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생명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강대웅

 

 

목차

 

1.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

  ‘호모사피엔스’와 ‘인격체’의 생명의 가치

    - ‘호모사피엔스’의 생명의 가치

    - ‘인격체’의 생명의 가치

 

2. 임신 중절을 통해서 본 인간 생명의 시작

    - 보수주의적 입장

      1) 출생

      2) 체외생존가능성

      3) 태동

      4) 의식

 

3. 태아의 생명의 가치

 

 

 

인간의 생명의 시작은 언제인가라는 물음은 결국, 인간이라는 단어의 의미 정립에 따라 그 시기가 달라진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출산 이후의 생명을 인간으로, 자의식을 가진 이후를 인간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가진 수정란을 인간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미에 대해서 우선 정리한 다음에, 하나의 생명이 언제부터 인간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지 알아보자.

 

1.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

우리는 ‘인간’이라는 말을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의 구성원’이라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인지 아닌지는 염색체를 검사 해보면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이라는 말을 이러한 뜻으로 사용하게 되면 인간의 정자와 난자에 의해 임신된 태아는 존재하게 된 첫 순간부터, 즉 수정란일 때부터 인간 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수정란이 나중에 자라서 유전적으로 인간이 아닌 염색체를 가진 것으로 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심하게 그리고 치유 불가능하게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뇌가 없는 무뇌증 아이도 이러한 구분에 따라서 인간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의 의미는 ‘인간의 지표’에 해당되는 것을 두루 갖춘 인간이다. 이러한 인가의 기준은 개신교 신학자인 플레처(Joseph Fletcher)가 제안한 것으로 자의식, 자기통제, 미래감, 과거감, 타인과 관계 맺는 능력, 타인에 대한 관심, 의사소통, 호기심 등이 그 기준에 속한다.

 

이 두 가지 인간에 대한 의미를 첫 번째 의미는 ‘호모사피엔스’, 두 번째 의미를 ‘인격체’라고 했을 때, 이 두 가지 의미는 겹치는 하지만 일치하지 않는다. 태아, 정신장애아, 갓 태어난 아기 등은 모두 호모사피엔스의 구성원 이지만, 이들은 인격체로서 자의식을 가지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염색체만 호모 사피엔스의 것을 가진 생명체는 인간인가 아닌가?

 

 ‘호모사피엔스’와 ‘인격체’의 생명의 가치

 

- ‘호모사피엔스’의 생명의 가치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명의 가치는 서양 기독교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생명은 하느님이 창조 하였기에 그분의 소유이고, 인간을 죽이거나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은 아닌 하느님의 권리를 침범한 것이라고 말한다. 동물과 식물의 목숨은 인간이 다스리고 사용하라는 권한을 받았기에 이용할 수 있으나 인간의 생명은 인간의 소유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교리가 현대에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 지지는 않지만, 이것이 발생시킨 윤리적 태도는, 우리 종족은 다른 동물 종 보다 특별하며 권리를 가진다는 신념과 어우러져 아직 남아있다

 

- ‘인격체’의 생명의 가치

자의식을 가진 존재는 마래와 과거를 가지는 개별적 존재로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묙망을 가진다. 따라서 자의식을 가진 것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그들의 미래에 대한 욕구를 좌절시키는 것이다.

선호 공리주의자들은 인격체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일반적으로 다른 존재의 생명을 빼앗는 것보다 더욱 나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인격체를 죽이는 것은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심적이고 중요한 선호의 광범위한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격체를 죽이게 될 경우 그 희생자가 미래에 계획했던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가지는 존재로 볼 수 없는 존재는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선호를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선호공리 이전에, 인간은 스스로 ‘생명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미국 철학자인 툴리(Michael Tooley)는 생명에의 권리를 갖는 유일한 존재는 자신이 일정한 시기에 걸쳐서 존재하는 개별적 존재, 즉 인격체라고 주장한다. , 생명의 권리가 개별적인 존재의 생존을 지속시킬 권리라면, 그때 생명에의 권리를 소유하는 데 상관되는 욕망은 개별존재로서의 생존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러나 자신을 일정한 시기에 걸쳐서 존재하는 개별적 존재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 즉 인격체만이 이러한 욕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인격체만이 생명에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2. 임신 중절을 통해서 본 인간 생명의 시작

