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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2 중관(中觀) / 천태(天台) - 불교철학

  

중관(中觀) / 천태(天台)

 

 

 

   강 대 웅

 

 

중관 中觀 명사

[명사]<불교> 1 삼관하나. 중제(中諦)이치직관(直觀)하여 중도진리구명하는 이른다. 2 =중관론.

 

중관학파 中觀學派 명사

[명사]<불교> 인도 대승 불교 2학파하나. 파조(派祖)용수(龍樹)중관론근본으로 하여 () 교의(敎義)의 중심으로 한다. 중국 등지전하여져 삼론종바탕되었다. 중관파.

 

 

  용수는 제 2의 부처로 일컬어 지는 대승불교의 가장 위대한 논사로써, 대승사상은 모두 그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용수의 대표적인 저술인 <중론(中論)>을 중심으로 한 사상을 일반적으로 중관사상(中觀思想)이라 말한다. 용수는 <중론>을 저술하여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용수 이후 많은 이들에 의해 중론이 해석되었고 이 흐름을 따르는 이들을 중관파라 한다. 중론을 해설한 청목은 중론의 의의를 “불타의 진정한 의도를 알지 못한 채 불타가 설한 온갖 존재, 이를테면 12연기나 5, 12, 18계 등의 법을 진리로 여겨 문자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은 이들에게 공성(公性)을 이해시키기 위해 용수보살께서 <중론>을 저술하게 되었다” 라고 밝히고 있다.

  중론의 목표는 궁극적으로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분별인식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의 허구성을 폭로함으로써 일체의 집착과 망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존재 본성에 대한 통찰의 예지인 반야바라밀다였다.

  용수는 일체가 공 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공은 비존재인 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용수는 공의 이론적 근거를 연기, 즉 상호관계성에서 찾고 있다.

 

-무릇 존재하는 모든 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을 상이 아니라고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언어로서 분별하는 일체의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자성(無自性)이고 공()이다. 모든 존재는 신의 피조물도, 우연의 소산도 아닌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 즉 연기(緣起) 한 것이다(제법종연기-諸法從緣起). 이는 부자든 아름다움이든 밝음이든 일체의 모든 언어는 그에 상응하는 고정된 대상을 갖지 않으며,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나무로 된 탁자가 있다고 할 때 여기에 책을 올리고 공부를 하면 책상이지만 거기서 밥을 먹으면 식탁이고, 추운 겨울날 아궁이 앞에 있으면 그것은 땔감이다. 이것은 오직 어떤 상황과 관계하여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책상으로 불리기도 하고, 식탁이나 땔감으로 불리기도 한다. 곧 책상으로 일컬어지는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결여하고 있는데, 이를 무자성(無自性), 혹은  ()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밝음과 어둠을 각기 서로 대립하는 독립된 세계로 생각하며, 세상의 거의 모든 철학과 종교가 이 같은 이원의 구도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용수는 이러한 우리의 실체화된 언어적 고정관념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언어는 세계를 실체로서 고정시킨다. 하지만 언어란 드러나야 할 대상에 대해 그것과는 별도의 판단을 낳게 하는 화자의 관념체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며, 상황과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일시적인 것이며, 한정적인 것이다.

  이렇듯 세계는 언어에 은폐되어 있다. 하지만 용수는 세계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관한 이론, 즉 언어를 부정하였다. 언어가 바로 공이며, 따라서 언어의 배일만 벗기면 세계는 그대로가 진실(열반)이다. 하지만 언어가 허구임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공’에 관한 이론 역시 언어적 가설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언어를 넘어서는 진리는 과연 무엇인가?

승의제란 최상의 진리, 즉 궁극의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개념적 언설을 넘어선 이른바 무차별의 진리, 곧 공성(公性)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곧 용수는 불타의 교법을 모두 이 같은 승의제에 으르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였다. 말씀 자체가 진리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구분 짓는 일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그 자체로서 관조하는 것(순수직관) 이며, 그것은 다름아닌 공성(公性)이다.

 

  이러한 존재의 실상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생사 윤회하는 세간과 열반 사이에는 어떠한 구분도 없다. 세간과 열반은 다만 말이 다르고, 그에 대한 관념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공성으로서 동일하다. 그러나 우리 범부들은 바로 언어적 관념에 의해 그 같은 언어적 관념을 벗어난 무자성의 여래를 그 자신만의 고유한 본성을 지닌 유자성적인 존재로 규정지음으로써 여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세간과 열반, 현상과 본체는 서로 대립하는 두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언어적 관념의 차이일 뿐이므로 그 같은 분별만 제거되면 세계는 그대로 진실이다. 공은 바야흐로 불이(不二)의 중도이다.

  일체의 대립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공()으로, 불이의 중()으로 관()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이다.

 

  

천태종 天台宗 명사 [명사]<불교> 중국 수나라 , 저장 성(浙江省) 톈타이 산(天台山)에서 지의(?)세운 대승 불교한 파. 법화경과 용수보살의 중론(中論)근본 교의(敎義)로 하선정(禪定)지혜조화종지(宗旨)로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숙종 2(1097) 대각 대사국청사에서 처음으로 천태교를 개강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지관종(止觀宗)천태(天台).

