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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2 싯다르타를 읽고 - 인도철학특강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강 대 웅

 

 

 

      

싯다르타는 부모님 슬하에 있었던 어린 시절부터 끊임 없이 깨달음을 얻기를 바래왔다. 그리고 결국은 강가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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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그는 오로지 고행하고 사색하고, 침잠하는 것에 관심을 쏟았고, 우주의 최고 원리인 범()을 추구하였으며 아트만 속에 있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자아 속에 있는 근원적인 샘물을 찾아내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 삶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집과 부모를 떠나 사문들과 함께하게 된 이유이다.

이렇게 사문들과 함게 생활하면서 싯다르타는 인생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극심한 고통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아를 버리는 훈련을 한다. 하지만 자아를 버리는 것은 인생의 고통과 무의미함을 잠시 동안 마비시킬 수는 있지만,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질문을 안고 다시 길을 떠나 만난 거룩한 세존인 부처에 의해서 번뇌와 번뇌의 유래, 그리고 그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에 대한 설법을 듣는다. 즉 인생은 번뇌이지만 부처의 길을 가는 자는 해탈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처의 깨달음이지 자기 자신의 깨달음, 자기 자신의 자아 속에 있는 근원적인 샘물이 될수는 없었다.

모든 가르침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난 싯다르타는 지금까지 자신의 수행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였는데, 정작 그 깨달음의 주인인 자기 자신을 버려 왔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이다.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면 스스로가 스스로의 스승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진리를 찾는 것은 나를 버리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이렇게 생각이 바뀌지 지금까지 무의미 해 보였던 이 세상이 다시금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싯다르타는 이제 다양성을 무시하고 통일을 추구하며 깊이 사색하는 것이 아닌, 다양성 자체에 진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따라서 더 이상 통일성과 단일성을 추구하려 숲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음으로 싯다르타는 마을로 향한다.  

2

 

이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진 그의 눈은 본질적인 것을 찾아 가시적 세계를 넘어선 피안의 세계를 목표로 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이 세상 안에서 고향을 찾고 단순 소박하게, 천진난만하게 세상을 바라보니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처럼 마음 먹기에 따라서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나 또한 이전의 나와 다른 나가 되는 것이다.

그는 마을에서 사랑도 배우고 돈도 벌게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목숨이 걸린것 만큼이나 중요한 일인 돈과 사랑이 그에게는 어린 아이들의 장난같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사색할줄 알고, 기다릴줄 알고, 단식할 줄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으며, 그저 그 모든 것으로부터 배움을 얻기를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생활 속의 욕망과 쾌락과, 그것들이 주는 안락함과 지루함에 익숙해진 그는, 자신이 끊임없는 유희에 빠져 있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강가에 이르러서 죽음을 생각하던 싯다르타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인생행로를 뒤돌아보며 이를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즉 자신이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졌던 것은 결국, 자비를 체험하기 위해서였으며, 그가 행한 수많은 오류와 돌아 돌아온 굴곡진 길은 결국 자기 자신의 아트만을 발견하기 위한 제대로 난 바른 길이었던 것이다.

그는 뱃사공인 바주데바 곁에 머물면서 강으로부터 경청하는 법, 고요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영혼으로, 활짝 열린 영혼으로, 격정도 소원도 판단도 없이 귀기울여 듣는 것을 배운다. 그것은 이전에 자신이 행했던 수련, 즉 자신을 버리것도 아니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도 아닌, 모든 것에서 동시성을 느끼고 모든 것의 현존을 느끼는 보다 넓은 깨달음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경험을 하게되된다. 또 그 사랑을 떠나보내면서 그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이런 사람들의 충동들, 어린애 같은 유치한 짓들, 단순하고 어리석 욕망들이 억센 생명력을 가지며, 이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의 모든 욕정과 행위들 하나하나에서 생명, 그 생동하는 것, 그 불멸의 것, ()을 보게된 것이다. 지식인이자 사색가인 자기가 그들보다 앞선 것은, 모든 생명의 단일성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서 조화, 세계의 영원한 완전성에 대한 깨달음, 미소, 단일성이 그의 내면에서 서서히 꽃피워 났다.