‘호모사피엔스’와 ‘인격체’의 생명의 가치를 통해 인간의 의미와 인간 생명의 권리를 알아  보았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언제부터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자. 인간들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였을 경우 낙태, 즉 임신 중절이라는 의료 행위를 한다. 이러한 임신 중절 행위에 앞서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언제부터 인간이냐, 즉 인간으로서의 생명의 시작이 언제부터이냐 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생명의 시작은 수정 직후의 수정란을 인간으로 보는 입장과, 14일 이후, 10주 이후, 6개월 이후 등으로 나눠지며, 그렇게 나누는 기준에 따라서 낙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967년까지 스웨덴과 덴마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서구 민주국가에서 임신중절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1973년 미국 대법원은 임신 6개월 내에는 산모가 중절 할 헌법적 권리를 가진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서유럽의 국가들은 거의 모두 임신 중절을 자유화 하였다. 그렇다면 임신 중절의 보수적인 입장과 그 반대 입장을 통해, 인가의 생명의 시작이 언제인지 되물어 보자.

 

- 보수주의적 입장

첫 번째 전제 : 죄없는 인간을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두 번째 전제 : 인간의 태아는 죄없는 인간이다.

결론 : 그래서 인간의 태아를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낙태에 찬성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두 번째 전제를 부정한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수정란과 아이가 동일한 염색체로서 연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수정란부터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수정란이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도 부모의 요청에 의해 아이를 죽일 수 없듯이 낙태도 허용할 수 없다.

하지만 수정란과 인간 사이에 도덕적으로 의미있는 구분선이 없다는 것은 사실인가?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구분선으로는 출생, 체외생존 가능성, 태동, 그리고 의식의 시작등이 있다. 이들을 차례로 분석해 보자.

 

1) 출생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태아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궁 속에 있는 가 밖에 있는가라는 존재의 위치가 그 존재를 죽이는 것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조산아는 임신 말기에 있는 태아보다 덜 발달되었다. 하지만 조산아는 배 밖에 있음으로 죽여서는 안 되지만, 이보다 더 발달된 태아는 죽여도 된다는 주장은 기이하게 들릴 뿐이다.

태아와 아이는, 자궁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우리가 볼 수 있든 없든, 동일한 존재로서 동일한 인간적 특성을 지니며, 동일한 정도의 고통을 알고 느낀다.

 

2) 체외생존가능성

체외생존 가능성은 미국의 6개월 내에는 산모가 중절을 할 수 있다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미국 대 법원은 체외 생존이 가능 할 때에 국가가 아이의 생명을 보호할 법적인 강제가 생긴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6개월 이후의 체외 생존 가능한 태아는 산모의 자궁 밖에서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할 능력을 가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외 생존이 아직 불가능한 태아도 잠제적인 생명을 가진 인간이다. 그리고 체외 생존 가능성은 의료 기술에 따라 변한다. 30년 전에는 두 달 이상 먼저 태어난 아이는 생존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세달 먼저 태어난 아이, 6개월 된 아이도 체외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의료 기술이 발달하여 그보다 일직 5개월, 혹은 4개월 된 아이도 체외에서 생존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의 생명의 시작이 앞당겨 지는 것인가?

자유주의자들은 태아가 살아남기 위해서 전적으로 산모에게 의존 한다는 사실을 이유로 태아가 생명에의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체외에서 생존이 불가능한 태아가 그 생명을 산모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해서, 산모에게 그 아이를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노인, 중증 장애인 등의 목숨의 권한이 그들을 돌보는 사람에게 있지 않는 것과 같다.

 

3) 태동

태동이란 아이의 움직임을 산모가 처음으로 느끼는 때이다. 하지만 이것은 산모의 입장에서 움직임을 느낀 것일 뿐, 그 이전부터 태아는 이미 살아 있었다. 살아 있었으나 단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 생명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

 

4) 의식

태아는 수정 후 6주에 이미 태아는 운동이 발생하며, 7주에는 두뇌 활동이 감지된다. 이를 바탕으로 태아는 임신 초기단계에서도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본적인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능력과 의식은 실제적으로 도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와 같이 우리는 출생, 체외생존 가능성, 태동, 그리고 의식의 시작에서 신생아와 태아 사이의 도덕적으로 인간과 인간 이전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경정적인 구분선이 없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 태아는 인간인가? 인간의 생명의 시작은 수정란부터인가? 하지반 이 물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처음에 우리가 나누어본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 즉 ‘호모사피엔스’ 인가 ‘인격체’ 인가에 따라 태아의 위상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3. 태아의 생명의 가치