 

  천태종의 개조인 지의가 이해한 불교의 진리는 공().().() 3제설로 설명되어 진다.원리는 하나이지만 설명하는 방식은 세 가지 라는 것이다.

  지의가 보기에 소승성문들은 세속의 현실을 버리고 열반만을 추구하였으며, 대승의 보살은 세속의 현실에 머물기는 하지만 성문과 정면으로 차별 대립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진정한 보살은 양자를 지양하면서 중()에 머문다. 이를 원융삼제라고 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일승을 설하는 <법화경>의 궁극적 취지라고 지의는 생각하였다.

  법화경은 불타의 영원성에 대해 묘사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입멸한 우리가 익히 아는 불타가 아닌, 그것은 모두 방편으로 일시 그렇게 행한 것일 뿐 실상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이미 깨달음의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른바 구원실성(久遠實成)이 불타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법화경은 소승과 대승, 성문승 독각승 보살승을 모두 포괄하여 일불승의 통일성을 주장한다.

“여래는 다만 중생을 위해 일불승을 설하는 것이니, 그 밖에 달리 이승이나 삼승은 없다” 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는 한 보살뿐만 아니라 성문 독각 등 모든 중생은 부처의 아들이며, 모두가 성불이 예정되어 있다. 이를 수기(授記)라고 한다.

  그렇다면 법화경의 위상은 무엇인가? 지의의 독창적 교판은 화법 4교라 할 수 있다.

첫째, 장교란 삼장교의 줄임말로서, 여기서는 대승불교 이전의 <아함>과 아비달마를 말한다.

둘째, 통교란 앞의 장교와, 대승과 모두 통하는 교법이란 뜻으로, 대승의 일반적인 가르침인 공사상을 말한다. 따라서 앞의 장교에서 다만 자아의 공만을 설하지만 여기서는 ‘아’도 ’법’도 모두가 공이다.

셋째, 별교란 대승 보살만의 특별한 가르침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가설로서 해명하며, 마침내 양자가 서로 일치한다는 중도를 지향한다.

넷째, 원교란 원만 융통하고 완전한 가르침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어떠한 차별 대립도 허용하지 않는 총체적 입장이므로 회삼귀일, 삼승을 일불승으로 귀일시키는 <법화경>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렇듯 지의는 불타 아래 수행하는 모든 이와 모든 믿음을 하나로 합하려고 하였다. 지의의 이러한 구분과 분별을 두지 않고 다 함께 어울러서 대 통합을 이루려는 사상은 그의 세계관에서도 드러난다.

  지의에 의하면 우리에게 나타난 차별적 세계는 이미 불이의 진여법성이기 때문에 각기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어느 순간 악마가 되기도 하고 천사가 되기도 한다. 극악의 화신이 되어 지옥의 삶을 영위할 수도, 극선의 부처가 되어 극락의 삶을 구현할 수도 있다. 인간은 가능성으로써 모든 세계를 다 품고 있다. 극악의 세계인 지옥에 불계가 있을 수 있으며, 극선의 세계인 불계에 지옥이 있을 수 있다. 깨달음을 지향하는 성자들의 세계에서 본다면 인간의 세계는 악이고 고통이지만, 악취의 세계에서 본다면 선이고 쾌락이다. 이는 상대론이라기보다, 상자(相資) 상즉론이다. 즉 서로가 서로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악이 없으면 선도 없다. 지의에 의하면 선과 악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써, 악의 지양이 선이며 선의 부정이 악이다. 선은 악에서 나온다.

이러한 논리가 진행되어 결국 불타의 마음 안에도 악이 있으며, 악마의 마음 안에도 선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부처 또한 극악의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악을 갖추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부처가 절대 지선 이라면 악을 배척할 뿐 구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우주간의 삼천대천세계는 한 찰나의 마음에 존재한다.'  이는 현실이 마음 먹기에 따라서 지옥도 될 수 있고 천국도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지의는 부처의 세계에서도 지옥을 통찰하였으며, 절망 속에서도 영원한 희망을 응시하였다. 지의가 생각한 이러한 통합된 세계관을 '일념삼천설' 이라 한다. 즉 삼천세계가 한 찰나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지의의 일념삼천설은 양 항을 아우르는 전체적 세계관을 확립하여 생멸 변화하는 차별적 현상세계가 바로 영원절대의 보편적 세계 내지 통일적 진리임을 천명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천태의 사상을 성구설이라 한다. 곧 일심에 일체의 삼라만상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법화경>은 궁극적으로 일승의 정법을 천명한다. 그것은 삼라만상 천차만별의 모든 존재를 포괄하는 우주의 통일적 진리로서, 이것이야 말로 세계의 참다운 모습니다. 온갖 차별의 현상세계는 일승묘법으로 통일된다. 이것이 이른바 '성구설'이었다. 이리하여 천태는 이상 속에서 현실을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현실에 희망이 있고 천상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 현실 속에서 이상을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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