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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생명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강대웅

 

 

목차

 

1.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

  ‘호모사피엔스’와 ‘인격체’의 생명의 가치

    - ‘호모사피엔스’의 생명의 가치

    - ‘인격체’의 생명의 가치

 

2. 임신 중절을 통해서 본 인간 생명의 시작

    - 보수주의적 입장

      1) 출생

      2) 체외생존가능성

      3) 태동

      4) 의식

 

3. 태아의 생명의 가치

 

 

 

인간의 생명의 시작은 언제인가라는 물음은 결국, 인간이라는 단어의 의미 정립에 따라 그 시기가 달라진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출산 이후의 생명을 인간으로, 자의식을 가진 이후를 인간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가진 수정란을 인간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미에 대해서 우선 정리한 다음에, 하나의 생명이 언제부터 인간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지 알아보자.

 

1.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

우리는 ‘인간’이라는 말을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의 구성원’이라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인지 아닌지는 염색체를 검사 해보면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이라는 말을 이러한 뜻으로 사용하게 되면 인간의 정자와 난자에 의해 임신된 태아는 존재하게 된 첫 순간부터, 즉 수정란일 때부터 인간 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수정란이 나중에 자라서 유전적으로 인간이 아닌 염색체를 가진 것으로 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심하게 그리고 치유 불가능하게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뇌가 없는 무뇌증 아이도 이러한 구분에 따라서 인간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의 의미는 ‘인간의 지표’에 해당되는 것을 두루 갖춘 인간이다. 이러한 인가의 기준은 개신교 신학자인 플레처(Joseph Fletcher)가 제안한 것으로 자의식, 자기통제, 미래감, 과거감, 타인과 관계 맺는 능력, 타인에 대한 관심, 의사소통, 호기심 등이 그 기준에 속한다.

 

이 두 가지 인간에 대한 의미를 첫 번째 의미는 ‘호모사피엔스’, 두 번째 의미를 ‘인격체’라고 했을 때, 이 두 가지 의미는 겹치는 하지만 일치하지 않는다. 태아, 정신장애아, 갓 태어난 아기 등은 모두 호모사피엔스의 구성원 이지만, 이들은 인격체로서 자의식을 가지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염색체만 호모 사피엔스의 것을 가진 생명체는 인간인가 아닌가?

 

 ‘호모사피엔스’와 ‘인격체’의 생명의 가치

 

- ‘호모사피엔스’의 생명의 가치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명의 가치는 서양 기독교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생명은 하느님이 창조 하였기에 그분의 소유이고, 인간을 죽이거나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은 아닌 하느님의 권리를 침범한 것이라고 말한다. 동물과 식물의 목숨은 인간이 다스리고 사용하라는 권한을 받았기에 이용할 수 있으나 인간의 생명은 인간의 소유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교리가 현대에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 지지는 않지만, 이것이 발생시킨 윤리적 태도는, 우리 종족은 다른 동물 종 보다 특별하며 권리를 가진다는 신념과 어우러져 아직 남아있다

 

- ‘인격체’의 생명의 가치

자의식을 가진 존재는 마래와 과거를 가지는 개별적 존재로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묙망을 가진다. 따라서 자의식을 가진 것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그들의 미래에 대한 욕구를 좌절시키는 것이다.

선호 공리주의자들은 인격체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일반적으로 다른 존재의 생명을 빼앗는 것보다 더욱 나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인격체를 죽이는 것은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심적이고 중요한 선호의 광범위한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격체를 죽이게 될 경우 그 희생자가 미래에 계획했던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가지는 존재로 볼 수 없는 존재는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선호를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선호공리 이전에, 인간은 스스로 ‘생명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미국 철학자인 툴리(Michael Tooley)는 생명에의 권리를 갖는 유일한 존재는 자신이 일정한 시기에 걸쳐서 존재하는 개별적 존재, 즉 인격체라고 주장한다. , 생명의 권리가 개별적인 존재의 생존을 지속시킬 권리라면, 그때 생명에의 권리를 소유하는 데 상관되는 욕망은 개별존재로서의 생존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러나 자신을 일정한 시기에 걸쳐서 존재하는 개별적 존재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 즉 인격체만이 이러한 욕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인격체만이 생명에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2. 임신 중절을 통해서 본 인간 생명의 시작

‘호모사피엔스’와 ‘인격체’의 생명의 가치를 통해 인간의 의미와 인간 생명의 권리를 알아  보았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언제부터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자. 인간들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였을 경우 낙태, 즉 임신 중절이라는 의료 행위를 한다. 이러한 임신 중절 행위에 앞서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언제부터 인간이냐, 즉 인간으로서의 생명의 시작이 언제부터이냐 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생명의 시작은 수정 직후의 수정란을 인간으로 보는 입장과, 14일 이후, 10주 이후, 6개월 이후 등으로 나눠지며, 그렇게 나누는 기준에 따라서 낙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967년까지 스웨덴과 덴마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서구 민주국가에서 임신중절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1973년 미국 대법원은 임신 6개월 내에는 산모가 중절 할 헌법적 권리를 가진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서유럽의 국가들은 거의 모두 임신 중절을 자유화 하였다. 그렇다면 임신 중절의 보수적인 입장과 그 반대 입장을 통해, 인가의 생명의 시작이 언제인지 되물어 보자.

 

- 보수주의적 입장

첫 번째 전제 : 죄없는 인간을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두 번째 전제 : 인간의 태아는 죄없는 인간이다.

결론 : 그래서 인간의 태아를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낙태에 찬성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두 번째 전제를 부정한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수정란과 아이가 동일한 염색체로서 연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수정란부터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수정란이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도 부모의 요청에 의해 아이를 죽일 수 없듯이 낙태도 허용할 수 없다.