 

임신 중절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적 입장의 첫 번째 논변인 ‘죄없는 인간을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우리의 특별한 가치부여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인격체’로 보게 된다면 태아를 인간으로 보기 힘들다. 태아가 합리적이거나 자의식 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인간이 ‘호모사피엔스’만을 의미하게 된다면, 이때는 보수주의자들의 태아의 생명에 대한 옹호가 도덕성을 결여하게 되고, 따라서 ‘죄없는 인간을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라는 첫 전제가 힘을 잃는다. 종족의 구성원의 조건과 죄의 유무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태아는 인격체로서도, 호모사피엔스의 구성원으로서도 그 목숨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인가? 태아의 현재적 상태만 본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태아는 현제의 상태뿐만이 아니라 잠재적 생명, 잠재적 인간이라는 측면에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잠재적 생명으로서의 태아

첫 번째 전제 : 잠재적 인간을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두 번째 전제 : 인간의 태아는 잠재적 인간이다.

결론 : 그래서 인간의 태아를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태아가 인간인가에 대한 여부는 앞의 논의를 통해 확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태아가 잠재적 인간이라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를 ‘호모사피엔스’로 할 때와 ‘인격체’로 할 때에 모두 해당한다. 하지만 태아를 잠재적 인간으로 보면서 처음 주장에 비해서 두 번째 주장은 첫 번째 전제가 약화되었다. 싹이 나는 도토리를 베어 내는 것이 고색창연한 떡갈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아의 생명의 잠재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태아에게 생명에의 권리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태아를 죽이는 것이 세계로부터 미래의 합리적이고 자의식적인 존재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고 자의식 적인 존재가 본질적으로 가치롭다면, 인간의 태아를 죽이는 것은 세계로부터 본질적으로 가치로운 것을 빼앗는 것이며, 그래서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더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인간 생명의 시작을 논하는 그 논의 자체가 순수하지 못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생명의 시작이 착상 때부터이니, 뇌가 형성되는 시기부터이니 등의 주장들은 생명 공학의 발전과 함께 시작 되었으며, 이런 주장들은 자신들 연구에 대한 윤리적 비난을 피해가려는 시도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생명의 시작에 대한 수정설, 착상설(14일 전후), 뇌기능설(60), 체외생존능력설(28), 분만설 등의 견해는 연구의 성과를 통해 이익을 보기를 원하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을 뿐, 그 대상이 되는 인간(태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은 수정된 첫 세포부터 시작하고 수정란, 배아, 태아는 인간이 될 잠재적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 생명체로서 존중해야 한다.

 

참고 문헌 - 실천 윤리학. 피터 싱어 지음. 황경식, 김성동 옮김. 철학과 현실사. 1997

 


:

  

 아비달마 불교에서의 인간과 세계의 이해

 

  

     

 

 

목차

 

1장 우주

1. 누가 우주를 창조하였는가

2. 우주의 형성과 파괴

3. 우리가 사는 곳

 

2장 인간

1. 삼계(三界). 오취(五趣). 사생(四生)

2. ()의 이론

3. ()과 윤회(輪廻)

4. 번뇌(煩惱)의 세계(世界)

5. 12연기(緣起)

6. 무상과 무아

7. 열반

 

3장 아비달마의 법()의 세계

1. 마음의 작용-심소법(心所法)

2.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는 힘 - 心不相應行(심불상응행)

3. 제법의 삼세실유(三世實有)

 

 

 

 

1장 우주

 

 

1. 누가 우주를 창조하였는가

 

 구사론에 따르면, 세계는 '사트바 카르만(sattva-karman)'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사트바'란 보통 유정(有情), 중생(衆生)으로 번역되는 말로서, 이 세상에 생명을 지니고 존재하는 것, 모든 살아있는 것을 의미한다. '카르만'은 보통 '()'으로 번역되지만, 행위, 동작의 의미이다. 따라서 '사트바 카르만'은 생명있는 것의 행위, 생명체의 생활. 활동이라는 뜻이다.

 서양 기독교의 세계관은 자연이 만들어 지고 그 공간을 생물과 인간이 차례로 채우지만 불교에서는 반대로 생명을 가진 것의 행위, 동작에 의해 자연계가 생겨난다고 한다. 즉 자연계의 성립에 이전에 생명을 가진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살아 행위함, 이것이 전체로서 하나의 우주를 창출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생각했다. 우주를 생성하는 에너지와 하나의 개체, 한 인간이 살아 행위하고 동작하는 힘은 근원적으로 동일하다.

