 하나의 것의 다양한 나타남(마음의 차별)으로 해석한 것이다.

 유부는 무아설을 기계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심소법을 각각 별체라고 했다. 그리고 유부는 심심소를 찰나멸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마음이 유기적으로 통일성을 갖추고 활동하는 이유를 밝히기 어렵다. 따라서 심심소의 상응이라는 것을 설하여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마음의 관찰, 심리분석에 있어서 다른 학파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정교하고 치밀한 학설을 전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팔리상좌부의 학설은 더욱 상세하다.

 

2.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는 힘-心不相應行(심불상응행)

 

 심불상응행은 단지 불상응행이라고도 말해진다. 즉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行 을 말한다. 심소법은 심왕과 상응하는 법이며, 그것은 심심소의 구생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존재자이다. 불상응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생멸의 4() 이다. 유부에 있어서 이것이 찰나멸을 성립시키는 힘을 가리킨다. 세간은 제행무상이지만, 거기에는 제행을 무상하게끔 하는 힘이 있다. 이 힘은 찰나멸의 제법을 1찰나에 生 하게끔 하는 것이 없으면 안된다고 보고, 그러한 실제적인 힘을 갖는 것으로서 4相 을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無常力 을 실체화 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非色非心 의 심불상응행법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사리불아비담론 제 3권과 성실론 7, 정량부, 화지부, 대중부등 많은 부파에서 심불상응행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팔리상좌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생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미묘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3. 제법의 삼세실유(三世實有)

 

 설일체유부는 일체의 법이 실재한다고 주장하였던 부파이다. 이들은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를 기본 명제로 삼고 있다. 불타는 무상을 설하였는데 어째서 삼세(과거,현재, 미래)가 진실로 존재하고 법체가 항상 있다는 것인가

 삼세실유란 미래현재과거라는 시간 자체가 실재한다는 말이 아니라 삼세에 걸친 유위제법의 실유를 의미하며, 그것은 결국 법체항유와 다른 말이 아니다. 즉 제법 자체는 삼세에 걸쳐 실재하지만 그것이 처한 상태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라는 시간적 변화의 차별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정통유부의 학설로 승인된 세우의 ‘위부동설(位不同設)’이다. 어떤 법이 아직 작용하지 않은 상태를 미래라 하고, 지금 작용하고 있는 상태를 현제라 하며, 이미 작용을 마친 상태를 과거라 하지만, 법 자체로써는 동일하다. 삼세라는 시간의 흐름은 제법의 변이에 의해서 가능하며, 따라서 지금 작용하고 있는 현제는 오로지 제법의 생성과 소멸의 순간일 따름이다. 이러한 제법분별에 의해서 초월적, 초경험적인 자아를 끌어오지 않아도 세계는 설명 가능하다.

 

 하지만 대승불교는 이러한 설일체유뷰의 설명을 ‘현상의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는 불교의 기본 명제와 모순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설일체유부의 ‘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에 반발하여 ‘무’와 ‘공’을 주장 한다. 즉 일체의 법은 공()이고, 그것은 무자성이다. 자아는 물론이거니와 법 또한 공한 것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혹 택멸의 열반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갖지 않는다.

 

  

 

 

 

 

 

 

 

 

참고 

1. 아비달마의 철학 :上山春平,櫻部建『아비달마의 哲學』하지메 사쿠라베 /호영/ 민족사

2. 인도불교의 역사 :印度佛敎의 歷史 히라가와 아끼라 / 이호근/민족사

3. 인도철학과 불교 권오민 지음/ 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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