하지만 수정란과 인간 사이에 도덕적으로 의미있는 구분선이 없다는 것은 사실인가?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구분선으로는 출생, 체외생존 가능성, 태동, 그리고 의식의 시작등이 있다. 이들을 차례로 분석해 보자.

 

1) 출생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태아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궁 속에 있는 가 밖에 있는가라는 존재의 위치가 그 존재를 죽이는 것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조산아는 임신 말기에 있는 태아보다 덜 발달되었다. 하지만 조산아는 배 밖에 있음으로 죽여서는 안 되지만, 이보다 더 발달된 태아는 죽여도 된다는 주장은 기이하게 들릴 뿐이다.

태아와 아이는, 자궁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우리가 볼 수 있든 없든, 동일한 존재로서 동일한 인간적 특성을 지니며, 동일한 정도의 고통을 알고 느낀다.

 

2) 체외생존가능성

체외생존 가능성은 미국의 6개월 내에는 산모가 중절을 할 수 있다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미국 대 법원은 체외 생존이 가능 할 때에 국가가 아이의 생명을 보호할 법적인 강제가 생긴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6개월 이후의 체외 생존 가능한 태아는 산모의 자궁 밖에서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할 능력을 가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외 생존이 아직 불가능한 태아도 잠제적인 생명을 가진 인간이다. 그리고 체외 생존 가능성은 의료 기술에 따라 변한다. 30년 전에는 두 달 이상 먼저 태어난 아이는 생존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세달 먼저 태어난 아이, 6개월 된 아이도 체외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의료 기술이 발달하여 그보다 일직 5개월, 혹은 4개월 된 아이도 체외에서 생존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의 생명의 시작이 앞당겨 지는 것인가?

자유주의자들은 태아가 살아남기 위해서 전적으로 산모에게 의존 한다는 사실을 이유로 태아가 생명에의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체외에서 생존이 불가능한 태아가 그 생명을 산모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해서, 산모에게 그 아이를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노인, 중증 장애인 등의 목숨의 권한이 그들을 돌보는 사람에게 있지 않는 것과 같다.

 

3) 태동

태동이란 아이의 움직임을 산모가 처음으로 느끼는 때이다. 하지만 이것은 산모의 입장에서 움직임을 느낀 것일 뿐, 그 이전부터 태아는 이미 살아 있었다. 살아 있었으나 단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 생명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

 

4) 의식

태아는 수정 후 6주에 이미 태아는 운동이 발생하며, 7주에는 두뇌 활동이 감지된다. 이를 바탕으로 태아는 임신 초기단계에서도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본적인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능력과 의식은 실제적으로 도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와 같이 우리는 출생, 체외생존 가능성, 태동, 그리고 의식의 시작에서 신생아와 태아 사이의 도덕적으로 인간과 인간 이전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경정적인 구분선이 없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 태아는 인간인가? 인간의 생명의 시작은 수정란부터인가? 하지반 이 물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처음에 우리가 나누어본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 즉 ‘호모사피엔스’ 인가 ‘인격체’ 인가에 따라 태아의 위상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3. 태아의 생명의 가치

 

임신 중절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적 입장의 첫 번째 논변인 ‘죄없는 인간을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우리의 특별한 가치부여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인격체’로 보게 된다면 태아를 인간으로 보기 힘들다. 태아가 합리적이거나 자의식 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인간이 ‘호모사피엔스’만을 의미하게 된다면, 이때는 보수주의자들의 태아의 생명에 대한 옹호가 도덕성을 결여하게 되고, 따라서 ‘죄없는 인간을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라는 첫 전제가 힘을 잃는다. 종족의 구성원의 조건과 죄의 유무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태아는 인격체로서도, 호모사피엔스의 구성원으로서도 그 목숨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인가? 태아의 현재적 상태만 본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태아는 현제의 상태뿐만이 아니라 잠재적 생명, 잠재적 인간이라는 측면에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잠재적 생명으로서의 태아

첫 번째 전제 : 잠재적 인간을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두 번째 전제 : 인간의 태아는 잠재적 인간이다.

결론 : 그래서 인간의 태아를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태아가 인간인가에 대한 여부는 앞의 논의를 통해 확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태아가 잠재적 인간이라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를 ‘호모사피엔스’로 할 때와 ‘인격체’로 할 때에 모두 해당한다. 하지만 태아를 잠재적 인간으로 보면서 처음 주장에 비해서 두 번째 주장은 첫 번째 전제가 약화되었다. 싹이 나는 도토리를 베어 내는 것이 고색창연한 떡갈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아의 생명의 잠재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태아에게 생명에의 권리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태아를 죽이는 것이 세계로부터 미래의 합리적이고 자의식적인 존재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고 자의식 적인 존재가 본질적으로 가치롭다면, 인간의 태아를 죽이는 것은 세계로부터 본질적으로 가치로운 것을 빼앗는 것이며, 그래서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더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인간 생명의 시작을 논하는 그 논의 자체가 순수하지 못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생명의 시작이 착상 때부터이니, 뇌가 형성되는 시기부터이니 등의 주장들은 생명 공학의 발전과 함께 시작 되었으며, 이런 주장들은 자신들 연구에 대한 윤리적 비난을 피해가려는 시도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생명의 시작에 대한 수정설, 착상설(14일 전후), 뇌기능설(60), 체외생존능력설(28), 분만설 등의 견해는 연구의 성과를 통해 이익을 보기를 원하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을 뿐, 그 대상이 되는 인간(태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은 수정된 첫 세포부터 시작하고 수정란, 배아, 태아는 인간이 될 잠재적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 생명체로서 존중해야 한다.

 

참고 문헌 - 실천 윤리학. 피터 싱어 지음. 황경식, 김성동 옮김. 철학과 현실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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