 

2. 우주의 형성과 파괴

 

 우주의 형성은 구사론의 기술에 따르면 우선 아무런 존재도 없는 광대하고 텅빈 공간에 사트바 카르만의 힘이 활동함으로써 '미풍(微風)'이 불면서 원반 모습의 견고한 '대기의 층'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대기층 위에 '물의 층'이 형성된다. 물의 층은 다시 사트바 카르만에 의해 부는 바람으로 말미암아 "끊인 우유의 표면에 막이 생기는 것 같이" 점차 응고되어, 상층의 7분의 2 '황금의 층'이 된다. 나머지 7분의 5는 물의 층으로 남아있다. 결국 무한하다고 하여도 상관이 없는 광대한 원반에 펼쳐져 있는 대기층의 중심부에, 이에 비해서는 훨씬 작으나 동일한 원반 모습의 물과 황금의 층이 중첩되어 놓여 있다. 이 황금의 층의 표면이 대지이다. 그리고 대지 위에는 다시 산. 강 등이 형성되며, 이리하여 여기에 자연계가 완성되는 것이다.

 자연계가 완성되면 여기에 생물 즉 유정(sattva)이 발생한다. 이 발생에도 정해진 순서가 있어, 우선 천상의 세계부터 시작된다. 즉 처음부터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하늘의 신들이다. 다음으로는 지표 세계에 인간. 동물 등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지하 세계 즉 지옥에도 지옥의 사트바가 태어남으로써 세계 형성의 과정은 완료된다.

 세계 형성의 과정에 계속하여 다음의 20안타라칼파 동안에는 형성된 세계가 지속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끝나면 세계 파멸의 과정이 따른다. 이것도 20안타라칼파 동안 계속되며, 세계 형성의 과정과 전혀 역의 순으로 이루어지며, 그런 다음에는 단지 광대하고 텅 빈 공간만이 남는다. 이로부터 20안타라칼파 동안은 텅빈 공간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무의 기간이다. 이 기간이 지나가면 다시 사트바 카르만이 미풍을 일으켜, 다음의 세계 생성의 기간이 시작된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세계의 형성. 지속. 파멸. 공무의 네 과정이 계속 순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대자연의 생멸의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하여 무한의 과거로부터 무한의 미래에까지 영원히 계속된다.

 

 

3. 우리가 사는 곳

 지상의 세계에서 우리가 사는 곳은 수메루산의 남쪽, 일곱 외륜산 바깥의 큰 바다 가운데에 삼각형으로 돌출되어 있는 잠부주이다. 잠부주 북부에는 아홉의 검은 산이 가로놓여 있다. 이를 지나 더욱 북쪽으로 나아가면 '눈의 산(히말라야)'이 있으며, 눈의 산 저쪽에는 '향기로 가득찬 산'이 있다. 눈의 산과 향기로 가득찬 산 사이에는 '염열(炎熱)의 괴로움이 없는 연못'이 있고, 여기에는 강가(갠지스강), 신두(인더스강), 쉬타, 바크슈의 4대하가 흘러 잠부대륙을 윤택하게 하고 있다. 뭇 사람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이 연못에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한다. 위에 기술한 잠부주는 결국 고대 인도인의 눈에 비친 인도의 국토이다.

 이와 같이 대기. . 황금의 세 층의 기반 위에 서있는 수메루산을 중심으로 하여, 이를 둘러싼 네 개의 대륙, 해와 달, 천계. 지옥 등 모든 것이 포함된 자연계의 한 단위가 성립된다.

