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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2 후설이 생각한 확실한 앎의 토대로서의 자아

후설이 생각한 확실한 앎의 토대로서의 자아

강대웅

 

들어가는 말

철학이란 확실한 앎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를 위해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앎에 대해 끝까지 질문을 해 본 결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 라는 결론을 얻었다. 즉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앎의 토대가 마음(Cogito)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마음과 몸을 분리시키고, 현상과 실재를 분리시켜서 정신으로 대상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의식의 틀이 변화하였다. 과학저들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이성을 통해 이념적·수학적으로 이 세상을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근대인들이 참된 세계라고 믿고 있는 세계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 신념 때문에 생활세계는 은폐되고 황폐하게 되었다.

로티는 이런 데카르트의 생각은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으며, 마음과 세계를 분리시킨 후 마음으로 이 세상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거울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후설의 판단중지는 바로 그 거울을 깨는 역할을 한다. 이제 후설이 그 거울을 어떻게 깨고, 우리 인식의 확실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보장하는지 알아보자.

 

후설이 되찾으려고 했던 것, 자아

후설은 데카르트가 마음을 잘못 이해하였다고 말한다. 즉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후설이 생각하기에는 자아와 세계는 서로의 상관관계에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늘 자아와 세계가 별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띠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릇된 믿음을 깨고, 우리는 단지 우리 마음에 드러난 것에 대해서 탐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판단중지’ 할 것을 요청한다.

“판단중지는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이 대상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런 믿음을 중단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대상을 직접 지각하며, 지각된 대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지각한 것은 대상 세계의 바로 그 특성이다'는 앞서 정돈된 상식적인 믿음들에 대한 중단이다.

“후설은 자신의 철학이념을 성취하기 위해 '환원', '판단중지', '괄호침', '배제'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를 크게는 "판단중지와 환원이라는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으며, 괄호침과 배제 등은 판단중지에 부수되는 상황으로 간주할 수 있다."

 

후설은 판단중지 이후에 남아있는 것은 현상 그 자체, 사태 그 자체라고 말한다. 이것은 데카르트와 달리 판단중지한 후에도 우리의 세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후설은 판단 중지를 통해 데카르트의 마음(Cogito)을 버린 것이 아니라 현상학의 원형적인 토대로 받아들인다. 판단중지를 통해서 확보한 선험적 주관성이 드러나게 되며, 판단 중지 후에 남는 것이 바로 그  선험적 주관성이 즉 마음(Cogito)이다.

 

세계의 원천으로서의 자아

“후설은 자아를 '체험들의 동일한 극으로서의 자아', '습득성의 기체로서의 자아', '모나드로서의 자아' 등 세 가지 모습으로 강조한다. 이 세 가지 모습의 자아를 세계(대상)와의 관계 속에서 해명해야만 비로소 '자아'개념의 선험적 성격이 분명해 질 것이다.

 

이제 이성이 모든 존재에 부여하는 의미문제를 자연 과학이 외면하면서 결국 제거 되었던 이성이 후설에 의해서 다시 중심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대상의 다양성만큼이나 우리의 체험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그때마다 자아의 시선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확실성을 얻기 위해 대상에 의해 변형되지 않는 순수 자아를 찾아야 한다.

많은 체험들이 시간의 변경과 진행에서 변화하는 반면에, 순수 자아는 결코 변화하지 않는다는 데서 이미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는 이미 서술한 방식으로 체험의 ‘원천’이요 동일극 으로서 체험에, 체험의 질료와 노에시스에 속한다. 노에마의 측면에서는 지향적대상 및 대상적 의미가 그러한 바와 같이, 순수 자아는 체험들을 일치시키는 동일극이다.

예를 들어 나는 하나의 교탁을 생생하게 지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또는 회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탁의 의미는 이 대상의 의미로서 동일하다. 다양한 여러 가지 노에마적 규정 내용에는, 그러므로 동일하게 유지되고 동일한 것으로서 각기 해당하는 규정 내용들의 통일점을 형성하는 하나의 ‘의미 핵심’, “중앙핵심”이 있다. 이 일관하여 유지되는 중앙핵심을 후설은 노에마적 의미, 즉 충만한 노에마아 구별하여 대상적 의미라고 불렀다.

대상적 의미는 궁극적으로 노에마의 단일성과 동일성을 결과한다. 그러한 한, 그것은 하나의 동일극이다. 이것에 상관적으로 순수자아가 다른 하나의 동일극을 이룬다.
우리가 환원 이전에 감각 기관을 수단으로 감각 지각에서 감각적 현실 내의 이러한 감각 물체로서 보거나 느끼는 대상과 지향적 대상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교탁의 존재의미, 우리가 ‘뜻을 둔’, 우리가 얻고자 한 의미는 불태워질 수 없으며, 화학 성분들로 분해될 수도 없다.

 

이러한 순수 자아를 바탕으로 해서 모든 ‘새로운’ 입장은 하나의 지속적 ‘견해’ 및 하나의 주제(경험, 판단, 기쁨, 의지의 주제)를 설립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부터 이전에 그러하였던 바와 동일한 나로서, 또는 지금 그러하며 이전에 그러하였던 바와 동일한 나로서 나 자신을 파악하며, 또한 나의 주제를 고수하였으며 이제 그 주제들을 이전에 정립하였던 그대로 현실적인 주제로서 인계받는 자아로서 나 자신을 파악한다.

순수 자아는 시간화하면서 그 자신이 등장, 퇴장하는 체험의 흐름 내에서 시간적으로 지속하며 시간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시간화한다’는 것은 순수 자아가 내재적 시간 내에서 그 자신을 과서, 현제, 미래의 동일한 자아로서 -지속적 현재에서-시간적으로 구성함을 뜻한다)

순수 자아는 이 체험의 일치 속에 자기 동일성을 확보한다. 즉 순수 자아는 오로지 이 지향적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체험들을 한 자아의 체험으로 확인하고, 이를 통해 자기 동일성을 확보한다. 이렇게 해서 확보된 자아가 '체험들의 동일한 극으로서의 자아'이며 우리 인식의 확실성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나가는 말

후설이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방법을 비판하고 새롭게 만들어낸 현상학은 우리의 판단을 중지함으로써 우리의 잘못된 믿음으로 변형된 인식을 버리고, 마음속에 드러난 것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학문이다. 후설은 이러한 자신의 철학을 연구철학이라고 말한다.

후설은 이를 통해 데카르트의 거울을 깨트린다. 대상에 대한 그릇된 믿음을 깨뜨리는 순간, 대상을 올바르게 반영하는 역할로서의 거울인 마음도 깨어진 것이다. 전통적인 데카르트주의자들이 바라보는 마음 안과 밖이라는 구분을 떠나야 만이 후설이 주장하는 판단 중지를 통한 선험적 주관성이 드러날 수 있다. 이러한 선험적 주관성을 통한 선험적 현상학을 통해 우리는 우리 마음에 드러난 세상을 이전보다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후설의 '자아' 개념의 선험적 성격/ 이성환 교수님, 2002

현상학/ W. 마르크스 지음, 길우 옮김, 서광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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