그는 강의 서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모든 소리를 듣고, 전체, 단일성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개의 말로 이루어 졌으며, 그것은 완성이라는 의미의 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순간 싯다르타는 운명과 싸우는 일을 그만두었으며, 고민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그 단일성의 일부를 이루면서 그 생명의 흐름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제 어린시절 함께 깨달음을 얻으려고 마을을 함께 떠났던 고빈다를 앞에 두고, 싯다르타는 자기가 찾으려고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서 결국 자기의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 들일수가 없으며, 따라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것은 열려있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아무 목표도 가지지 않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진리는 완전성과 단일성을 가지기에 말로 표현되어지는 일면적인 것으로는 그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중요한 것은 말이나 사상이 아니라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싯다르타의 깨달음

 

싯다르타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고, 싯다르타의 친구 고빈다도 평생을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 하였다. 하지만 이렇듯 둘다 평생을 바쳐서 깨달음을 위해 정진 하지만 싯다르타는 스스로의 깨달음을 얻고, 고빈다는 말씀 그 이면의 깨달음에 스스로 닿지 못했다. 이 둘의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발생한 것인가?

그는 깨달음, 영원이 마르지 않는 자신만의 샘물을 가지기 위해서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에 따라서 움직이며, 그러한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또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자신을 힘들게 했던 구부러진 길도, 마음을 바꾸어 먹는 그 순간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곧은 길로 다르게 인식한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바로 열려 있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깨달았으며,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고 있는가?

지금 나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나는 대학교를 두 번 다녔습니다. 예술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였고, 그런 후 직장을 다니다 다시 학교에 들어와 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제가 2002년 사진과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사진을 찍는 직업은 기술직 이었습니다. 아직 디지털 사진이 널리 이용되기 전인지라, 사진은 카메라와 각종조명장비, 그리고 현상과 인화에 대한 전문 기술이 필요 하였으며, 그 장비들의 가격도 고가여서 전문 사진가의 영역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사진에 대한 기술과 지식은 그것을 가진 사람이 전문 기술자로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하지만 프리첼과 싸이월드를 필두로 한 인터넷 블로그의 창궐로 전 세계에서 유래 없는 디지털 사진 붐이 일어났고, 결국 거의 전 가구가 디카를 활용하는 시대가 도래 하였습니다.

사진은 많이 찍으면 많이 찍을수록 그만큼 실력이 느는 정직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카메라 덕분에 사진에 접근이 용이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진을 찍다보니 좋은 사진, 잘 찍은 사진이 늘어남은 물론이요, 사진을 잘 찍는 사람도 늘어만 갔습니다. 결국, 내가 사진과를 졸업할 즈음에는 사진은 더 이상 기술직이기 힘들어 졌으며,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학문으로서의 사진은 그 가치가 없어진 듯이 보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급변기 속에서 사진을 학문과 기술로서 배우기는 했지만,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뛰어난 감각과 재능이 부족했던 나는 나만의 색깔이 담긴 사진을 찍을 방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인문학적인 사진이었습니다. 결국 사진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혹은 사람과 그 무엇이 만나서 서로 반응하고 인사하고 이야기 나누는 한 과정에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많이 만나고 책을 많이 읽어서 내공을 쌓으면, 감각적으로 뛰어나고 아름다운 사진은 아닐지라도 깊이가 있는 사진, 철학이 담긴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디지털 사진의 가벼움은 발랄하고 화사하지만, 디지털이라는 매체의 속성처럼 쉽게 소비되고 쉽게 사라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문학적인 사진, 철학적인 사진을 추구하여 한 장의 사진에 그 사람의 깊이와 시간을 담을 수 있다면, 그러한 사진은 디지털 사진들 속에서 빛나진 않겠지만 더 오래가는 나름의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철학과에 다니는 시간동안 스스로에게 가장 큰 화두가 되었던 것은 철학이 과연 어떻게 하면 나의 사진과 접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철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수많은 과목들을 수강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익히고 생각 하였지만, 이러한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실존하는 사진과의 결합을 통한 철학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친구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사진가가 되고 싶은 거냐, 아니면 철학자가 되고 싶은 거냐고. 나는 그게 구분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답 했습니다. 이렇듯 사진+철학이 아닌, 사진=철학을 추구해야 한다는 작은 결론을 얻기는 하였지만, 아직 어떻게 그런 사진을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지금에 와서 누군가가 너는 철학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러 이러한 것을 배웠고 이러 이러한 것을 깨달았노라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철학을 하면서 생긴 얼마간의 지식과 조금 더 밝아졌을지도 모르는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그것을 사진으로 기록할 다름입니다.

나는 이러한 나의 사진, 사진을 하는 행위 자체가 깨달음을 구하는 구도의 길라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길 위레서 결국 나도 열린 눈과 마음을 가지고 바주데바와 싯다르타 처럼 누군가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과, 사람들과 나의 만남을, 그 모든 이야기들를 사진으로 담았을 때, 그 사진은 사진 자체로서가 아니라 사람이 드러나는 사진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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