 

 

 

2장 인간

 

1. 삼계(三界). 오취(五趣). 사생(四生)

 

 불교는 이 공간 안에서 태어나고 죽어가는 생명체, 즉 인간의 삶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아비달마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유정)의 외면적 존재방식은 '삼계(三界)', '오취(五趣)', '사생(四生)'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삼계(三界)'라는 말은 옛 부터 일상적인 말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셋을 말한다. 욕계는 본능적 욕망이 성하고 강하게 작용하는 세계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색계(色界)란 물질, 육체의 세계 즉 육체를 갖고 생존하는 세계의 의미가 되며, 무색계는 육체가 없는, 순수한 정신적 생존의 세계가 될 것이다. 지하의 세계. 지표의 세계. 공중의 세계(천계) 중의 하층은 욕계에, 천계에 상층은 색계에 속하며, 무색계는 그 위 천계의 최상층에 있다고 한다. 1) '지옥(地獄)' 2) '아귀(餓鬼)', 3)'축생(畜生)', 4)'인간(人間)'. 천계에는 5)'()'(천인, 천녀. 즉 하늘의 신들)의 생활이 있다. 이를 '오취(五趣)'라고 한다. 이 다섯에 '아수라(阿修羅)'를 더하여 육취(六趣) 라 한다. 온갖 고통을 겪는 지옥은 물론이고, 기갈의 고통을 받는 아귀이건, 약육강식의 축생(동물계)이건, 모두 인간의 생활에 비해 열등하며 고뇌가 많으며 바람직스럽지 못한 경우이다.(지옥. 아귀. 축생을 三惡趣, 三惡道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천계는 인간세계보다 훨씬 훌륭하고 행복하며 바람직스러운 경지이다.

 그러나 천계는 서양 기독교의 천국이나 이상화 된 파라다이스와 같은 영원한 행복의 세계는 아니다. 다른 사취에 비하면 그 격이 높기는 하지만, 轉變과 쇠망을 피할 수 없는 세계이다. 따라서 이 천계의 생존도 인간 및 지옥에서의 생존과 마찬가지로 윤회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유정은 오취의 어느 하나에 속하여 살아가며 죽으면 또한 오취의 어느 하나로 태어난다. 예를 들어 인간의 한 생애를 마치고 하늘의 신으로 태어나는 유정도 있을 것이며,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도 있을 것이다. 이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지옥에서 고통을 겪는 자도 천계의 신도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2. ()의 이론

 

 이러한 윤회는 그 유정의 행위 업 (Karman,)에 따른 것이다. 과거의 선한 행위의 결과는 현재 즐겁고 바람직스러운 생애를 초래하고, 과거의 악한 행위의 결과는 현재 괴롭고 바람직스럽지 못한 생애를 초래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이다.

 업의 이론에 의하면 과거의 행위가 현재의 자기의 존재방식을 결정한다고 하지만, 이는 자기의 존재방식이 이미 과거에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주어져 있어 현재로서는 이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이유는 과거의 업이 현재의 상황을 결정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업은 미래의 상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지금의 삶이 전생의 업으로 비루할지라도 이번 생을 열심히 잘 살면 다음 생은 달라질 수 있다.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탄식하는 사람에게 업론은 운명론이 되지만, 현재에 서서 미래를 바라보는 자에게 그것은 반대로 자신을 고무하여 밝은 미래를 개척하게끔 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업이 유정의 존재방식 모두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인과관계가 무수히 작용하여 순간순간의 인간의 생존을 구성하며, 업과 그 결과라는 관계는 무수하고 다양한 인과관계 중에서 다만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3. ()과 윤회(輪廻)

 

 불교는 무아(無我)를 설한다. '()'라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악한 행위를 하여 그 결과 지옥. 아귀. 축생과 같은 좋지 못한 경계에 태어나는 것도, 선한 행위를 하여 그 결과 보다 좋은 경계에 태어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다. 불교가 본래 지향하는 바는 윤회를 초월한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윤회는 도덕적 선악의 세계이다. 평상의 인간(범부)은 선악의 세계에 산다. 이러한 인간의 선악적 존재를 지탱하는 지주는 아비달마논사에 의하면 업의 인과의 원칙이다. 아비달마에서는 누구도 다른 사람에 대해 그 선악을 판단할 수 없고, 전자의 신과 같은 자가 어디엔가 있어 사람의 선악을 심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생애에 과보가 나타나지 않고, 다음 생애(來世) 또는 그 다음 생애에서야 나타난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행위는 필연적으로 과보를 받는다. 이것은 절대의 원칙이다.

 업의 결과의 필연성과 자업자득, 이 두 원칙이 있음으로써 선악의 기본이 성립된다. 업의 이론은 평상적 인간의 삶의 세계의 도덕적 질서 수립을 말하는 것이다. 아비달마의 입장은 업과 윤회의 세계를 궁극적으로 그러해야 할 모습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며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평상적 인간의 삶의 현실과 선악의 원리가 그 삶을 관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도덕적 요구를 승인한다.

 불교에 의하는 한 우리의 세계는 업에 의해 유전 상속한다.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탄생으로 이어진다. 업을 이야기 하는 한 윤회는 필연적인 것이다.

 

4. 번뇌(煩惱)의 세계(世界)

 

 업이 윤회의 삶을 결과할 때에는 필히 번뇌를 수반한다고 한다. . 윤회의 세계는 또한 번뇌의 세계이며 이 세계의 일체는 유루라고 한다.

 '유루(有漏)'는 원어인 산스크리트어로는 사스라바(s srava)이다. '아스라바( srava)를 지닌 것'이란 뜻이다. 아스라바가 번뇌의 의미라면, 사르라바 즉 유루는 '번뇌를 지닌 자'라는 의미가 된다. 번뇌를 지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설일체유부적으로 이를 표현하면, 범부의 세계에 있어 모든 존재는 "번뇌의 대상이거나, 번뇌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영역에 속한다. 깨달음이 영역에 속하는 것은 모두 '무루(無漏)'이다.

 모든 존재는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두 이러한 의미에서 유루이다. 즉 번뇌를 지닌 것이다. 업은 윤회함으로 번뇌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이러한 평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벗어나, 즉 업과 번뇌에 지배되는 미혹의 세계에서 초월하여 궁극적 진실인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은 지혜로써 마음을 번뇌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무루의 길이다. 이 실천도를 나아가는 자는 '성자'로 불린다. 불교에서 말하는 성자는 번뇌를 끊은 자인 것이다. 이렇듯 모든 번뇌를 끊고 일체의 진리와 만난 자를 ‘아라한’이라고 한다.

 

 

5. 12연기(緣起)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이고, 법을 보는 자 연기를 보는 자이다”

 불타는 괴로움을 일으키는 갖가지 조간들을 12 갈래로 이루어진 인과의 연쇄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를 12연기(緣起) 라고 한다. ‘연기란 ~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 난다’ 는 뜻으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 난다는 말로 정형화 될 수 있다. 즉 지금 현제는 내가 과거에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따라 형성된 것이며,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따라 지금 이후의 미래가 달라진 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속적이고도 단일한 자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번뇌와 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연기에 대한 여러 설중에서 과거 현제 미래의 생에 걸쳐 5온이 상속하는 것이라는 분위(分位) 연기설이 전통적 정설로 인정되어 지는데, 이는 부파불교의 가장 유력하였던 부파인 설일체유부의 학설로서 이에 따라 12연기를 삼세(三世) 양중(兩重)의 인과설로 해석하게 되었다. ‘무명’과 ‘행’은 과거 생에서 지은 현제 생의 원인이고, ‘식’에서 ‘수’에 이르는 5지는 그 결과이며 (이상 과거현제의 인과), ‘애’와 ‘취’와 ‘유’는 현제 생에서 짓는 미래생의 원인이고, ‘생’과 ‘노사’는 그 결과이다(이상 현제미래의 인과).   

 

6. 무상과 무아(無我)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변화의 영역이다. 영원한 것은 다만 사유와 언어의 세계일 뿐 현실이 아니다. 불교에서의 언어는 마치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는 수단이듯이 다만 사물을 지시하는 도구일 뿐이지만, 현실의 세계는 언제나 추상의 언어에 은폐되어 나타난다.

 자아란 경험의 조건인 5온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5온의 상속을 일시 가설한 것일 뿐이다.

 

첫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행위하는 것인가?

2 5천 가지 부품의 결합체를 일시 차() 라고 이름할 뿐 그것과는 별도의 차가 존재하지 않듯이, 5온의 총아를 일시 자아라고 이름할 뿐 그것의 토대가 되는 별도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영속적이고도 단일 보편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경험(혹은 세계)은 어떻게 지속 가능한 것인가?

고정불변의 자아가 존재하여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번뇌와 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셋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데 도덕적인 책임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그에 집착함으로써 온갖 번뇌와 업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끊임없이 유전하게 된다. 초기불교의 윤리는 무아에 기초한 ‘버림’의 윤리이다. 세계의 모든 악은 탐욕과 증오로부터 비롯되며, 그것은 바로 자아에 대한 그릇된 믿음인 무지로부터 야기된다. 자아를 버리지 않는 한 괴로움의 속박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7. 열반

 

열반이란 경험세계 자체(5)의 소멸이 아니라 그것을 괴로움의 세계로 드러나게 하는 조건들, 이를테면 무지와 그에 따른 아집과 집착, 그리고 탐욕과 증오 등의 소멸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것은 5온 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끔 하는 조건이 된다. 그럴 때 열반은 사후가 아닌 살아있는 동안 ‘지금 여기서’ 획득하는 것이며, 현실의 삶을 자유롭고 풍요로운 충만함으로 이끄는 힘이 된다.

 그렇다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8정도를 통해 중도를 실현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이야기한다. 중도란 극단적인 고행이나 지나친 쾌락을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존재 본성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이것이 정견(正見)이다. 정견은 바로 무상과 무아에 대한 통찰이다. 경전에서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 의 4성제를 바로 관찰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으며 이 중에서도 괴로움의 진리에 대한 통찰이 강조된다. 괴로움을 알지 못하면 그것의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방식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계戒 정定 혜慧 를 3학學 이라고 하여, 해탈의 세 축으로 삼고 있다. 8정도 중에서 정견과 정 사유는 혜학에 포함되고, 정어정업정명은 계학에, 정념과 정정은 정학에, 그리고 정정진은 3학 모두에 포함된다. 3학은 모든 괴로움과 속박에서 벗어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불타는 이것이야 말로 바로 인류의 무거운 짐을 벗어 놓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3장 아비달마의 법()의 세계

 

1. 마음의 작용-심소법(心所法)

 

 아비다르마라는 말은 “법에 대하여”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설일체유부(일체의 법이 실재한다고 주장)에서는 “법에 대한 연구”라는 의미로 해석하며, 팔리상좌부에서는 “훌륭한 법”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불타가 설한 “법”에 대한 연구이다. 다르마란 불타가 설한 교법을 말한다. 불타의 교법은 현실의 인간 존재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인간 존재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현상’으로 존재하고 있고, 동시에 ‘요소적 실재’이기도 하다. 현상으로서의 현실은 육체와 정신, 외계 등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또 다시 세세한 요소로 분석된다.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무상하다. 따라서 법은 실재이긴 하지만 ‘영원한 실재’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에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적인 법을, 상주하는 법 (무위법-조작됨이 없는 법, 더 이상 소멸하지 않는 존재) 과 무상한 법 (유위법-다양한 인과적 관계로써 조작되어 생성 소멸하는 경험세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이 부파불교 시대이다. 무위법은 열반으로 대표된다. 열반은 시간을 초월한 실재이며, 불타는 깨달음을 통해 이 열반과 합일하였다. 유부에서는 열반을 깨달음의 지혜의 힘에 의해 번뇌가 끊어지고 번뇌가 영구히 불생하게 된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유위법은 무상하다. 이 무상함에 대해 상좌부나 유부는 유위법은 자상을 갖지만 1찰나만 현세에 존재한다고 해석하였다. 유위법은 실재이지만, 찰나 멸한다는 점에서 법은 파악될 수 없다.

 

 유루법은 번뇌에 더럽혀진 법을 말한다. 무루법은 번뇌에 더럽혀져 있지 않은 법이다. 불타나 아라한의 깨달음의 지혜는 번뇌를 모두 끊고 있기에 무루이다. 아함경에는 많은 종류의 번뇌가 밝혀져 있다. 이것은 번뇌를 끊는 것이 불교의 주목적이기 때문이다. 아비다르마 시대에는 이 아함경의 심소법(心所法-마음에 소유된 법) 을 이어 받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발전시킨다. 번뇌를 끊기 위해 번뇌와 다른 심리 작용이 어떻게 협동하는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부는 심소법을 독립의 실체로 보았다. 탐욕과 분노는 작용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양자가 다른 기능을 갖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유부가 46종의 심소를 독립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마음은 갖가지 심리작용을 그 속에 포함하는 하나의 종합된 통일체로 보았다. 하지만 심소를 각각 독립적인 것으로 보면, 마음의 일체성과 통일성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유부는 ‘심심소(心心所)의 구생(俱生)’ 을 설한다. 즉 심심소의 구생에 의해 심 작용의 통일적 활동을 설명하며 이러한 의미의 심심소의 협동을 ‘상응(相應)’이라고 한다

 팔리불교에서도 심심소의 상응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만 유부와 그 내용이 조금 다르다. 팔리불교에서는 22심소 중 1법도 빠지는 것이 없다. 1법이 부족하면 다른 21심소도 모두 부족한 것이 된다. 전부가 갖추어 지지 않으면 생길 수 없다. 1법은 나머지 21심소의 존재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심심소의 관계를 ‘상응인(相應因)’ 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사리불아비담론의 심소법은 33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팔리불교나 유부와는 다르다. 또한 성실론의 심소법은 39법 혹은 49법이 된다. 하지만 성실론의 심소법은 別體(별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량부와 대중부계는 심소의 독립을 부정하였다고 한다. 이들 부파에서는 마음을 하나의 전체로 보는 견해가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受(받을 수)가 있을 때는 마음 전체가 受로 되어 있는 것이며, 想이 있을 때는 마음 전체가 想으로 된다고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즉 갖가지 다른 심리현상을 마음이라는 하나의 것의 다양한 나타남(마음의 차별)으로 해석한 것이다.

 유부는 무아설을 기계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심소법을 각각 별체라고 했다. 그리고 유부는 심심소를 찰나멸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마음이 유기적으로 통일성을 갖추고 활동하는 이유를 밝히기 어렵다. 따라서 심심소의 상응이라는 것을 설하여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마음의 관찰, 심리분석에 있어서 다른 학파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정교하고 치밀한 학설을 전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팔리상좌부의 학설은 더욱 상세하다.

 

2.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는 힘-心不相應行(심불상응행)

 

 심불상응행은 단지 불상응행이라고도 말해진다. 즉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行 을 말한다. 심소법은 심왕과 상응하는 법이며, 그것은 심심소의 구생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존재자이다. 불상응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생멸의 4() 이다. 유부에 있어서 이것이 찰나멸을 성립시키는 힘을 가리킨다. 세간은 제행무상이지만, 거기에는 제행을 무상하게끔 하는 힘이 있다. 이 힘은 찰나멸의 제법을 1찰나에 生 하게끔 하는 것이 없으면 안된다고 보고, 그러한 실제적인 힘을 갖는 것으로서 4相 을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無常力 을 실체화 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非色非心 의 심불상응행법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사리불아비담론 제 3권과 성실론 7, 정량부, 화지부, 대중부등 많은 부파에서 심불상응행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팔리상좌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생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미묘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3. 제법의 삼세실유(三世實有)

 

 설일체유부는 일체의 법이 실재한다고 주장하였던 부파이다. 이들은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를 기본 명제로 삼고 있다. 불타는 무상을 설하였는데 어째서 삼세(과거,현재, 미래)가 진실로 존재하고 법체가 항상 있다는 것인가

 삼세실유란 미래현재과거라는 시간 자체가 실재한다는 말이 아니라 삼세에 걸친 유위제법의 실유를 의미하며, 그것은 결국 법체항유와 다른 말이 아니다. 즉 제법 자체는 삼세에 걸쳐 실재하지만 그것이 처한 상태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삼세라는 시간적 변화의 차별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정통유부의 학설로 승인된 세우의 ‘위부동설(位不同設)’이다. 어떤 법이 아직 작용하지 않은 상태를 미래라 하고, 지금 작용하고 있는 상태를 현제라 하며, 이미 작용을 마친 상태를 과거라 하지만, 법 자체로써는 동일하다. 삼세라는 시간의 흐름은 제법의 변이에 의해서 가능하며, 따라서 지금 작용하고 있는 현제는 오로지 제법의 생성과 소멸의 순간일 따름이다. 이러한 제법분별에 의해서 초월적, 초경험적인 자아를 끌어오지 않아도 세계는 설명 가능하다.

 

 하지만 대승불교는 이러한 설일체유뷰의 설명을 ‘현상의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는 불교의 기본 명제와 모순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설일체유부의 ‘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에 반발하여 ‘무’와 ‘공’을 주장 한다. 즉 일체의 법은 공()이고, 그것은 무자성이다. 자아는 물론이거니와 법 또한 공한 것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혹 택멸의 열반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갖지 않는다.

 

  

 

 

 

 

 

 

 

 

참고 

1. 아비달마의 철학 :上山春平,櫻部建『아비달마의 哲學』하지메 사쿠라베 /호영/ 민족사

2. 인도불교의 역사 :印度佛敎의 歷史 히라가와 아끼라 / 이호근/민족사

3. 인도철학과 불교 권오민 지음/ 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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